소설리스트

245화 적기조례 (2) (245/341)

적기조례 (2)

“오랜만입니다, 네이선 씨.”

“윌버포스 의원님, 도대체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설명해주십시오.”

“···일단 앉아서 얘기하시지요.”

윌버포스가 손을 몇 번 휘휘 휘두르자, 순식간에 네이선 로스차일드 앞에 갓 따른 밀크티가 배달되었다.

“향이 좋군요. 헌데 지금 차를 한가로이 마실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아무래도 웨스터민스터에 떠들썩한 그 법, <적기조례> 때문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의원님. 도대체 지금 상원이고 하원이고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겁니까?!”

지금껏 여당인 토리당과 이삭의 민족, 아니. 기욤 드 툴롱은 꽤 긴밀한 협조관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토리당 당수 윌리엄 피트와 기욤 두 사람 모두 전쟁을 혐오하고 서로서로 골 썩힐 바엔 적당히 윈윈하는 선에서 타협하길 원하고, 일단 자신들의 업적 중 하나인 명예혁명을 프랑스가 따라했다(?)는 것에서 기반한 영국의 호의적 시선도 존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법이 본회의에 상정되다니요. 이건··· 아무리 봐도 저희 회사를 노린 화살이잖습니까.”

“이런 말 해서 죄송합니다만... 저희도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십니까!”

윌버포스는 잠시 침묵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올해가 1804년이지요.”

“그렇습니다만.”

“내년이 총선입니다.”

“···이런 젠장.”

“우리 토리당이 거의 장장 15년을 해먹었으니, 지금 휘그당 입장에선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 수밖에 없겠지요. 이번에도 지면 영영 20년을 우리 토리당에 넘겨줄 처지니.”

“왜, 왜 하필 우립니까?”

“아시다시피 휘그 놈들의 뒤에는 베어링에서 대주는 자금이 있습니다. 베어링 그 자도 휘그당 소속 하원의원이니 말 다했지요.”

우리가 동인도회사의 권한을 축소 시킨 걸 매우 고깝게 생각하고 있을 베어링 입장에서 이건 너무나도 좋은 기횝니다.

윌버포스가 덧붙였다.

아무리 영불관계가 20년 전보다 나아졌다고 한들, 영국인들의 뇌리 깊숙한 곳에 각인된 적국은 프랑스다.

그러니 그 프랑스 기업을 겨냥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든 말든 영국인들 입장에서는 좋으면 좋았지 별로 나빠질 게 없는 선택지.

“요컨대, 아무리 때려도 탈 없는 화풀이 인형인 셈이군요.”

“심지어 법을 내건 목적을 ‘프랑스 인들로부터 선량한 마차업자들을 지키기 위함’이라고 했으니 더더욱 그렇지요.

저희 토리당 입장에선 반박하는 순간 프랑스에 민생을 팔아먹는 매국노 취급을 받을 게 뻔합니다.”

결국 네이선은 뭐라 하지 못한 채 발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

런던 첼시 항에 도착하자마자, 나와 플로리앙은 마차를 잡아타고 서둘러 시티 오브 런던에 있는 우리 지사까지 내달렸다.

“죽여주십시오, 사장님!”

“에헤이, 일어나세요. 이걸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막습니까. 충분히 잘 대처하셨습니다.”

나는 날 보자마자 무릎을 꿇은 네이선을 일으켜주며 말했다.

“네이선 지사장. 일단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부터 얘기해주세요.”

“예, 사장님.”

···음.

···이야.

“이거 좆됐는데.”

나는 네이선의 말을 가만히 듣다가 나도 모르게 읊조리고 말았다.

“죽여주십시오, 사장님!”

“아니 그러지 말라고요.”

이거, 상황이 많이 안 좋다.

내가 아가리를 털어서 상황을 반전시키기엔 너무 프레임이 잘 짜졌어.

‘영국 마차업자들은 이제 다 망했어! 이제 여긴 프랑스 자동차가 지배한다!’

‘이 못된 프랑스 놈 같으니! 나, 휘그당이 너흴 단죄하겠다!’

사악한 음모를 꾸미는 악의 수괴 이삭의 민족.

그걸 단죄하는 정의의 용사 휘그당.

캬, 그림 좋네.

이러면 나랑 같이 사우나도 가고, 술도 마시고, 밥도 먹은 토리당도 별수 없지. 까닥했다간 영국판 이완용이 된다.

“여론전은 일단 못하겠고.”

하기야 애초에 내 나와바리인 프랑스도 아니고, 쟤네 본진인데 어떻게 이겨.

상대가 깔아놓은 사이오닉 스톰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악취미는 없다.

“그러면 로비라도 해볼까요?”

“내가 휘그당 정치인이면 얼쑤 좋다-하고 언론에 까발릴걸요.”

국민 여러분, 저는 이렇게 간악한 프랑스 놈들의 마수에 굴하지 않고 신념을 지켰답니다. 총선 때 한 표 아시죠?

“그러면··· 뭐 좋은 수가 없을까요?”

“음.”

나는 한참 동안 고개를 요리조리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없는 것 같은데요?”

내가 이걸 해결할 수 있었으면 샌드위치 팔이를 왜 해? 당장에 영·불 이중공화국을 수립하고 대총통에 취임했지.

“네이선 씨.”

“예, 사장님.”

“네이선 씨 추측으로는 프랜시스 베어링이 지금 일어나는 일의 흑막이라고 했었죠.”

“거의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거의라...

“아니. 그 정도론 부족합니다. 확실하게 말하세요.”

“···제 10년 넘는 영국 생활과 그간 축적된 정보를 토대, 그리고 만들어놓은 연줄에 의하면 프랜시스 베어링이 맞습니다.”

“책임질 수 있습니까?”

“···.”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결연한 얼굴로 날 쳐다보며 말했다.

“예. 책임질 수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래. 그 정도 확신은 돼야 내가 도박수를 던져보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세상인데, 죽을 자리에 던져졌다고 얌전히 죽을 사람이 어디 있어?

***

어둠이 내려앉은 런던.

사람들이 모두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들었을 새벽 시간에, 그 인적 드문 어둠 속에서도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몇몇 인영이 밤을 틈타 움직였다.

“오! 오셨습니까?”

“···지금 저희 둘이 만나는 게 양측에 결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주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에헤이. 이 사람아, 왜 그리 각박하게 구나.”

눈에 띄지 않게 평민들이 쓰는 검은 중절모를 쓴 하원의원 윌리엄 윌버포스는 톡 쏘는 말을 내뱉은 사람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아이고오. 누군 쎄빠지게 자기 해달라는 대로 굴러줬더만 자기 좀 야밤에 불렀다고 이렇게 문전박대를 하다니이.”

런던 사람들 이것 좀 보세요, 이게 댁네 나라 총리라는 사람 인심이래요.

이러니까 사람들이 댁 말고 댁네 반대 정당에 표를 던지지. 우우우.

“···후, 알겠습니다. 제가 항복하지요.”

윌리엄 피트는 두 손을 드는 제스처를 취하곤 다시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뭡니까, 총감님.”

“요구는 어디까지 가능합니까?”

“뭐, 대영제국 수상직을 달라는 요구만 아니라면야 안 될 건 적지요.”

“아깝군요. 영·불 이중 공화국을 설립하고 대총통에 오르려던 제 계획이 이렇게 수포로 돌아가다니.”

“계속 그렇게 실없는 농담하실 거라면 다우닝가로 돌아가겠습니다.”

에이잉,,, 하여간에 사람이 재미가 읎서. 님 혹시 독일인임?

“그러면 대신 영국에서 돈 깨나 있다는 유권자 좀 모아주십쇼.”

“흠. 프랑스에서처럼 절절하게 하소연이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여기 런던 인심은 파리 인심만큼 후하지 않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천민자본주의의 끝판왕 같은 인물들인데 총감님이 얼마나 수사에 능하다 한들 힘들 겁니다.”

그리고.

피트는 덧붙였다.

“옛날이었다면 몰라도, 그자들이 총감님을 보는 시선도 지금은 곱지 않습니다.”

“아. 그거야 뭐.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손가락을 까닥여 뒤에 서 있던 비서를 불렀다.

비서는 앞으로 나서서 피트와 우리가 볼 수 있도록 가방을 열어 안에 든 종이 쪼가리들을 내보였다.

“저게 뭡니까?”

“뭐긴요. 수상님네 나라에서 표 낼 권리를 가지신 분들께서 저한테 보낸 스팸, 아니. 악성 메일들이죠.”

“하. 그 치들이란.”

피트는 고개를 몇 번 내젓더니 다시 말했다.

“정말로 초대장만 한 번 돌려드리면 되겠습니까?”

“예. 뭐 제가 머리에 총 맞은 것도 아니고 수상님더러 기욤 드 툴롱 지지 연설을 해달라고 하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요구사항은 그걸로 끝인가요?”

“예, 없습니다. ···아, 참고로 초대장은 제 이름으로 보내주셔야 합니다?”

피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면 아무도 가지 않을 텐데요?”

“그걸 노리는 거라서요.”

“나참. 알겠습니다. 이 윌리엄 피트는 총감님의 심모원려가 뭔지 도통 모르겠군요. 여하튼 총감님의 부탁대로 해드리겠습니다.”

이걸로 서로 빚은 다 갚은 겁니다.

피트는 그렇게 덧붙이곤 다시 어둠을 틈타 사라졌다.

“쓰으읍.”

“총, 총감 각하. 너무 마음에 담지 마시지요. 피트 저 친구가 원래 저런 성격이 아니고, 요즈음 총선 앞이라 받는 압박이 심해서 그럽디다.”

윌버포스 의원은 안절부절하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예? 아, 그게 아니고 난 아직 다 갚았다고 한 적 없는데 자기 혼자 청산했다고 하니까 고까워서 그럽니다.”

“···예?”

“어딜 채권자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채무자가 다 갚았다고 운운해? 팍 씨. 날 열정페이로 굴려 먹으려고 들어? 안 그렇습니까, 윌버포스 의원님?”

“예? 아, 예...”

“여윽시 윌버포스 의원님이 생각하기에도 그렇죠? 크헬헬.”

나는 씨익 웃으면서 파이프에 담배를 담아 입에 물었다.

궐련은 불빛 때문에 이렇게 한밤에 쓰기엔 좀 그렇더라고.

···뭐, 좋아. 대충 빚 중 반은 갚았다고 쳐주지.

***

1804년 6월 24일.

런던에 위치한 어느 파티홀.

썰렁하다.

아니. 보통 썰렁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이건 마치...

“유령이라도 들린 흉가 같군요. 안 그렇습니까?”

“억!!”

한참 동안 홀로 위스키 잔을 들고 상념에 잠겨 있던 33세의 사업가, 로버트 오언(Robert Owen)은 갑작스레 자신에게 다가와 대화를 건너는 남성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오언이 고개를 돌려보니 자기 또래로 보이는 젠틀한 남자가 손을 건네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데이비드 리카르도라고 합니다. 증권거래를 업으로 삼고 있지요.”

“아, 예. 전 조그마한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로버트 오언입니다. 반갑습니다.”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런던의 배불뚝이들과 부대끼다가 이런 곳에서 마음 맞는 동년배를 보니 몸을 주체할 수가 없더군요.”

“마음이 맞는다구요?”

리카르도라는 사내는 씩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아무렴 <반독점법>을 만든 기욤 드 툴롱이 주최한 파티에 온 사람들이 저와 마음이 안 맞을래야 안 맞을 수가 없지요. 자, 일단 건배부터 합시다. 건배!”

“건, 건배!”

짠 하는 소리와 함께 위스키 잔이 부딪쳤다.

“플로리앙 씨. 다 합쳐서 몇 명 왔답니까?”

“총원 800명 중 18명 왔답니다. 18명이라, 18명··· 이런 씨팔! 다 합쳐도 우리 회사 비서실이랑 비등비등하잖습니까! 사장님 이게 정말 맞는 겁니까?!”

“어유 제가 이상한 짓 한두 번 해봤습니까? 그러려니 하세요.”

“제가, 만약, 홧병으로 죽으면, 다 사장님 탓입니다.”

“걱정마세요. 그 뭐냐, 페시옹 씨가 알려줬는데 저어어기 아메리카에는 부두교라는 게 있대요.

그걸로 죽은 자를 살려낼 수 있다던데, 제가 꼭 다시 살려서 써먹어 드리겠습니다. 캬, 좀-비가 된 부사장이라. 좀 멋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지금 온 사람 중에 빨갱이거나 그에 비슷한 생각을 지닌 사람 말고 누구 있답니까?”

“예, 조사 결과 딱 한 명 있습니다만.”

“그러면 그 사람 좀 여기로 불러와 주세요.”

어디 슬슬 시작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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