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기조례 (1)
- 툭.
페시옹 씨는 일하는 내 책상 위로 편지 몇 봉투를 슥 내밀며 말했다.
“사장님, 사장님 앞으로 온 서신입니다.”
“저요? 보낸 사람은 누군데요?”
“토마스 멜서스(Thomas R. Malthus)라는 영국인 학자라고 하더군요.”
“···멜서스? 설마 내가 아는 그 멜서스?!”
“아, 사장님께서 아시는 사람입니까? 꽤 대단한 사람인가 보군요.”
아. 당연히 알지. 멜서스 그 양반을 상경계 학생이 어떻게 몰라.
‘여러분 우리 이렇게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합니다! 다 굶어 죽는다구욧!’
그 유명한 멜서스 트랩, <인구론>을 만든 사람 아닌가. 유명하고 말고.
비록 나중에 과학의 발달로 인해 반박되고만 학설이지만, 까놓고 말해서 사람이 신도 아니고 100년 뒤 일을 어떻게 예상할 수 있겠나.
20세기 말에도 사람들한테 ‘나중에는 사람들이 TV랑 워크맨이랑 게임기를 다 합친 전화기를 들고 다녀요.’라고 하면 구라치지 말라고 삐삐로 얻어맞을 텐데 소달구지 끄는 시대 사람이 화학 비료니 뭐니 하는 걸 예상하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지.
“그런데 제가 알기론 사장님과 일면식 없는 분으로 압니다만.”
“쓰으읍. 그렇긴 한데... 일단 한 번 줘보세요. 뭐라고 하나 한 번 봐야겠네.”
그 멜서스가 나한테 개인적인 편지를 줘? 아, 이건 못 참지.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페시옹이 건네준 편지의 밀랍 봉인을 뜯고 쭉 읽어 내려갔다.
[친애하는 기욤 드 툴롱 각하께.
안녕하십니까, 전 케임브리지 대학교 수학과 전임교수 토마스 멜서스라고 합니다.]
홀리몰리. 내가 그 멜서스한테 편지를 받아볼 줄이야! 이건 가문 대대로 꿍쳐놓을만 하다.
나중에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면 그때 경매에 붙여 팔라고 해야지.
쭉 읽어내려가니, 역시 18세기 19세기 초 답게 각종 미사여구가 듬뿍듬뿍 담긴 안부 메세지라, 나는 대강 본론이 시작될 중론으로 건너뛰어 읽기 시작했다.
[···(중략) 안타깝게도, 각하께서 이번에 고안하셨다는 그 <반독점법>은 자유로운 시장경제에 심각한 폐해를 끼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
“사장님, 멜서스란 사람이 뭐라고 합니까?”
“어, 음, 어.”
아니야, 그럴 수 있지. 이 세상 사람이 뭐 칼라로 연결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머리에 괴상한 안테나를 박아넣은 총천연색 괴수들마냥 다 같이 눈누난나 하면서 꽃밭에 뒹굴 수 있는 것도 아니잖는가.
암. 그렇고 말고. 개개인의 생각차이지.
[···(중략) 이는 명백한 실책이고 실정이며 실수입니다. 이 토마스 멜서스는 각하께 너무나도 실망했다는 말 이외에는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저 하루라도 빨리 그러한 반이성적인 법이 철회되고, 프랑스에 있어야 할 정의가 다시 서길 바라며 이만 줄이겠습···.]
“이, 이 씨발 좆문가새끼가 어디서 훈수질이야아악!!”
“사, 사장님! 갑자기 왜, 왜 그러십니까!?”
“인구론 좋아하시네! 느그 인구론 나중에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거든?!”
소금! 소금 가져와! 소그으으음!!
“저, 사장님?”
“왜요.”
“다른 서신도 있습니다만... 버릴까요?”
“이번엔 누군데요.”
“이번에도 영국인입니다. 이름은 데이비드 리카르도(David Ricardo)라는데, 그닥 유명한 사람은 아닌 것 같습···.”
“당장 내놔!!!”
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페시옹의 손에 들린 편지를 빼앗았다.
“마이, 마이 프레셔스...”
“왜, 왜 그러십니까?”
왜? 왜냐니. 그야... 그 데이비드 리카르도인걸?
현대 경제학의 아버지, 데이비드 리카르도.
나중에 그의 이론이 이어져 케인즈 학파가 탄생했고, 현대 거시 경제학이 만들어졌으니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는 가히 짐작조차 못하리라.
[존경하는 기욤 드 툴롱 전 프랑스 재무총감께.]
“오. 세상에. 리카르도가 저보고 ‘존경하는’이래요.”
“···뭐어 새삼스럽게 그러십니까?”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 페시옹을 놔두고 계속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중략) 이번 법안 통과는 역사의 거대한 약진이며, 사회 전체의 효용을 증대시킬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일부 편협한 인사들의 말은 그저 흘려 들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중략) 먼 런던에서도 각하의 행보를 응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두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비록 일천한 증권인이 하는 말이지만 각하께 힘이 될 수만 있다면···.]
아.
주모!! 샷따 내려어어억!!
***
진정한 슈퍼스타는 빠와 까를 동시에 미치게 한다고 했던가.
내가 슈퍼스탄지 아닌진 모르겠지만, 일단 1804년 중순의 나는 그 말을 온몸으로 톡톡히 경험하고 있었다.
토마스 멜서스, 데이비드 리카르도 등 걸출한 두 인물의 편지를 시작으로, ‘아 내가 경제는 좀 아는데···.’하는 술자리 야매 경제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상업에 조금이라도 발을 담갔다 싶은 유럽인들은 온통 ‘반독점법’ 이야기로 날을 새웠고, 내게 연신 자기들의 기똥찬 아이디어랍시고 불쏘시개를 보내왔다.
물론 그 불쏘시개를 날리는 대부분의 술자리 경제학자들과 배불뚝이 자본가들은 날 거의 배신자 취급.
나한테 우호적인 사람들은 뭐, 그닥 없다. 기껏해야 샤를 푸리에(François Marie Charles Fourier) 같은 산악파 쪽 의원들 몇몇?
애초에 지금 관념으론 받아들이기 어려운 개념이니까 기대도 안했다.
하루하루 날이 지날 때마다 우리 집 앞에 있는 불쌍한 편지통이 그 인간들 때문에 배가 부르다 못해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하. 내가 아무리 낮게 잡아도 하루에 100통은 넘게 읽는 거 같은데 이게 말이 돼?
미안해 우체통아. 널 고통에서 꺼내줄 수 없을 것 같다. 다음 생애에는 한적한 시골집 우체통으로 태어나렴. 흑흑.
싹 다 걷어서 화톳불에 활활 태워버리고 싶어도 개중에 유우명인들이 있을지 모르니 직접 읽어 솎아낼 수밖에 없었다.
[인도 해역사령관. 청색 준장, 호레이쇼 넬슨 드림.]
이거처럼 말이야.
어디보자. 발신지가 뱅골이면, 아마 올해 초에 보낸 거일 텐데.
넬슨 이 양반, 노퍽 촌구석에서 썩던 자기가 다시 해군으로 복직하게 된 게 내 덕이라고 생각했는지 매년 나한테 편지를 보내온다.
[놀랍고, 경이롭고, 또 언제나 새로운 영광을 위해 힘쓰시는 기욤 드 툴롱 각하께.]
음. 이 아부하는 버릇은 인도에 가서도 나아지질 않았구만. 지금 상관이 리처드 웰즐리 그 양반 아니었나? 그 깐깐쟁이 밑에서 성격 좀 고치나 싶었는데 영 아니었나보다.
넬슨의 편지는 항상 그랬듯이 제 잘난 점 자랑하는 게 팔 할 이상이니 고이 접어서 나중에 잠 안 올 때나 읽어봐야겠다.
나머지는··· 음.
[님 혹시 빨갱이임? 님 혹시 생 시몽(Claude Henri de Rouvroy, comte de Saint-Simon / 공상적 사회주의자) 좋아함?]
[너 때문에 이제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가정이 황폐화되고···.]
[널 죽이겠다.]
쯧.
“이야 화끈도 하셔라. 자,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싹 다 화로에 던져버리십쇼.”
“옙. 사장님.”
난 수북하게 쌓인 편지더미가 하나 둘 화톳불의 재가 되어 가는 모습을 보며 뻑뻑해진 눈을 문질렀다.
그래 죄다 내 욕이구만.
나는 관대하다.
아무리 속 좁은 소인배 쉐끼들이 날 음해하고 물어뜯는다 해도, 난 관대히 용서해 줄 수 있다.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하는데 니들이 아무리 그렇게 지랄을 해봤자 어쩔거냐 이 말이야.
꼬우십니까, 해외 비즈니스맨? 꼬우면 프랑스 시민권 따십시오. 그러면 나 당신에게 알려준다, 툴롱산 팔콘 펀치.
으딜 프랑스 시민권자도 아닌 놈들이 프랑스 법에다 대고 왈가왈부야. 왈가왈부는.
지금은 거리낄 게 없었다.
고민하던 트러스트 문제도 해결했고, 이제 남은 건 본업으로 돌아와, 자동차들을 배불뚝이 런던 자본가 나리들의 핫한 사치품으로 팔아먹는 것 뿐.
여전히 우리 이삭의 민족 산 고오오급 프랑스제 사치품을 싹싹 쓸어 가주시는 고마운 영국인들께 남들과 다르게 색다르게 도로를 타는 요 자동차는 분명 날개돋인 듯 팔릴 거다.
암, 고렇고 말고.
나는 힘차게 기지개를 피며 말했다.
“자, 이제 분탕종자들도 다 처리했으니까 이대로만 갑시다!”
- 덜컥.
“저, 사장님?”
아니. 이게 누구야. 우리 바쁘신 플로리앙 부사장님이시잖아.
“왜요. 또 누가 악성메일을 보냈나요?”
“아니요. 네이선 로스차일드 지사장에게서 온 보고서입니다.”
네이선? 아직 정기보고까지는 날짜가 꽤 남지 않았나?
“일단 읽어보시죠.”
플로리앙 씨는 굳은 얼굴로 내게 서류를 넘겼고, 나는 페시옹 씨가 건네주는 보고서를 받아 쭉 읽어 내려갔다.
“이게, 뭔, 잠깐. 내가 지금 만우절 농담 모음집을 보고 있는 겁니까? 농담하는 거죠?”
“아니요. 네이선 지사장이 보낸 보고서가 맞습니다.”
“씨이이이바아알. ···일단은 짐 대충 싸서 영국으로 잽싸게 가봅시다.”
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보고서를 대충 책상 위에 던졌다.
[프랜시스 베어링 하원 의원, <적기조례 법> 웨스터민스터에 발의!]
젠장, 방금 전에 ‘분탕종자도 처리했고, 이대로만 갑시다!’라고 했던 거 같은데...
불과 5분 만에 순항 예정이었던 기욤 드 툴롱 호는 격침되고 말았다. 개 씨 발 !
***
대영제국, 런던.
기욤이 한창 정신을 잃을 무렵.
이삭의 민족 영국지사를 맡고 있는 네이선 로스차일드 또한 관자놀이를 매만지고 있었다.
<적기조례>
- 공도에서 증기기관을 사용하거나, 동력원으로 삼은 모든 차량의 중량은 12톤으로 제한한다.
- 최고 속도는 시속 16km, 시가지에서는 시속 8km로 제한한다.
- 차량 앞에는 적색 깃발을 든 신호수가 55미터 앞에서 미리 차량이 올 것에 대해 경고를 해야 한다.
- 말 등 가축들이 놀라지 않도록 매연, 소음은 일절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이건 저격이었다.
이 세상에 증기기관으로 작동하는 차량은 딱 두 대.
이삭의 민족에서 나온 증기기관차, 트레비식-머독 1호와 라부아지에의 증기자동차인 이삭 1호.
그 외엔 일절 상용화되지 않았으니 이 법은 이삭의 민족을 노린 법이 다름없었다.
“하, 이 교활한 늙은이 같으니. 5년 동안 그렇게 뒤를 캐더니 결국 알아냈나.”
법안의 발안자인 프랜시스 베어링.
과거 기욤이 뒤통수를 엇박으로 쎄게 후려버렸던 동인도회사의 총수.
지난 수년 동안 런던, 맨체스터, 도버의 증권거래기록을 이 잡듯 뒤지더니 결국 이삭의 민족이 그 주식파란을 일으킨 범인이라는 심증이 확실해진 듯 했다.
“사장님 말씀대로 파운드는 죄 리브르로 환전해서 금고에 넣어놨고. 금붙이는 이미 본사로 다 날랐으니 설사 압류당해도 본사는 타격 없어.”
네이선은 얼굴을 굳히며 일어났다.
“마부, 윌버포스 의원 댁으로 가지.”
사장님이 오시기 전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한다.
투자자에게 해를 끼치는 건 로스차일드답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