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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화 지속 가능한 발전 (1) (240/341)

지속 가능한 발전 (1)

청명한 하늘 아래.

오늘도 파리, 생-미셸 가(街)는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대부분이 대학생, 교수, 교직원.

프랑스의 서울대나 마찬가지인 소르본 대학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사람들.

그런 학구열로 활활 타오르는 자들로 들어찬 이곳에서, 요근래 가장 활발한 학술활동을 펼치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1년 전 신설된 소르본 대학교 경제학부였다.

“경제학? 경제라는 게 학문으로 만들 수 있는 거였소?”

“학문이란 모름지기 인간의 감성과 이성을 이끄는 기수 아닙니까? 경제학이란 숫자놀음이 어떻게 인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전 반대입니다.”

“경제학이라! 그래, 가르칠 교수는 있소? 여태까지 제대로 정립된 학문도 아닌데 말이오.”

1년 전, 으레 새로운 과목을 신설하면 따라오는 반대가 따랐으나.

“비록 지금 경제라는 단어가 학문이라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겠지만, 제가 제 이름을 걸고 장담하겠습니다. 앞으로 50년 안에 경제라는 단어는 학문이란 단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리란 걸.”

“크흠, 당수의 고견을 믿지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학문을 가르칠 교육자를 영 구하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저 멀리 영국에서 죽은 애덤 스미스를 초빙해 올 수도 없는 일이니.”

“그래요? 지금 교수가 없다면 겸사겸사 제가 하지요. 이제 됐습니까?”

“아유, 당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야 당연히 만들어 봐야지요. 헤헤.”

현 야당 당수가 직접 나서니 그 누가 감히 앞을 막겠느뇨?

방금 전까지 반대를 위한 반대를 목놓아 부르짖던 사람들은 모두 다 같이 찬성론자로 변했다.

잘됐구나 잘됐어.

“뭐, 그렇게 된 거지요.”

[소르본 대학 경제학부 초빙교수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라고 적혀 있는 명판을 앞에 두고서, 익숙한 얼굴은 따듯하게 데운 우유를 입가로 가져갔다.

“한 잔 드릴까요?”

“아뇨. 됐습니다. 그나저나 실행력 하나는 예나 지금이나 대단하시네요.”

“총감만 하겠습니까.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이지요.”

저요? 저는 괴애애앵장한 안전제일주의자이자 보신주의잔데. 뭐 나서서 하고 그런 거 싫다 이거에요.

“그런데 총감.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제가 곧 강의에 들어가야 해서 말입니다.”

“교수 생활이 나름 체질에 맞으시나 봅니다?”

“맡은 바 소임은 다 해야지요. 그리고 이제 갓 대학생이 된 삐약이들이 제가 내준 과제에 끙끙 앓는 걸 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습디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로베스피에르는 옅은 미소와 함께 이어 말했다.

“제가 만들고 싶은 법이 하나 있는데, 한 번 다른 사람과 의논해보고 싶어서 말입니다.”

“···정치하시게요? 잠시만 기다려보십시오. 내가 입당원서를 어떤 서랍에 넣어뒀더라.”

“전. 정치. 안 합니다.”

“농입니다. 농.”

이 양반아... 농담도 귀에 딱지 앉게 들으면 진담 같거든?

로베스피에르는 피식 웃더니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흠. 의논이라... 일단 제가 교수를 맡았다는 걸 모르시는 걸 보아하니, 제가 그 ‘의논’을 하고픈 첫 번째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군요.

···그래요. 시에예스 당수께선 뭐라고 하시덥니까?”

“햐, 아주 날카로우신데요.”

“아직까진 교수보다 정치인이란 직업이 주(主)라서 말입니다.”

역시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몸뚱아리 하나만으로 고등문관시험을 통과한 사람답게 머리가 핑핑 비상하게 돌아가는구만.

나는 로베스피에르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법의 이름은 반독점법.”

“내용은?”

“시장 경제를 어지럽히는 모오옷된 기업을 규제하는 법안입니다.”

“흠.”

그는 잠시 턱을 쓸어내리더니 내게 물었다.

“반독점법. 기업 규제라.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지요.”

“막스. 시장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말을 이어 나갔다.

“제 사견으론 시장이란 무한한 가능성을 창출해내는 곳입니다. 더 나은 상품, 더 나은 삶을 위한 끝없는 경쟁과 변화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고, 사회를 바꿔나가는 시발점이 바로 시장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냉혹한 곳이기도 합니다.

“다른 결투와 마찬가지로. 시장이라는 결투장에서 모두가 승리자가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끊임없는 경쟁과 변화가 시장에 필요하다는 건, 변화하지 못하는 참가자는 도태된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너도 나도 삶을 걸고 벌이는 결투.

“그러다 보니 가끔씩, 개중에서 조금 더 ‘편한’ 길을 선택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죠.”

“편한 길이라.”

“담합, 적대적 인수 합병, 심하면 물리적인 위해까지. 손을 조금 더럽히는 대신 확실하게 우위를 점하려는 그런 자들 말입니다.”

“······음.”

“저 멀리 동양에서는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린다. 검은 잉크를 가까이하면 흰 종이도 검어진다.”

“시장을 어지럽히는 자들이 하나 둘 생기다보면 나중에는 시장 전체에 더러운 권모술수가 판치게 된다?”

“당연하지요. 딱 까놓고 말해서 더러운 짓으로 경쟁을 이긴다 한들 그런 패악을 벌하는 자가 없는데 안 하는 게···.”

“안 하는 게 병신이군요. 잘 알겠습니다.”

로베스피에르는 생각에 잠긴 눈으로 턱을 다시 한 번 쓸어내리며 천천히 말했다.

“애덤 스미스 선생은 <국부론>에서 모든 이들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 행동한다고 했었지요. 전 그 말에 100퍼센트 동의하는 건 아닙니다.

어머니의 모성애, 빈자를 향한 측은지심, 그런 게 모두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하는 행동이라고 치면 세상이 너무 삭막해지잖습니까.

게다가 지금 제 눈앞에 그 반면교사격인 인물도 있으니 더더욱.”

누구? 나?

“제가요?”

“그럼 달리 누가 있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과거 베르사유에서 총감이 보여준 행동이 총감 본인의 이득을 위한 것이라곤 생각되지 않거든요. 이 세상에, 어느 장사치가 국왕을 두 번이나 들이 받아버린단 말입니까? 오히려 아부하면 아부했지.”

그거슨... 그 시대의 흐름, 그러니까 거부할 수 없는 그런 흐름 때문인걸요. 결코 내가 꼴 받아서 받아버린 게 아니란 말이야.

“총감이 염려하는 바는 잘 알겠습니다. 확실히, 부정한 방법으로 앞서나가는 작자들을 단도리하지 않는다면 부정부패가 우후죽순 늘어나겠군요.”

“그럼요. 성실하고 선량한 납세자들을 지키는 게 바로 야경국가의 역할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 야경국가의 역할, 더 나아가서 반독점법은 ‘어느 정도’까지 힘을 행사할 수 있을까요.”

날카롭다. 역시 조항 가지고 사람 볶아먹는 변호사 출신답다고 해야 하나.

“되도록이면 쎈. 아주 엄두도 못 낼 정도로 강한 벌을 내릴 수 있어야겠지요.”

“왜지요?”

“물을 생각해보시죠. 물에 한 번 잉크를 풀고, 다시 정수해서 깨끗한 물로 만들기 위해선 굉장히 많은 과정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모닥불을 피워서 불을 만들고, 그 불로 물을 끓여 따로 증발된 수분을 모아야 비로소 정화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단칼에 목을 치자. 그러면 집행은 어떤 식으로 하시렵니까?”

“강제로 회사를 분할해도 되고, 아니면 공기업으로 전환하거나 경매에 붙일 수도 있겠죠. 그것도 아니라면 해당 기업의 노무자들에게 주식을 나눠줘 주주총회에 노무자가 참여 할 수 있게 만든 뒤, 해당 회사를 감시하게끔 만들 수도 있구요.”

“···총감, 이건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겁니다만.”

“뭔데요?”

“총감은 혹시 공산주의자입니까?”

“이런 씨발.”

공산주의자는 당신이잖아! 그리고 내가 아니라 이 병신 같은 시대가 이상한 거라고!

“저는. 뼛속까지. 자본주의자입니다.”

“그렇다기엔 입에서 나오는 게 극렬 산악파 당원이나 마찬가집니다만. ···정말 입당하실 생각 없습니까?”

“예, 없는데요.”

“아쉽군요. 여하튼 총감의 뜻은 제가 잘 갈무리해보겠습니다. 살펴 들어가시지요.”

“예? 제가 왜 갑니까? 아직 구체적으로 법 조항 초본은 안 만들었잖습니까.”

내가 없으면 당신 또 이상한 최고가격제 같은 거 만들 수도 있는 거 아냐!

그러나 내가 그러던 말던 로베스피에르는 태연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법령 제정은 입법부의 권한입니다만? 왜 정부 외(外)인사가 왜 입법부의 고유 권한에 태클을 걸려고 하시나요?”

“아니 그래도 제가 건의한 거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건의는 건의고 발의는 발의지요. 혹시 꼬우십···, 아니. 싫으십니까?

이번 재무총감 선거에 출마하셔서 당선된 뒤에 행정부 수반의 권한으로 간섭하시면 되겠군요. 이것 참 기대되는데요.”

“이, 이익...!”

크아아악.

말싸움 드럽게 잘하네 진짜.

***

졌다. 상대는 사상 최고의 아가리 파이터. 아가리질로 국왕 대가리도 자른 사람이니 내가 이길 턱이 있나.

내가 궁시렁거리며 차에 오르자, 페시옹 씨가 넌지시 물었다.

“사장님, 왜 그렇게 죽상이십니까?”

“로베스피에르가 꼴 받게 하잖아요.”

내가 해준 게 얼만데! 매정한 인간 같으니.

“하하. 괜히 그분을 ‘부패할 수 없는 자’라고 부르는 게 아니지요. 이제 본사로 모시면 되겠습니까?”

“아뇨. 국민의회 의장도 한 번 찾아가봅시다.”

“브릿소(Jacques Pierre Brissot) 의장 말씀이시군요.”

“기왕 구워삶을 거 양쪽 다 삶아 봐야 혹시 모를 위험을 미리 방지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시트 깊숙이 몸을 기댔다.

자크 피에르 브릿소.

평원파의 거두 겸 현 국민의회 의장.

시에예스 사제님이 사제와 귀족 출신으로 대표되는 평원파 내 파벌의 수장이라면, 이쪽은 언론인과 작가 출신 파벌의 수장이다.

언론인 시절 친혁명파 사업가들에게 후원도 많이 받았다는 소리가 있으니 사업가들하고도 꽤 친한, 말 그대로 두루두루 친한 인싸.

예전부터 몇 번 일면식은 쌓았고, 마지막으로 본 건 미라보의 장례식 때였으니 근 몇 년 만에 보는 거네.

“하하하! 아니, 이거 귀한 손님이 오셨군요! 연초부터 이렇게 귀한 분들이 찾아오시니 올해는 제 운이 아주 좋겠습니다 그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나오는 살인마처럼 생긴 브릿소는, 인상과 달리 사람 좋은 얼굴로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자자, 그러지 말고 안으로 오시지요. 다른 손님들도 기다리고 있어서 말입니다. 허허.”

“이런, 다른 손님들이라니, 제가 시간을 잘못 찾아왔군요.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하하, 아닙니다. 총감께서도 몇몇은 알고 있는 얼굴일 겝니다. 전혀 실례가 아니니, 들어와서 차라도 한 잔 하고 가시지요.”

“그러면 염치 불구하고 잠시 신세 좀 지겠습니다.”

“하하, 잘 생각하셨습니다!”

브릿소는 내게 따라오라는 듯 고개를 까닥이더니 자신이 앞장서 응접실로 향했다.

“자아, 친애하는 친우들! 오늘 귀한 손님이 오셨습니다. 다들 함께 즐거운 시간 보내봅시다. 하하하!”

“안녕하십니까, 기욤 드 툴롱입니다. 염치 불구하고 잠시 동석해도 될···.”

“““······.”””

“뭐야 씨발. 당신들이 여기 왜 있어?”

내 눈을 피해 고개를 돌리는 트러스트 사장들을 배경으로, 브릿소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나와 저들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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