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기의 시대 (7)
19세기.
인류역사상 가장 밝게 타오르던 시대.
증기기관차로 대표되는 산업혁명이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른 후, 가히 수마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발명품과 위대한 발견이 그 뒤를 이어 사회를 눈 깜짝할 새에 발전시켰다.
기나긴 시간 동안 인류를 괴롭힌 식량난과 전염병이라는 악마들은 그간 인류가 매달린 신앙심이란 이름의 기적 대신, 충분히 발달한 과학이라는 마법과도 같은 신무기에 의해 박살났다.
어렸을 적 아버지 손을 잡고 마차에 오르던 소년은, 청년이 되어 약혼녀의 손을 잡고 기관차에 올랐으며, 장년이 되어서는 아이의 손을 잡고 강철로 만든 여객선에 올랐고, 노년이 되어선 비행기 조종사를 직업으로 삼은 손주의 손을 잡고 눈을 감았다.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넘고, 남미의 아마존를 넘어, 북극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번영하고 뻗어나가고 또 다시 번영했다.
인간이 쬐는 문명이라는 이름의 모닥불이 가장 밝게 타오르던 때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인간이 쬐는 그 영롱한 불꽃의 땔감으로 타들어 가는 것 또한 같은 인간이었으니.
19세기.
인류역사상 가장 어둡고 암울했던 시대.
먹고 살기 힘든 어느 부부가 경찰의 눈을 피해 다리 아래 내다 버린 아이는, 스스로 걷는 법을 깨우치자마자 솔과 물통을 가지고 굴뚝 청소를 시작했다.
하루 종일 매캐한 굴뚝 연기를 마시고, 얼굴에 숯검댕이를 묻히는 대가로 받는 삯은 동전 세 닢. 아침과 저녁을 먹으면 사라지는 돈.
그러나 시간이 흘러 아이가 소년이 되고, 더 이상 굴뚝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자, 그 세 닢 동전마저 벌지 못하게 되었다.
소년은 이제 방직기계 밑에 들어가 기계 밑에 떨어진 자투리 실을 모으는 일을 시작했다.
섬뜩한 톱날과 칼날이 쉴 새 없이 원단을 잘라내는 기계 밑, 이따금씩 소년의 옆에서 불행한 희생자가 생겨나기도 했지만.
운이 좋게도, 소년은 다른 친구들과 달리 손가락이나 손목을 잃지 않고 무사히 청년이 되었다.
이제 청년은 기계 밑에서 누워 일하는 대신 기계 앞에서 12시간을 일하고 줄에 매달려 자는 동전 한 닢짜리 숙소에서 밤을 보내는 삶을 살게 되었다.
언제까지?
그가 죽을 때까지.
그렇게 태어나서 한 시도 쉬지 않고 일만 한 그에게 주어진, 다듬지도 않은 싸디싼 나무 관에 그가 들어갈 때까지.
그는 땔감이었다.
총칼을 앞세워 사람이 사람을 핍박하는 게 당연시되는 시대.
크게는 인종과 인종, 작게는 사람과 사람 간에 우열이 존재하던 시대.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소모품 내지는 사람 언저리 취급을 하던 시대.
그런 시대는, 그를 땔감으로 화려하게 빛을 밝혔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서 그 모든 것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관조한다면 내가 대충 수능 공부하느라 머리에 때려 박은 대로 세상이 변하겠지.
개입한다면, 글쎄. 솔직히 잘 모르겠다.
원래라면 지금쯤 황제를 찍고 전쟁하고 다닐 나폴레옹이 지금도 상관에게 조인트를 까이고 있는 걸 생각해본다면 역사의 축이 엄청 뒤틀린 거 같은데, 여기서 내가 더 개입하면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알겠나.
혹시 몰라? 나중에 북괴 새끼들이 주체궁과 혁명렬사릉 앞에 마르크스, 김일성, 레닌에 이어서 내 얼굴을 걸어놓을지.
···그러고 보니 마르크스 그 인간도 1800년대 생이잖아?
수상할 정도로 독일어에 능숙한 털보가 우리 회사에 이력서를 넣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이거 가슴이 도키도키하구만.
여하튼 서론이 길었지만, 결국 지금 내 앞에 툭 떨어진 질문은 하나였다.
인간성을 버릴 것인가, 아니면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
뭐, 사실 답은 뻔했다.
“당신들 완전히 미쳤군.”
적어도 난 사람이 줄에 매달려 자는 꼴은 못 봐서 말이야.
***
뭔가 이상했다.
비서 놈과 신문,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내용에 따르면 기욤 드 툴롱이란 인간은 돈 벌기 좋아하고, 굉장히 진취적인 면모를 가진 사람 아니었나.
- 서로 혼자 알기 아까운 정보를 나누는 자리지요.
- 아. 예.
돈 벌기 좋아한다는 게 사실이라면 어째서 자신들이 초대한 이런 ‘귀중한 자리’를 즐기기는커녕 화장실에서 용변보다 끌려온 사람 마냥 불편해하는가.
그리고 진취적인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나?
- 당신들 완전히 미쳤군. 당신들 머리엔 상도덕이란 단어가 없습니까?
그게 사실이라면 도대체 왜 기업 간에 서로서로 상부상조하여 효율성을 올리자는 말에, 아직도 길드니 장인정신이니 운운하는 뒷방 꼰대 늙은이들마냥 군단 말인가.
도대체, 도대체 왜?
기욤을 데리고 온 중년 신사는 제 뜻대로 되어가지 않는 상황 때문인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말했다.
“각, 각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저희는 어디까지나 그, 친목을 다지고. 서로 상부상조하는··· 상도덕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상도덕을 지키셨다?”
“그렇습니다.”
“하, 참. 내가 어이가 없어 가지고.”
기욤은 얼굴을 기괴하게 일그러뜨리더니, 어느샌가 궐련을 꼬나물고 불을 붙이며 말했다.
“저기요. 내가 하나만 물어봅시다. 상도덕이란 단어의 정의가 뭡니까?”
“상인과 상인 간에, 그리고 상인과 소비자 간에 지켜야 할 예의지요?”
“···고용인은?”
“예? 아, 노, 노동자 말씀이십니까?”
“고용인한테는 뭐 지켜야 할 예의 같은 거 없습니까?”
고용인과 지켜야 할 예의라니. 이런 맙소사.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인가?
이제 신분제도 없어진 세상 아닌가.
제가 잘났으면 사업을 하든, 배를 타든, 무슨 방법을 써서 부자가 되었겠지.
그러지 않고 임금을 받는 임금 노동자를 업으로 삼아 계속한다? 이건 뭐, 자기가 능력이 없다는 뜻 아닌가.
오히려 능력 없는 놈들 입장에서는 자기들을 데려다가 월급 따박따박 챙겨주는 우리들에게 감사해야하지 않나?
“저흰 월급을 밀리지 않고 주는 것만 해도 할 도리는 다 한 것 같습니다만.”
“그렇습니다. 오히려 단순 노동 외엔 뭣도 할 줄 모르는 쓸모없는 놈들을 데려다가 살 방도를 내어주었으니, 도리를 넘어 선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에, 그러시군요.”
기욤은 그리 말하고 담배를 몇 모금 빨아들이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자신이 앉았던 의자를 높이 들었다.
“어, 어어. 왜! 왜 그러십니까?!”
“각, 각하!”
의자가 하늘을 날았다.
기욤을 데리고 온 중년 신사는 흔들리는 동공으로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지는 진풍경을 쳐다보았다.
“이 씨발!! 상도덕도 모르는 새끼들이!! 담합은 하고 지랄이야 지랄은!!”
“각, 각하! 고정, 고정하십쇼!”
“니들이 그렇게 신나게 팔아 재끼는 상품, 누가 살 거 같냐? 다 노동자들이 사는 거야 이 병신들아! 노동자들이 돈을 못 벌면 나중에는 니들이 파산하는 거라고!”
“그게 무슨 해괴한 소리···.”
“어딜 경제의 ㄱ도 모르는 놈들이 내가 만든 건실한 프랑스 배때지에 칼빵을 조져 놓으려고해!?”
기욤의 눈엔 어느샌가 눈동자 없이 흰자만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임금 문제는 어디까지나 효율적인 경영활동의 일환일 뿐입니다!”
“뭐? 효율적인 겨어어엉여어엉? 그게 경영이야?! 그게 경영이면 씨발, 내가 니들 기업 다 적대적 인수로 씹창내놔도 되겠네?
당신 방직업 한다고 했지? 어디 원자재 값 다섯 배 내고 받아 가볼래?!”
“그, 그게 무슨···.”
“왜? 댁들이 하면 로맨스고 내가 하면 불륜이야? 제대로 더럽게 기업 전쟁해봐?! 어딜 사람을 부품마냥 굴리려고 들어.”
기욤은 한 차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뱉으며 이어 말했다.
“후우, 나한테 제일 효율적인 게 뭔지 압니까?”
“““······.”””
“내가 다 하는 겁니다. 원자재도 내가 캐고, 가공도 내가 하고, 판매도 내가 하고.”
“···그게 됩니까?”
“왜 안되죠? 전 광산도 있고, 공장도 있고, 판매할 대리점도 넘치는데. 딱 까놓고 여기 계신 분들 사업 중에 제가 맘먹고 자본금 때려 박으면 못 들어갈 곳 있습니까?
처음엔 손해야 있겠죠. 경쟁인데. 그런데 제가 마지막까지 못 이길 거 같습니까?”
***
이 정도로 개판을 쳤으면 다들 알아들었겠지.
일단은 내가 담합을 굉장히 고깝게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쪽에서 당분간 임금 가지고 장난은 안 칠 거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
좆간, 아니. 인간의 종특 상 정의의 반독점법이 나와 ‘건전한 시장경제를 위협하는 회사들은 용서치 않아요.’를 외치며 저들의 뚝배기를 뚝스딱스 후두려까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무조건 수면으로 올라올 터.
한 번 봇물 터지듯 터져나가기 시작하면, 모든 게 쓸려나가기 전까지는 다시 주워 담기 쉽지 않다.
문제는 모든 걸 쓸어버리는 시발점이 바로 눈이 반쯤 맛이 간 채, 팔에 붉은 완장을 차고, 적기를 휘두르는 사람들이라는 거지.
그쯤 가면 진짜 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 내 바짓가랑이 잡는다 해도, 이전으로 못 돌아온다.
하,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혹시 묘안 없으십니까?”
“기욤 군, 그걸 왜 나한테 묻나?”
“아니 그래도 여당 대표라는 분이신데, 뭐 생각나는 수 없으세요?”
시에예스는 잠시 눈을 흘겨 뜨더니 파이프로 내 머리를 후려쳤다.
“아악! 아니, 이 양반이 미쳤나!? 갑자기 사람은 왜 때려요!”
“왜긴? 이 프랑스에서 제일 돈 굴러가는 세계를 잘 아는 놈이 한낱 사제한테 의견을 묻는 꼴이 어이가 없어서 그랬네.”
사제는 개뿔, 환속했으면서 무슨 사제타령이야.
“그 눈을 보니, 기분이 아주 고까운가보군?”
“안 그래도 머리 아픈데, 물리적으로도 아프니까 아아아주 고까워지네요.”
“허, 참. 어이가 없구만.”
“또 뭐가요.”
“자네가 얘기한 그 ‘반독점법’인지 뭔지. 난 들어도 잘 모르네. 그게 무슨 뜻인지 아나?”
“몰루겠는디요.”
시에예스는 다시 한 번 내 머리 위로 파이프를 휘둘렀지만, 이번에는 내 머리가 피하는 속도가 더 빨랐다.
“이 나라에서 자네가 하는 말,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은 손에 꼽을 거란 말이네.”
“그래서요?”
“하, 참. 자네 다시 정치판 들어오게. 예전에 재무총감 자리에 있을 땐 퍼뜩퍼뜩 알아듣더니만 이젠 말귀를 영 못 알아듣는군.”
아... 정치? 그건 좀.
“이 프랑스에서 자네 말고 그게 옳은지 그른지 따질 수 있는 통찰력을 가진 사람은 없으니, 자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그냥 밀어붙이게.”
아니면, 로베스피에르한테 가보던가.
시에예스는 그렇게 덧붙였다.
“아니. 그 양반은 또 왜요.”
“자네 정말 정치에 관심 없나? 소문도 안 듣고 사는 게야?”
“뭔 소문이요?”
“그 친구 지금 부업 삼아 소르본에서 경제를 가르치고 있네.”
“하하, 거짓말.”
내가 요새 자동차에만 빠져있었다고 너무 놀리신다 증말.
"내가 자네한테 그런 거짓말을 해서 어디다 써 먹겠나?"
시에예스는 그렇게 얘기하며 파이프에 담배를 채워넣었다.
···.
···진짜로?
"하하... 거짓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