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6화 증기의 시대 (4) (236/341)

증기의 시대 (4)

1804년, 동쪽에서 밝아오는 새해 첫 아침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각각 수많은 의미를 지닌 존재로 다가왔다.

“우편이요, 우편!”

“뭐야, 우편이 올 곳이 없는데? 어디서 온 거지. ···어디 보자, 프랑스 국제 철도주식회사? 아! 드디어 배당금이 나왔구만! 하하하!”

누군가가 미리 심어놨던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 열매를 맺었고.

“이게 뭐야? 이삭의 민족 새해 기념 첫 번째 카드 확장팩 발매?”

“뭐? 새 카드가 나온다고?!”

“이거 완전 돈에 미친 새끼들 아니야!”

“그러면 넌 안 사는 거지?”

“아니. 살 건데.”

“?”

“?”

누군가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을 누리고.

“···제가요?”

“예.”

“그러니까, 이 복잡한 기계를 제가 손봐야한다구요?”

“그래서 지금 사측에서 교육을 해드리잖습니까.”

“전 태어나서 말 기르는 거 말고는 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만.”

“에이 다들 처음엔 그렇게 말하다가도 막상 굴리면···. 아니, 적응되면 다들 일 잘만 하십니다.”

“전 글도 모르는데요?”

“에이 그렇게 말했던 사람들 이제는 다 스패너 들고 잘만 일해요. 그러면 3일 내로 철자 외우는 것부터 시작합시다.”

“···뎃.”

누군가는 익숙했던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형태를 배우고.

누군가는.

“듀퐁! 9번 증기 밸브 쪽! 다시 가서 조여봐라!”

“예! 갑니다!”

- 푸쉬이이익!

“듀퐁!”

“옙!”

- 까앙! 까앙! 까앙!

“듀퐁!”

“···예에.”

엘뢰테르 듀퐁은 옷소매로 얼굴을 슥- 한 번 닦았다.

새해, 창밖으로 눈도 간간히 내리는 겨울이었건만. 듀퐁과 스승님, 그리고 몇몇 기술진이 뛰어다니는 이 개발실은 기계가 뿜어내는 증기 때문에 후덥지근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땀이 이마를 타고 주륵주륵 흘러내리고, 텁텁한 석탄재가 거기에 붙어 이마에서 투명했던 땀은, 뺨 언저리에 갔을 땐 회색 비슷한 색이 되어있었다.

흰 셔츠 소매 또한 땀과 석탄 검댕이로 얼룩덜룩해졌지만, 듀퐁을 비롯한 사람들은 옷을 대충 팔 위까지 걷어 올리고 다시 스패너를 쥐었다.

어차피 완성 전까지는 계속 이리저리 구르며 더러워질 옷가지였으니까.

듀퐁은 조이던 나사를 마저 조이고는 조립이 잘 되고 있는지 시제품 옆 탁자에 놓아둔 설계도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어우 핑핑 도네. 돌아.”

조이고 닦고 기름칠하는 육체적 노동에 이어 복잡한 수식과 공식이 빼곡하게 적힌 종이 쪼가리를 해석하는 정신적 노동까지.

둘 중 하나만 하면 좀 좋으련만 일이 이렇게 되니 자신이 일용직 노동자인지, 아니면 화학 박사 학위를 지닌 인텔리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뭐, 9할은 넘게 끝났네.”

스승님과 함께 불태운 장장 5개월이란 시간이, 그동안 쏟아낸 노력이 드디어 만족할 만한 결과로 화(和)하기까지 몇 발자국 남지 않았다.

그러니 스승님도 이젠 자신이 직접 공구를 들고 올라가 부품을 조립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듀퐁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설계도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숙련공 한 명이 다가와 그를 불렀다.

“듀퐁 선생님, 10번 파이프 관련해서 여쭤볼게···.”

“······.”

“저어, 듀퐁 선생님?”

“큼큼.”

“···아 듀퐁 박사님. 실례했습니다.”

“10번 파이프면 저 정도 압력에 견디기 충분합니다. 나쁘게 생각했을 때도 오차범위 내구요. 그대로 조립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박사님. 아, 그리고 방금 본사에서 사람이 나왔는데···.”

“본사에서 사람이요?”

듀퐁은 ‘누구?’ 라고 묻고 싶었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본사에서 사람이 나왔으면 뻔하군요. 걔··· 가 아니라, 사장님은 언제 온답니까?”

“그게···,”

“캬, 이제 제법 뽀대가 나네 뽀대가 나.”

저 익숙한 목소리에, 개발실에 있는 기술진들은 모두 소리가 난 방향을 쳐다보았다.

단 한 사람만 빼고.

“아이고, 사장님! 어찌하여 이 누추한 곳까지 직접 행차하셨습니까!”

분명 방금 전까지 기계 위에 앉아 볼트와 너트를 조이던 중년 남자는, 눈 깜짝할 새에 내려와 사장의 손을 두 손으로 잡으며 말했다.

“일도 딱히 없고, 이제 내일이면 완성된다던데 그 전에 미리 한 번 보러 왔죠. 어떻게, 잘 돼가고 있는 겁니까 라부아지에 고문?”

“아이고, 그럼 당연하지요! 제가 누굽니까, 왕립 학술협회 회원이자, 전직 화약국 국장, 앙투안 라부아지에 아니겠습니까!

그런 제가 사장님께서 주신 돈, 아니. 기회를 허투루 쓸 리가 없지요!”

“하하, 고문님만 믿고 있습니다.”

그럼 어디 견적 좀 같이 짜볼까요. 그는 그렇게 덧붙였다.

***

자동차란 무엇인가. 바퀴 네 개를 달고 뛰뛰빵빵 엔진붕붕하고 달리는 인류의 역작이다.

우리 부대에 강연 왔었던 정훈장교가 말하길.

백두의 전법, 신묘한 전법을 터득하였으며, 땅마저 접어 달리는 혹부리 빨갱이마저도 평양에서 신의주까지 도망칠 때는 축지법이 아니라 자동차를 타고 빤스런을 했으니 이는 고증이다.

- 우우우웅.

“크으, 엔진 소리 죽이는데.”

“누가 만들었는데 당연하지!”

듀퐁은 그리 말하며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내밀었다.

“그래 그래 아주 장하다. 우쭈쭈. 까까도 하나 줄까?”

“그게 까까냐? 담배지?”

“허어, 엄연히 구름과자도 까까이거늘.”

우렁찬 소리와 함께 매연을 토해내는 엔진 옆에서, 나 또한 구름과자를 베어 물고 연기를 토해냈다.

“라부아지에 고문님, 이게 얼마까지 태울 수 있다구요?”

“300 킬로그램 짜리 포 예닐곱 문까지는 능히 옮길 수 있습니다.”

“나쁘지 않군요.”

대충 계산해보면 사람 이삼십 명은 충분히 옮기고도 남겠구만.

“속도는요?”

“최고 42km, 부품의 신뢰성을 생각한다면 30km까지는 부담 없이 주행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라부아지에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빈말이라도 감사합니다, 사장님.”

“빈말이 아닙니다.”

퀭해진 눈가, 푸석푸석해진 머리칼, 군데군데 석탄 검댕이가 묻어 세탁하기도 어려워진 옷가지들.

그걸 보노라면 라부아지에가 5개월 간 얼마나 열과 성을 다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포상금으로 보너스도 지급해드릴 테니 당분간 편히 쉬십쇼.”

“···감사합니다, 사장님.”

“야, 아니. 사장님. 저는요?”

“넌 젊잖아.”

“그런 게 어디 있어?! 나도 존나게 굴렀는데!”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야! 너랑 나랑 동갑이거든?”

코에서 김을 슉슉 뿜어내는 듀퐁을 뒤로하고, 나는 비서 한 명을 손짓으로 불러냈다.

“예, 사장님. 부르셨습니까.”

“개발팀한테는 전체 2주 휴가 및 보너스 주세요.”

“예, 사장님.”

“그리고 플로리앙 씨 비롯해서 이사진 소집해주세요.”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공돌이들을 신나게 갈아 제품을 만들었으니, 이제 문돌이들을 갈아봐야지.

***

1804년 초.

그르넬흐 가(街), 1번지에 위치한 이삭의 민족 본사엔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장장 수 년에 걸친 대형 프로젝트의 마지막 단추가 꿰어지냐, 마느냐.

회사가 앞으로도 꾸준하게 이윤을 뽑아낼 수 있는 캐쉬카우를 만들 수 있느냐, 마느냐.

그 모든 걸 결정할 판매 전략이 오늘 회의에서 결정될 터.

소집된 이사진, 그러니까 이삭의 민족에서 나름 짬밥 좀 먹고 실적 좀 쌓았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다들 긴장감을 느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끼이익.

왔구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이제 30을 갓 넘긴 젊은 사장이 몇몇 비서를 데리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아, 벌써 다 모였습니까? 이거 늦어서 미안합니다.”

젊은 사장은 고개를 살짝 숙여, 미안함을 표한 뒤에 회의실 가장 안쪽 의자에 턱하고 앉았다.

“자, 회의 시작합시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회의실 곳곳에서 손이 번쩍하고 올라간다.

“카드 때처럼 축제 비슷한 가두행진을 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파리 시내를 한 바퀴 돌면···.”

“글쎄. 그것 때문에 교통에 곤란함을 겪는 시민이 있다면 오히려 마이너스일텐데요.”

젊은 사장, 기욤은 이어 말했다.

“우리가 할 사업은 어디까지나 대중교통입니다. 고객님들께 우리가 어필해야 할 건 ‘편리한 이동수단’이지, 놀잇감이 아니란 말이죠.”

그리고 그걸 지원사격 해주듯, 부사장인 플로리앙이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사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자칫하다간 편리한 이동수단이 아니라, 교통을 방해하는 골칫거리로 첫인상이 남을 수도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뇨. 죄송할 필요 없습니다. 여기 여러분 모은 거? 아이디어 내놓으라고 모은 거지, 누구 조리돌림하려고 모은 거 아니니까 편하게 의견 내고, 편하게 반박하십쇼.”

우리 목표는 회사가 돈 버는 겁니다.

기욤이 덧붙였다.

“사장님, 그러면 이건 어떠십니까? 언론에 광고를 내서···.”

“아예 사람까지 풀어서 호의적인 여론을 조장하면···.”

“파리 광장 곳곳에서 시범 주행을 하면 관심을 충분히 끌어낼 수···.”

지난 20년 동안 기욤이 어떻게 물건을 팔아치우는지 지켜본 사람들, 거기에 기욤의 선포까지 더해지자 회의실은 삽시간에 시끄러워졌다.

그렇게 한 사람이 손을 들었다.

“사장님, 제가 며칠 전에 재밌는 기사를 하나 읽었는데 말입니다.”

“예? 기사요?”

“괴혈병 아십니까, 괴혈병?”

“선원들이 걸리는 병 아닙니까. 이와 잇몸 사이에서 피가 나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 병의 치료법이 나온 것 알고 계십니까?”

“그거 비타민 먹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렇습니다, 비··· 예? 사장님? 비, 비타민이 뭡니까?”

“아, 아. 말이 헛나왔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계속 말씀하십쇼.”

기욤이 그렇게 말하자, 예의 남자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큼큼, 괴혈병의 치료법은 바로 자우어크라우트. 그러니까 절인 양배추를 먹는 거라고 합니다.”

“에이, 양배추 먹는다고 병이 낫는단 말입니까?”

“그렇게 따지면 삼시세끼 채소랑 야채만 먹으면 병도 잘 안 걸리겠네?”

회의실 곳곳에서 반박이 나왔지만, 곧 사그라들었다.

기욤이 손을 들었으니 그 누가 말을 끊을 수 있겠는가.

“어, 음. 그 괴혈병 얘기 말입니다. 아마 나을 걸...요?”

“사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여하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여기 얽힌 이야기가 중요한 겁니다.”

“말씀해보시죠.”

“제임스 쿡이란 영국인이 선장으로 있던 배의 일입니다. 쿡 선장은 괴혈병을 예방하기 위해 양배추 절임을 선원들에게 보급했지만, 고기 대신 채소를 먹으라는 걸 선원들이 기껍게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쿡 선장은 그 모든 반대를 꺾고 선원들에게 양배추를 먹이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덧붙였다.

“선원들이 고까워한다면서 어떻게 성공했다는 겁니까?”

“쿡 선장이 양배추 절임을 간부들에게만 지급하기 시작하자, 불공평한 처우에 반발한 선원들이 자발적으로 양배추를 배급해달라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기욤은 잠시 생각하더니, 곧 손짓으로 비서실장을 불러냈다.

“페시옹 씨.”

“예, 사장님.”

“저 분한테 3개월 월급 치 보너스 지급해 드리세요.”

“예, 사장님.”

다음날, 파리 곳곳에는 희대의 진풍경이 펼쳐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