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기의 시대 (3)
기욤이 파리 북부 마차 대기소에 오기 수 시간 전. 새벽.
- 똑, 똑, 똑.
나무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 후, 굵은 목소리가 그 뒤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왔다.
“주인장 있소?”
“에이씨.”
파리 북부 마차 대기소 소장 안드레는 혀를 차며 탁자를 굽어보던 자세를 도로 폈다.
자신이 지금 얼마나 중대한 일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감히 이 귀중한 시간을 뺐을 수 있단 말인가.
지금 덱을 미리미리 짜 놔야!
이따가 있을 듀얼에서 어제 있었던 패배를 설욕할 수 있는데!
아직도 어제 듀얼에서 이긴 놈이 ‘어이쿠, 소장님은 아무래도 카드에 영 재능이 없으신가 봅니다.’라고 실실거리며 동전을 쓸어담는 모습을 생각하면 이가 북북 갈렸다.
딱 까놓고 말해서 그 자식이 이긴 게 어떻게 실력빨인가? 월급의 삼분지 일을 카드 뽑는데 쓰니 안드레 자신이 질 수 밖에 없었던 거다. 아무튼 카드빨인 것이다.
- 똑, 똑, 똑.
문 너머에서 안드레를 채근하는 소리에, 안드레는 탁자 위에 늘어놓았던 카드들을 대충 정리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바깥에 ‘영업은 오전 4시부터 시작합니다.’라고 대문짝만하게 붙여놨건만, 간간히 이렇게 몰상식한 군상들이 사무실로 쳐들어오는 경우가 있었다.
- 쿵, 쿵, 쿵.
“이보시오, 안에 주인장 있소?!”
“쯧쯧, 무식한 놈 같으니. 문짝 다 부서지겠다 이 놈아.”
밖에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높낮이로 구시렁댄 그는, 천천히 일어나 문을 조금 열고 그 사이로 말했다.
“거, 아직 영업준비 시간입니다. 두 시간 뒤에 찾아오쇼.”
“잠깐만 얘기 좀 합시···.”
“두 시간 뒤에 엽니다. 그럼 이만.”
안드레는 문틈 너머로 슬그머니 보이는 인영을 향해 그리 말하곤 서둘러 문을 닫았다.
턱.
“얘기 좀 합시다. 주인장.”
그러나 불청객은 안드레를 그냥 보내겠다는 생각이 없다는 듯, 닫으려는 문 사이에 기어코 발을 집어넣었다.
그리곤 완력으로 문을 활짝 열어버렸다.
“어, 어, 어!”
아니. 이게 말이 되나? 그래도 내가 힘 깨나 쓰는 마부 출신인데...
-라는 안드레의 생각은 눈앞에 있는 남자의 팔뚝을 보는 순간 사라지고 말았다.
“···군인이쇼?”
“대강 맞추셨소. 정확히는 ‘전직 군인’이지만.”
“아니, 군인이 여긴 무슨 일로...?”
“일단 안에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그가 앞으로 나와 사무실 안에서 나오는 램프의 불빛을 받자, 무시무시한 팔근육과 함께 허리춤에 찬 무언가가 번뜩였다.
저거 검이지? 응, 검이네. 검.
“물론이지요, 헤헤.”
“고맙소. 아주 배려가 넘치는 분이로군. 하하하!”
전직 군인, 현직은 뭘 하는지는 몰라도 검을 패용하고 다니는 남자는 호탕하게 웃으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흐음. 뭐 딱히 위험한 건 없어 보이는구만.”
사무실 안을 눈으로 슥 훑기 시작하는 그를 향해 안드레는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어,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선생님?”
“아. 별건 아니오. 이따 내가 모시는 분이 여길 방문할 수도 있어서 미리 답사차 와 본 거요.”
“모시는 분이요?”
“오, 이건 이삭의 민족에서 나온 카드요?”
안드레가 물었건만, 남자는 거기에 답해주기보다 탁자 위에 놓인 카드에 더 관심이 가는 모양이었다.
“예에, 그렇습니다만?”
“음! 아주 훌륭하오. 앞으로도 많이 사주길 바라오.”
“예?”
대관절 뭐하는 사람이길래 칼을 차고서 카드 쪼가리를 홍보한단 말인가. 안드레의 속에서 호기심이 샘솟았다.
남자는 그걸 눈치챈 듯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직사각형 모양의 자그마한 종이 쪼가리를 꺼내 안드레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명함인가?
“······이삭의 민족 민간경호회사 부장, 니콜라 우디노?”
그러면, 모시는 분이, 어. 음. 어.
명함을 쥔 안드레의 손이 벌벌 떨렸다.
“뭐, 꼭 오시는 건 아니니 그리 긴장할 필요 없소이다. 하하하!”
남자는 그런 안드레의 모습을 보곤 어깨를 팡팡 두들기며 재미를 느낀 듯, 특유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냈다.
물론 안드레는 전혀. 하나도. 재미를 느낄 수가 없었지만 말이다.
***
수 시간 후.
집에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입고, 새로 깔끔하게 면도까지 한 안드레는 초조한 마음으로 눈앞의 젊은 사내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게.
- 안녕하십니까, 소장님. 이삭의 민족 사장 기욤 드 툴롱입니다.
- 반, 반, 반갑습니다 각하! 소인은 자그마한 마차 대기소를 운영하고 있는 안드레라 하옵니다.
- 에헤이, 하옵니다라니요. 그렇게 말을 높이실 필요 없습니다.
- 그, 그래도 될런지요?
- 그럼요. 전 오늘 벼슬아치가 아니라 소장님과 똑같은 장사치로 찾아뵌 겁니다.
- ······장사치, 말씀이십니까?
- 예.
- 구체적으로 어떤...?
- 마차 대기소를 제게 넘기실 용의가 있으십니까? 가격은 섭섭잖게 드리겠습니다.
- 거절하겠습니다, 각하.
- 엣, 어째서?
증조부님께서 만드시고, 조부님과 아버지를 이어 자신에게 내려온 가업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마부와 직원들, 말들이 삶을 이어 나가는 터전이기도 하고.
아무리 안드레가 소장이고,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그 짧은 시간에 반사적으로 대답이 나온 것은 그런 점들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리라.
젠장. 그래도 그렇지. 조금 더 순하게 말할 걸! 안드레는 방금 전에 반사적으로 대답한 자신을 저주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
어라, 이상하다. 돈도 많이 쳐준다고 했는데.
설마 내 원대한 계획이, 이대로 좌초되는 건가? 데뎃, 소장 씨. 내 세레브한 꿈을 다시 돌려달란데스...
그런 내 속을 아는지, 내 뒤에 서 있던 우디노 부장은 남들이 들리지 않게 내 귀에 속삭였다.
“사장님, 혹시 잘 안되면 밀어버릴까요?”
“부장님, 지금 미치셨습니까?”
“죄송합니다, 영국에서는 그런 식으로 인수하던데 혹여 사장님께도 도움이 될까 해서...”
이상하네, 난 민간군사기업을 만들었지 용역 깡패를 만든 기억은 없는데.
세 살 배기 애들을 굴뚝 청소시킨답시고 밀어 넣는 영국에 몇 달 박혀있었더니 사람이 이상해진 게 분명하다.
마르세유나 툴롱에 휴가 보내서 따땃한 지중해 햇빛 좀 받게 해야겠어.
나는 손을 휘휘 저어 우디노 부장을 뒤로 물리고 턱을 쓸어내렸다.
“소장님.”
“예? 아, 예! 각하. 말씀하십시오.”
“소장님께서 팔지 않으신다고 제가 어떤 위해를 끼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어떤 까닭 때문에 그런 판단을 내리신 건지 알 수 있겠습니까?”
“으음.”
소장은 내 말을 듣고 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증조부께서 일구신 가업이고 아버지께서 제게 맡기신 가업입니다. 아무리 만금을 주신다고 해도···.”
“그리고요?”
“······여기서 일하는 마부들, 사환들, 그리고 말들에 이르기까지 제 피붙이처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 사람들을 제 손에 맡기는 게 우려스러우시군요.”
“송구합니다.”
아니, 뭐. 그럴 수도 있지. 나도 누가 와서 내 가게 인수하겠다고 하면 못 할 거 같아.
“큼큼, 사장님?”
“쓰으으읍.”
“죄송합니다.”
빨리 페시옹 씨한테 말해서 우디노 부장 휴가를 보내줘야겠다. 영국, 미국이랑 프랑스를 오고 가는 선상 생활이 힘들었나 사람이 아주 머릿속에 악만 가득 찼네.
후우. 그나저나 이 사람을 어떻게 설득을 해봐야 하나.
돈만 좇는 사람이라면 두둑하게 주머니만 채워주면 되겠지만 이 사람은 그런 쪽은 아닌 것 같은데.
그보단 사업을 자기 몸의 일부로 생각하는 사람 쪽에 가깝지.
결국 도박수말고는 없나?
“소장님.”
“예, 각하.”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근시일 내에 파리에서 마차 대기소를 모두 몰아내버릴 겁니다.”
“······예?”
갑작스러운 내 말에 소장의 얼굴이 멍해졌다.
“이번에 저희 회사에서 증기로 작동하는 마차, 아. 말이 끌지 않으니 자동차라고 해야겠군요. 아무튼, 자동차를 만들어 냈습니다.
말처럼 귀찮게 관리를 해 줄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오물을 싸지도 않지요. 길들일 필요도 없고, 사람 말을 잘 안 듣는 경우도 없습니다.”
전 그 자동차로 이 파리를 꽉 채우고 싶습니다.
소장의 얼굴이 굳는다.
“······그 자동차라는 것. 속도는 어느 정도나 나옵니까?”
“지금은 20km 정도 나옵니다.”
“하! 고작 20km 라니. 각하, 말은 60km까지 거뜬하게 뜁니다만. 그 기계 덩어리는 아직 말을 몰아내기 힘들어 보이는군요.”
“뭐, 지금이야 그렇겠죠.”
나는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리곤 고개를 돌려 듀퐁을 쳐다보았다.
“듀퐁 박사, 속도를 평균 40km 까지 올리는데 시간은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어, 그래도 한 수 개월은 걸리지 않을까···, 요?”
“60km는?”
“내구성이 문젠데, 그걸 제외한다면 10년 내에는 가능할 걸···, 요.”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소장을 돌아보았다.
“들으셨습니까? 10년이라네요. 자, 말은 10년 뒤에 80km를 뛸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종자를 개량하고, 새로운 품종마를 만들어낸다 한들 가능하겠냐는 말입니다.
하지만 기계는 가능합니다. 앞으로 30년이 지나면 시속 100km를 능히 주파할 수도 있을지 모르고, 100년이 지난다면 시속 300km를 넘을지도 모르지요.”
“······.”
“소장님, 이제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증기의 시대가, 기계의 시대가 이제 막 용틀임을 시작한단 말입니다.
그것은 곧, 마소 따위가 인류의 동력원이 되는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것 이구요.”
“지금 제게 선전포고하시는 겁니까?”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들켰네. 하지만 들어보세요.”
“듣긴 뭘 듣습니까!”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지만, 사람은 여전히 필요하지요.
소장님께는 마부가 필요하지만 전 대신에 운전사가, 조련사 대신에 정비공이 필요합니다.”
제안을 하나 드리죠. 나는 덧붙였다.
“기존의 인력을 감축하지 않고 재교육해드리겠습니다. 소장님도 현재 직책 그대로 고용해드리겠습니다. 자동차를 마차 대신 써주십시오.”
“싫다면 어찌하시렵니까?”
“소장님 측 말고 다른 마차 대기소를 인수하려고 하겠지요. 이 파리에 마차 대기소가 소장님 소유만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
안드레는 잠시 눈을 감았다.
왜 하필 안드레와 자신의 사업체인가.
과연 이 젊은이가 말하는 대로 따라야 하는가? 아니면 거절해야 하는가?
관대하다면 관대하다.
그의 말대로 따른다면 적어도 안드레와 안드레가 고용한 사람들은 그 바뀐다는 시대에 편승할 수 있을 것이다.
잔인하다면 잔인하다.
그의 말대로 따른다면 적어도 안드레와 안드레가 고용한 사람들은 더 이상 능동적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그르넬흐 거리에 있는 이삭의 민족 본사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대로 움직여야 할 것이다.
안드레는 탁자를 톡톡하고 천천히 두드리며 생각했다.
삶과 자존심, 중한 것은 매한가지나 그중 하나를 고르라면 고를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도장을 가져오겠습니다, 각하.”
“잘 생각하셨습니다. 소장님.”
안드레는 계약서에 찍은 도장을 제 서랍에 다시 집어넣으며 말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각하.”
“말씀하시지요.”
“생각해보면 각하께선 막대한 부를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각하 입장에선 그냥 새로 자동차 대기소를 만드는 게 더 싸게 먹히지 않습니까?”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런데 왜 이렇게 번거로운 방법을 사용하시는지요?”
“뭐어, 제 가치관 때문이라고 합시다.”
“가치관, 말씀이십니까?”
“열심히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삶은 존귀하다. 그리고.”
나는 계약서를 봉투에 넣으며 말했다.
“버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일단 다 같이 사람답게 살자. 그게 제 신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