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기의 시대 (2)
- 찌르릉. 찌르릉.
“으음.”
자명종이 제 몸을 비틀자, 한참 사람들이 일할 환한 대낮에 때아닌 알람 소리가 방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 찌르릉. 찌르릉.
“이런 젠장, 이러다 돌아버리겠구만. 듀퐁! 듀퐁! 어디 있느냐! 어서 이것 좀 꺼···. 아, 지금 없지.”
라부아지에는 길게 한숨을 토해내곤, 방금 전까지 상처 입은 늙은 과학자를 따듯하게 감싸주던 담요를 발로 밀어냈다.
- 찌르릉. 찌르릉.
“간다고, 가.”
구두 대신 슬리퍼를 대충 신고선 손으로 자명종을 두들겨 침묵시킨 라부아지에는, 초등학생들에게 괴롭힘 당하는 공벌레마냥 다시 꿈틀거리며 침대 안으로 들어갔다.
포근하다.
그래. 날개에 상처를 입고 세상에게 버려진 자신을 따듯하게 안아주는 건 이 꽃무늬 이불뿐이다.
“흑, 흐윽.”
문득,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불과 십 년 전만 해도 각계 각층에서 물밀듯이 들어오는 후원금을 자기 마음대로 쓰면서 하고 싶은 연구 모두 할 수 있었던 게 바로 자신, 앙투안 라부아지에였는데.
이제는 꽃무늬 이불을 하나 뿐인 벗 삼아 방구석에서 짜증만 내는 삶이라니.
“아! 온 세상을 주름잡던 천재 앙투안 라부아지에의 삶이 이렇다니! 오오, 날 이 골방에 박은 세상아 너는 후대에 저주받으리다!”
“그거 지금 저 들으라고 하는 말입니까?”
“엣?”
“말이 나오길래 찾아와 봤더니 아주 지지리 궁상이시군요.”
라부아지에는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쓴 이불을 서둘러 걷어내고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보십니까? 어서 의자나 가지고 오십쇼. 할 얘기가 많으니까.”
***
“꺼흐흑, 흐흑! 전 믿었단 말입니다! 비록 각하와 제가 어떻게 보면 가치관은 다르더라도, 같은 이상향을 좇고 있다고 생각했단 말입니다!”
“예에, 그르시군요.”
“자랑스러운 우리 프랑스인들이 세계 최초와 최고를 달리면서 무궁한 영광을 누릴 거라고 생각했단 말입니다!”
“와. 진짜요. 어머나. 너무 아쉬워라.”
응 아니야. 그딴 의미 없는 타이틀보다 돈 한 푼이 더 소중해.
딱 까놓고 말해서, 프랑스인이 만들던 영국인이 만들던 어차피 우리 회사가 총대 멘 건데 뭔 상관이야.
누가 됐던 질질 끌리면서 돈만 퍼먹는 거보다 훨 낫지.
하지만 이걸 그대로 눈물 콧물 다 짜내고 있는 심신미약자 라부아지에에게 말했다간 그 자리에서 결투 신청을 받을 지도 모른다. 고이 마음에 묻어놓자.
나는 라부아지에에게 중지를 치켜드는 대신 그의 등을 어미새의 마음을 담아 토닥여주었다.
“아이고. 많이. 힘드셨겠어요.”
“크흡, 큽!”
올해로 56살이 됐다더니 이 아저씨 갱년기가 왔나? 왜 이렇게 눈물이 많아.
이게 내 사무실에 쳐들어와서 땡전 한 푼까지 다 뜯어가려고 하던 악독한 세금징수관 라부아지에가 맞냐? 진짜 라부아지에는 전설이다.
“라부아지에 씨.”
“예, 예에.”
“이제 그만 눈물은 닦고 우리 미래를 얘기해봅시다. 미래.”
“미, 미래 말씀이십니까?”
라부아지에는 내가 건네준 손수건으로 코를 팽 풀며 말했다.
쓰읍, 나중에 세탁비는 꼭 받아내야지.
“듀퐁이 오늘 본사에 찾아온 건 아시겠죠.”
“듀퐁이, 말입니까?”
“예, 라부아지에 씨의 정열적인 모습이 없어졌다더군요.”
“···뭐라 반박할 수가 없군요. 사실이니.”
그는 길게 장탄식을 하고선 입을 열었다.
“수 년간, 말 그대로 수 년간 노력했던 게 그대로 허공으로 사라졌으니 어떻게 휑한 가슴을 달래겠습니까.”
“무슨 소리십니까. 노력이 허공으로 사라졌다니요?”
“예?”
무슨 소리냐고 되묻는 듯한 라부아지에의 모습에, 나는 궐련 한 개비를 입에 꼬나물며 말했다.
“그게 왜 허공으로 사라졌단 말입니까. 듀퐁 그 녀석이 버젓이 타고 다니는 그 증기 마차가 버젓이 있고, 라부아지에 당신이 만든 설계도도 그대로 남아있는데요.”
“하지만 세계 최초라는 명예가 없지 않습니까.”
“뭐어 그렇다고 칩시다.”
입에 문 연초를 한 모금 깊게 빨아들인 후, 나는 프랑스인 특유의 빵빵레후한 자존심을 가진 이 갱년기 아저씨를 구워 삶기 위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기관차는 어디까지나 ‘선로’를 통해 움직이는 수동적인 운송수단 아니겠습니까.”
“···예?”
“제가 뭐 과학이나 기술에 관해 대단한 지식이 있는 건 아니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직까지 기관차라는 건 수동적인 운송수단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까놓고 말해서 선로가 없으면 제 힘으로 움직일 수조차도 없으니.”
물론 10년, 20년을 넘어 전국에 철도망이 깔리고 나면 그 한계를 넘을 수 있겠지만 아직은 아니지 않은가.
“비록 세계 최초로 증기기관을 통해 움직인다는 타이틀은 없지만, 세계 최초로 운전자가 능동적으로 조종할 수 있는 운송수단이란 타이틀은 남아 있지 않습니까.”
“각하, 그 말씀은 지금?”
“통 크게 10장 쓰지요. 사람을 뽑으시던 아니면 원하는 원자재를 사시던 라부아지에 고문이 원하는 대로 사용하세요.
전 몇 가지 커트라인을 제시하는 것 외엔 그 무엇도 상관 안할테니.”
그 말을 들은 라부아지에의 얼굴에 순식간에 피가 돌면서 밝아졌다.
크게 10장이라. 기욤이나 되는 사람에게 한 장의 의미는 얼마 정도 될까.
적어도 장 당 1만 리브르는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10만 리브르?
옛날 라부아지에가 잘나가던 시절 실험한답시고 태워 먹은 주먹 만한 다이아몬드 값이 4만 리브르 였으니 10만 리브르면 무려 다이아몬드 2.5개를 태워 먹을 돈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입꼬리가 씰룩거리며 절로 올라갔다.
다만 한 가지 그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으니.
기욤이 말한 커트라인이란 무엇인가.
라부아지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각하. 커트라인이라고 말씀하심은?”
“20, 20, 20.”
기욤은 다 태운 궐련을 재떨이에 비벼 끄면서 덧붙였다.
“시속 20km 이상, 탑승객 20명 이상, 개발 기간 20주 이하. 이 정도만 지켜주시면 됩니다.”
“구체적으로 무엇 때문인지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쉽습니다. 우린 지금 마차가 지배하는 교통 시장을 잡아먹을 겁니다.”
“예?”
···지금 뭘 잡아먹는다고?
라부아지에가 고개를 갸웃하던 말던, 기욤은 태연한 얼굴로 담배를 한 대 더 꼬나물 뿐이었다.
“고문님, 이 세상에서 마차를 이용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뭐어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이용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렇죠! 아주 좋은 답변입니다. 군더더기 없네요.”
기욤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성냥을 켰다.
“거시(巨視)적으로 봤을 때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글쎄요.”
“자그마치 수 백만, 아니. 수 천만을 넘어가는 소비자가 유치된 시장이라는 겁니다.”
칙-하는 소리와 함께 피어난 불꽃이 긴 담배 끝을 태우기 시작했다.
“매일 같이 마부들의 손을 오고 가는 금화 수만 개.”
욕심 없이 딱 30퍼센트만 먹어봅시다. 기욤이 덧붙였다.
***
“어이 기사 양반, 출발.”
“내가 왜 기사야! 난 엄연히 과학자라고 과학자!”
“고용인이··· 말대꾸?”
듀퐁은 일그러진 얼굴로 차에 시동을 걸었다.
뭔가 욕 비스무리한 단어가 엔진 소리에 묻힌 거 같지만 착한 71년생 중에 그런 상스러운 소리를 입 밖으로 내는 사람이 있을 리가.
“시발. 내가 마차나 몰려고 박사 학위를 딴 게 아닌데.”
“야야, 그만 중얼거리고 파리 북부 마차 대기소로 가자.”
“거긴 또 왜?”
“왜긴. 곧 그 양반들 밥그릇 뺏을 건데 미리 개평이라도 줘야 안 달려들지.”
듀퐁은 정면을 주시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개평? 좀 알아듣게 설명해봐.”
“너 우리가 자동차로 대중교통 사업을 시작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 거 같냐?”
“뭐어, 시민들은 좋아할 거 같은데.”
핸들을 꺾자 자동차가 덜컹거리며 커브길을 지났다.
“속도가 느린 것도 아니고, 제시간에 딱딱 도착하잖아.”
“게다가 싸지.”
“그렇지.”
“그러면 시민들 입장에서는 굳이 마차를 타고 다닐 이유가 없네?”
기욤은 턱을 괴고는 계속 떠들었다.
“이야 손님들이 뚝 끊긴 마차 대기소라, 어떻게 될지 정말 궁금한걸?”
“···망하나?”
“원래 새로운 문물은 필연적으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법. 당장은 안 망할 거야. 한 10년은 가려나.”
“그 말은 10년 뒤엔 죄 망할 거란 소리로 들리는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되는 법이지. 뭐, 그렇다 해도 다는 안 망해. 어디까지나 대중교통이니까.
돈 깨나 있어서 남들하고 같이 타는 게 싫다거나, 급히 가야할 곳이 있어서 다른 정거장을 못 들르겠다던가 그런 사람들은 여전히 마차 대기소를 이용하지 않겠어?”
“와아, 넌 죽어서 천국은 못 가겠다 야.”
“뭔 소리야? 나 정도면 예수님 옆자리는 프리패스지! 내가 지금 왜 그 말똥 냄새나는 곳을 가려고 하는 건데.”
“···확인사살?”
“···너 대체 날 뭘로 보는 거야?”
“글쎄?”
듀퐁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툭 내뱉었다.
“딱 까놓고 말해도 돼?”
“언젠 내 눈치 봤다는 것처럼 말하네.”
“그도 그렇네. 으음. 뭐라고 해야 하나? 인간과 비슷한 무언가? 자본주의의 화신? 어, 그리고 또···.”
“······아쉽네.”
“뭐가?”
뭐긴, 운전만 안 하고 있으면 뒤통수에 한 대 먹여주는 건데.
“···뭐, 아무튼지 간에 네가 아까 말한 개평이 구체적으로 뭐냐니까?”
“왜 갑자기 말을 돌려? 더 얘기하세요. 해보시라구요.”
“너 말투에 가시가 박혀있다? 너 설마 삐졌냐?”
“아, 그러게. 나 삐졌나 봐. 갑자기 누가 쓰는 연구지원비를 팍팍 깎아버리고 싶네.”
“와아... 이런 쫌생이가 1천명을 먹여 살리는 거대 기업의 총수라니.”
“진짜 깎아줘?”
“아유 사장님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충성충성!”
“야! 야! 운전 중에 옆을 왜 봐! 앞 봐! 앞!”
징그럽게 날 향해 얼굴을 내밀던 듀퐁이 다시 앞을 보자, 기우뚱했던 자동차가 다시 안정을 찾았다.
“그래서 그 개평이 뭔데.”
“뭐어, 이런 거지. 안녕하십니까, 기욤입니다. 저희가 자동차라는 걸 개발했는데요. 혹시 말똥 냄새나는 마굿간은 밀어버리고 주차장 만들 생각 있으신가요?”
“개평은 지랄. 그게 전쟁하자는 선전포고지 무슨 개평이야!”
“전쟁이라니? 그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는 동앗줄을 내려주는 거야. 간판만 바꿔달고 고대로 운영하는 건데 그게 무슨 전쟁이냐?”
“으음.”
“천장이 뭐야, 저 멀리 달까지 떡상 예정인 물건을 저점 중의 저점에 팔아주는 거라니까? 이게 바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지.”
“아, 알았어. 알았다고. 그런데 대체 그 이상한 속담은 어디서 주워듣는 거야? 누이가 좋으면 매부가 왜 좋은데.”
“그런 게 있다 아우야.”
암. 어디까지나 서로 돕고 사는 거라구.
저 사람들은 일자리를 안 잃어서 좋고, 나는 겸사겸사 인프라를 꿀꺽해서 좋고.
음후헤헤.
***
마차 대기소 소장은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천천히 가로 지으며 말했다.
“거절하겠습니다. 각하.”
“엣, 어째서?”
왜? 와이? 뽀르께? 도시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