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기의 시대 (1)
“오라이! 오라이! 어디 보자, 좋아! 그 각대로 내려! 힘 빼지 말고! 사람 다친다.”
““흐으읍!””
쿠웅!
커다란 나무 상자가 속속들이 뭍에 이르러 육중한 소리와 함께 잠을 깨우는 르 아브르 항.
프랑스의 북부인 일드 프랑스로 향하는 무역량의 반을 칼레 항과 나눠먹는 거대 무역항답게 르 아브르 항은 오늘도 아침 일찍 부산스럽기 그지없었다.
“좋아, 좋아. 아주 좋아. 물건 상태 확실하구만.”
방금 내린 나무상자 뚜껑을 슬쩍 들어 안에 든 물건을 확인한 항해사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대체 이 안에 든 게 뭐길래, 이렇게 조그마한 상자 주제에 팔이 덜덜 떨리게 무겁습니까?”
“아, 말 안 해 줬나? 강철 주괴야, 주괴. 이삭의 민족에서 주문한거.”
“어쩐지 썅, 드럽게 무겁더라. 아, 항해사님, 우리가 이걸 또 파리까지 옮기는 건 아니겠죠?”
“뭘 그런 걱정을 하고 그래? 저기 저거 안 보여?”
항해사는 무슨 말을 하냐는 듯, 펜을 빙빙 손으로 돌리면서, 수차례 무거운 짐을 옮기느라 녹초가 된 선원을 향해 말했다.
- 치이이익! 칙!
고압증기가 내는 특유의 소리가 하늘을 향해 뿜어져 나오고, 매캐한 매연이 덩달아 춤을 추며 하늘로 올라갔다.
“우린 저거 타고 가서 한 번만 더 내려주면 돼.”
“젠장, 결국 또 옮기긴 하는 거잖습니까.”
“그러면 저거 타지 말고 직접 짊어지고 가든가. 툴툴 대지 말고 어서 타기나 해라. 듣자하니 저 남부에 툴롱, 마르세유 쪽은 아직 철도가 뚫리지 않아서 옛날처럼 직접 옮긴다던데. 꼬우면 거기로 가서 일하던가.”
“아. 그건 좀.”
옛날이었으면 진짜로 등에 짊어지고 걸어갔는데, 저렇게 배부른 소리라니. 항해사는 요즘 것들을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
점심까지 먹은 늦은 오후.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오냐.”
“저, 선생님. 올 때 뭐라도 사올까요? 요 앞에 새로 생긴 케이크 가게가 평이 좋던데...”
“됐다. 생각 없다.”
“옙.”
이런, 완강하신 것도 정도가 있지. 아주 쇳덩어리 저리 가라다.
하루 종일 실험실에 쪼그려 앉아 한숨만 푹푹 내쉬는 선생님이 달달한 거라도 한 입 먹고 기분을 푸셨으면 했는데.
뭐 어쩔 수 있나. 본인이 저리 싫어하는데. 아쉽게 된 거지.
엘뢰테르 이레네 듀퐁은 요 근래 팍 삭아버린 스승을 뒤로 한 채 문을 나섰다.
거리로 나가자 봄바람이 코를 간질인다. 벌써 달력에 써진 글자가 5월이었던가.
듀퐁은 이제는 익숙해진 라부아지에 증기-자동마차 1호에 올라탄 뒤, 꽃삽으로 석탄을 한 움큼 퍼서 엔진의 연소실에 던져 넣었다.
- 푸쉬이익! 푸쉬익!
연소실에 던져 넣은 석탄이 불을 만나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자, 차갑게 식어있던 기관부의 물이 펄펄 끓으며 증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 덜그럭, 부르릉!
엔진 특유의 구동음이 기관 밖까지 크게 들려오자, 듀퐁은 그대로 핸들을 꺾어 도로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
“이러다가 얼굴도 다 잊어버리겠네. 맨 날 실험실에 처박혀만 있지 말고 본사에 얼굴도 좀 비춰 임마.”
“나도 그러고 싶은데, 내 고용주가 웬만한 악덕사장 뺨치는 인간이라 도통 시간이 안 나네.”
듀퐁 이 노오옴. 내가 성과급도 두둑하게 챙겨주고 탕비실에서 커피도 공짜로 타 먹게 해주었건만.
역시 선현들의 말은 틀린 게 없다.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랬는데. 오오 통재라.
“성과급이 두둑하긴 개뿔. 일주일에 100시간씩 일하는데 그것도 안주면 ‘바스티유’ 당해야지.”
“흑흑, 10년 전에는 공부나 하는 순박한 녀석이었는데 어쩌다가 이런 속물이 돼버렸는지.”
“누구긴 누구야 너 때문이지.”
판교나 동탄에서 심심치 않게 보던, 일에 찌든 현대인의 얼굴을 한 듀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너 시발. 나한테 처음 일 시켰을 때 너랑 내가 몇 살이었는지 아냐?”
“모르겠는데?”
“16살이다 이 미친 새끼야. 그 때부터 지금 29살이 될 때까지 13년을 굴렀는데 이 사장이란 놈은 창립멤버라고 챙겨주기는커녕 증기기관을 만들라고 엉덩이를 존나게 걷어차시질 않나···.”
우웅. 우리 듀퐁이 많이 속상했구나. 그렇지만 나 아니었으면 단두대에 섰을 텐데 그렇게 따지면 머리 대신에 몸이 좀 갈려나가는 건 괜찮지 않을까?
“네가 우리한테 떠맡긴 일이 어디 한두 가지냐?”
“듀퐁.”
“갑자기 무슨 강철을 뽑아내겠다면서 안 그래도 부족한 인력을 뜯어가질 않나, 뭐, 네 말마따나 잘 풀리긴 했지만... 아무튼! 이번에는 기관차를 만들겠다면서 야근시키고!”
“듀퐁.”
“왜.”
“그 정도로 사람이 부족하냐?”
“그러면 니가 싹 다 차출해서 뭐 한답시고, 또 뭐 한답시고 데려갔는데 화학 연구부서 사람이 안 부족하겠냐? 까놓고 말해서 나랑 스승님 말고 사람이 고정적으로 연구에 매진할 사람이 읎어요 임마.”
으음.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군. 반박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사람이 필요하다?”
“당연하지! 드디어 알아주는구나?!”
“하지만 여태까지 라부아지에 그 양반이랑 너 둘로 잘 굴러갔는걸. 굳이··· 필요할까?”
그 뭐냐, 자본가와 기업가로서 원가절감과 인건비 절약이란 단어는 무안단물 같은 존재다.
물론 그렇다고 열 사람 몫을 세 사람이 하게 만든다거나, 급여도 안주고 야근과 특근을 강제로 시킨다거나 하는 헬반도 김치냄새 나는 짓을 하는 건 아니고.
뭐랄까, 미네랄 한 덩이에 더도 덜도 말고 SCV 세 마리 붙이는 거라고 해야 하나.
두 사람이 이미 능히 어마무시한 효율을 뽑아내고 있는데 거기에 사람을 더 넣어봤자 효율이 극대화되지는 않을 거 같단 말이지.
“그러니까 일단 손에 든 재떨이 좀 내려놓으면 안 될까? 왜 담배도 안 피는 네가 그걸 만지작만지작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내가 기계를 요새 만지다 보니 느낀 건데, 기계라는 게 세게 몇 번 치면 고쳐지는 일이 있더라고. 마찬가지로 네 입에서 헛소리가 더 안 나오게 하려면 이걸로 한 번 세게 후려쳐야하지 않을까?”
듀퐁은 그렇게 말하면서 내 눈을 흘겨보았다.
어우 소름 돋아, 군바리도 아니고 공돌이 자식이 살기를 어떻게 이렇게까지 내뿜는담.
마침 직업도 화학자겠다. 만약 얘가 프랑스가 아니라 송나라 사천 땅에 태어났다면 능히 독공으로 무림을 제패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스승님 말이다.”
듀퐁은 재떨이를 다시 탁자에 얌전하게 올려놓으며 운을 뗐다.
“···스승님? 라부아지에 말하는 거냐?”
“그래. 딱 까놓고 말해서, 스승님 지금 상태가 영 아니올시다야.”
“뭐 어떻길래?”
질량 보존의 법칙에 따라 온갖 욕을 다 들어먹으면서 파리로 통하는 모든 문에서 세금을 걷던 양반이
“반 쯤 미치셨다고 해야 하나.”
“···왜?”
내가 허공에서 토끼라도 내놓으라고 했나. 갑자기 그 인간이 미치긴 왜 미쳐.
“프라이드지 뭐.”
“프라이드라?”
“스승님이 어디 보통 사람이냐? ‘아, 탄소는 불에 탈까? 히히! 탄소가 불에 타는 걸 보고 싶다!’라면서 자그마치 몇 만 리브르짜리 다이아몬드를 홀라당 태워먹은 사람 아니냐.”
“그렇지.”
“그런 사람이 역사상 최초로 증기기관으로 작동하는 운송수단이란 타이틀을 빼앗겼으니 얼마나 속에서 열불이 나겠냐? 제 2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되어 영원토록 역사책에서 살아 숨 쉴 기회가 눈앞에서 날아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메어질걸.”
“지금도 충분히··· 역사책 어드메에선 나올 것 같은데.”
“다르게 말해주지.”
역사책 귀퉁이에서, 당당하게 한 장 전체를 차지할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갔다고 생각해. 듀퐁은 그렇게 덧붙이며 손을 허공을 향해 붕붕 휘둘렀다.
“난 니가 이해가 안가. 대체 왜 그 트레비식인지 머독인지 하는 영국인들한테 역사상 최초라는 어마어마한 업적을 넘겨준 거야? 너 프랑스인이잖아!”
“그게 그렇게 중요하냐?”
“당연히 중요하지! 왜 같은 프랑스인이 아니라 외국인! 그것도 하필이면 섬나라 해적 놈들한테 공적을 주느냐고!”
“참나. 업적이고 역사책이고 나발이고 그게 밥을 먹여 주냐, 아니면 직원들 월급을 대신 주냐?”
“···너 진짜 프랑스인 맞냐? 유대인 아냐?”
듀퐁은 이어 말했다.
“아무튼 그래. 사람은 없지, 그나마 있는 사람은 뭐 개발한답시고 본사에서 빼가지. 역사책에 남길 업적 하나만 보고 뭐 빠지게 달렸는데. 상심이 크신 가봐.”
아. 번아웃이 제대로 왔구만? 근데 그걸 왜 나한테 말하냐. 겨우 사람 좀 더 달라고? 그건 아닌 거 같은데.
“그래서. 그토록 장황하게 밑밥을 깔아놓으신 우리 엘뢰테르 듀퐁님께서는 내게 뭘 원하는 거지?”
듀퐁은 내 말에 큼큼-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증기자동차에 투자 좀 해줘라.”
“얼마나.”
“얼마나?”
“구체적으로 얘기해봐.”
“아니! 돈도 많으면서! 영국인들한테는 거의 몇 년 동안 퍼줬으면서! 왜 나랑 스승님한테는 이렇게 인색한 건데?!”
“꼬와? 꼬우면 왕립 아카데미 가서 국비지원금으로 만들어.”
싫지? 쥐꼬리만한 왕립 아카데미 지원금 가지고 뭘 하겠어.
“너. 진짜 이러기야?”
“아니, 지원해주겠다니까? 딱 얼마만큼 해주면 되겠냐고.”
“···5만 리브르?”
“이야, 어쩐지 말을 안 하더라. 드럽게 비싸네.”
“아니, 아니! 내 말 좀 더 들어봐! 딱 더도 덜도 말고 5만 리브르만 주면 내가 3개월 안에 완성품을 가져다 줄 게!”
“니가 타고 온게 완성품 아니냐?”
“저게 무슨 완성품이야! 저건 그냥 뼈대라니까? 뼈대! 딱 봐도 난 프로토타입입니다-라고 생겼잖아.
아이고 기욤 사장님, 겨우 1만 리브르 가지고 이리 굴러 저리 굴러 저런 걸 만들어냈는데 5만 리브르면 을메나 개쩌는 게 나오겠습니까요! 제발 돈 좀 주십쇼!”
듀퐁은 이제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을 기세였다.
아니. 나도 주고는 싶거든? 그런데 증기자동차가 보면 볼수록 수지를 맞겠다는 생각은 커녕 내가 아는 자동차의 모습이랑 멀어진단 말이야.
무슨 차가 무게부터 7톤, 8톤에다가. 크기는 4미터 5미터가 넘어가고...
저런 걸 팔라고? 시발 누가 사? 자가용은커녕 대중교통이면 모를까.
···대중교통?
쓰으읍, 대중교통이라.
“야. 듀퐁.”
“아이고, 드디어 은혜를 내려주실 생각이시옵니까?”
“이건 내 생각인데. 혹시 버스 한 번 만들어 볼 생각 있냐?”
“버, 뭐? 그게 뭔데.”
“그러니까 이게... 뭐라고 해야 하나? 다인용 운송수단? 그 공용마차 있잖냐. 여러 명이서 타는 거.”
“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대충 저거 몇 대 뽑아서 요금 받고 시내버스마냥 파리에 돌리면, 꽤 짭짤하겠는데?
“사장님?”
그렇게 나와 듀퐁이 서로 한참 떠들고 있을 때, 한 급사가 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죠?”
“아가씨께서 와 계십···.”
“오빠, 지금 많이 바빠요?”
급사의 말을 끊고 문 너머로 슬쩍 얼굴을 비추는 여성.
“아냐, 거의 다 끝났어. 응접실에서 조금만 기다려.”
“네에에.”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듀퐁은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내게 물었다.
“우와. 저 미인은 대체 누구냐?”
“···내 애인.”
“와! 애인? 천하의 고자 기욤이? 키야. 세상이 망하려고 하나? ···성함은? 성함이 뭔데?”
“···어, 음. 어.”
“왜 그래 임마. 이름 좀 알려주면 뭐가 닳기라도 하냐?”
“폴린.”
“이름도 예쁘네. 성은?”
“···보나파르트.”
“···뭐?”
뭐 이 새끼야.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