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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화 첫인상 (5) (227/341)

첫인상 (5)

“으음.”

창문을 넘어 햇살이 눈을 간질이자, 나폴레옹은 짧게 신음을 내며 기지개를 켰다.

일어나니 벌써 해가 중천이다.

이제 가을도 다 끝나고, 한겨울에 들어선 12월 말인걸 감안하면 평소보다 두세 시간은 더 잔 듯 싶었다.

‘하루에 두 시간, 세 시간만 자면서 불태우던 생도 시절을 생각해보면 이렇게 나태해져도 되나?’

같은 생각이 마음 한 켠에 들락거렸으나.

- 흐에엑!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음!? 아조씨, 그러다가 픽하고 쓰러진다니까?

문득 떠오르는 20년 지기의 말에 훌훌 털어버리고 베게에서 몸을 뗐다.

그러자 침실 한 편에 놓인 테이블에서 차와 함께 신문을 읽던 여인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일어났어?”

“···제인?”

“배고프지? 당신 자고 있을 때 만들어 놨어.”

- 달그락.

하늘하늘거리는 홑겹의 옷만 입은 여인은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에 있던 쟁반 하나를 나폴레옹을 향해 내밀었다.

얇게 구워낸 소고기 서너 장에 계란프라이 두 개, 렌틸콩 한 접시. 가벼운 아침식사로 제격이었다.

그러나 왜인지, 나폴레옹은 쟁반에 놓인 식사를 먹기보단 제인과 허공을 번갈아 쳐다보기 바빴다.

“큼, 크흠.”

“왜 그래?”

“아니, 대낮인데 미리 옷이라도 갈아입지 그랬어.”

“어머. 어젯밤에는 좋아하더니. 낮에는 다른가보죠?”

“······.”

쿡쿡 거리며 웃는 제인에게 나폴레옹은 훅-하고 붉어진 얼굴을 들킬 새라 서둘러 쟁반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계란프라이를 주섬주섬 집어먹기 시작했다.

하여간에 영국인이라 그런지 프랑스인을 놀리는데 아주 재미가 들린 모양이다.

그렇게 한참동안 미소를 짓던 제인은 테이블에 턱을 괴며 나폴레옹에게 물었다.

“휴가는 언제까지라고 했지?”

“모레까지인데, 왜 그래?”

“그러면 오늘은 시간이 있는 거네?”

뭔가, 뭔가 온다.

저렇게 깨발랄하게 좋아하는 거 보면 뭔가가 온다.

나폴레옹은 씹던 소고기 조각을 마저 목 뒤로 꿀떡 넘기고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으런데에?”

“잘됐네! 오늘이 또 크리스마스 이브잖아. 사장님이 특별한 행사를 준비한다고 언질을 주셨거든.”

특별한 행사라니. 기욤, 니 또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그으런데에?”

“그런데라니? 아가씨들이랑 같이 구경삼아 나들이라도 가면 어떨까 해서 묻는 거지. ···왜 자꾸 눈을 피해?”

나폴레옹의 머리가 핑핑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마리, 카롤린 그 두 미친년을 기욤 그 녀석 앞에 풀어놔야 한다고?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왔다.

***

“이건 어때?”

“그건 너무 튄다, 얘.”

“그러면 이건?”

“그건 너무 수수한데? 어디 못사는 시골 마을 출신인줄 알겠어.”

“그러면······.”

“에휴. 그냥 아무거나 입으면 될 걸, 꼭 그렇게 꼬치꼬치 따져야겠어?”

턱을 괸 채로 뚱하게 자매들을 바라보던 폴린 보나파르트가 그리 말하자, 서로 입은 드레스와 코디를 매만져주던 두 자매의 얼굴이 ‘어떻게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냐’는 듯 일그러졌다.

“큰 언니! 작은 언니 좀 봐. 이게 무슨 기회인지 모르나봐!”

“폴린, 오늘 어딜 가기로 했는지 모르는 거야?”

“모르긴 무슨. 오빠 친구 만나러 간다며.”

대답은 심드렁했으나 돌아오는 말은 어마어마했다.

“그걸 아는 애가 그래!?”

“기욤 드 툴롱이라고, 기욤 드 툴롱! 프랑스 제일의 재산가란 말이야!!”

“어디서 들었는데 재산이 프랑스 1년 예산하고 맞먹는다고 했어!”

“···그러니까 그게 뭔 상관인데.”

“무슨 상관이냐니! 그 사람을 유혹하기만 하면 팔자 펴는 거라니까? 죽을 때까지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어!”

“게다가 기욤 그 분은 엄청난 인격자잖아. 고용인들에게도 큰 소리 한 번 낸 적 없고, 시민들에게도 항상 웃는 낯으로 대해주시는데 연인에게는 또 얼마나 잘해주시겠어.”

“아무래도 두 사람 다 새언니가 쓴 책을 너무 많이 본 거 같은데. ······그래, 뭐. 아무튼 간에 둘 다 잘 해보세요.”

폴린은 그렇게 말하고선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고향 코르시카에서 본토로 쫓겨나고 나서 어머니, 뤼시앵, 마리, 카롤린, 폴린, 제롬, 루이에 이르기까지 군식구들을 먹여 살린 건 둘째오빠인 나폴레옹과 그를 밀어준 은인, 기욤의 덕 아닌가.

이제 큰오빠인 조제프 또한 변호사로 성공해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아직도 보나파르트 일가는 쪼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다 못해서 은인을 상대로 감사하는 마음은커녕 어떻게 신세 고칠까 하는 생각뿐이라니.”

하여간에 하루가 멀다 하고 파티, 연회장에 가서 남자들 꼬시는 게 일과인 미친년들 아니랄까봐 하는 생각하는 꼬라지가 대단했다.

뭐, 그랬으니 코르시카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이 비싼 파리에 남아 있는 거겠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이게 몇 년 만에 보는 거람.”

둘째 오빠가 소위를 막 달았던 시절이니 대략 십 년도 훌쩍 넘는 세월.

기억 너머에 희끄무레하게 남아있는 잔상을 더듬어보자 훤칠한 미청년이 떠오른다.

수백 킬로미터를 달려와 피곤할 텐데도 아이에게 손짓발짓을 하며 잠 대신 꿈을 심어주던 그 미청년이.

“······내가 미쳤지 미쳤어.”

정신을 차릴 겸 자기도 모르게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두 손으로 챱챱- 하고 때리던 폴린은 어느새 자기 방 안까지 와 있었다.

“···누구 없지?”

문득, 방 한 켠에 놓인 거울을 향해 다가간 폴린은 자기가 생각하기에 매혹적이라고 생각하는 포즈를 취했다.

누가 보면 행위예술 아니면 암포라 도자기를 흉내내는 거냐고 물을 테지만 말이다.

“그래도 나 정도면 꽤··· 예쁜 편 아닌가?”

한참 거울을 향해 포즈를 잡던 폴린을 기겁하게 만든 건 뒤에서 들린 목소리였다.

“···폴린 니 뭐하노?”

“끼야악! 나폴레옹 이 인간아, 제발 노크 좀 하고 다니라고!!”

***

1798년 12월 24일.

파리 외곽.

“플로리앙 씨.”

“······.”

“플로리앙 씨.”

“······예, 사장님.”

“왜 그렇게 죽상이에요?”

“사장님이 절 꼴 받게 만드시잖습니까.”

아아아니, 내가 뭘 했다고 그렇게 한숨을 쉬고 난리야. 이 양반아.

“뭘 했냐고요? 대체 이 해괴망측한 빨간 옷을 제가 왜 입어야 합니까?”

“해괴망측한 빨간 옷이 아니라, 산타복이거든요.”

“그러니까 왜 많고 많은 색 중에 붉은색이냐구요.”

어허. 산타복이 붉은 것은 단군왕검의 홍익익간과 홍의장군 곽재우 장군님의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유구한 전통이거늘. 어찌하여 그런 사문난적 같은 소릴 하느뇨.

“게다가 애초에 산타클로스는 영어잖습니까. 대체 왜 성 니콜라오스라고 안 부르시죠?”

“성 니콜라오스는 뭐랄까, 부르는 맛이 안 나잖아요. 산타클로스! 아, 얼마나 입에 착착 달라붙어요.”

“그건 또 무슨 개소립니까?”

“···그래요. 플로리앙 씨가 입기 싫으면 저만 입죠 뭐. 에효, 나가서 돈 벌어오면 뭐하나 이렇게 부사장한테 쿠사리나 먹는데.”

“아니, 말을 그렇게 하시면 제가 이상한 놈이 되잖습니까!”

아 그러면 입으시라고.

결국 플로리앙 씨는 입이 댓발 튀어나온 채로 내가 준비한 빨간색 산타복을 주섬주섬 주워 입기 시작했다.

나는 화룡점정 삼아, 미리 준비해놓은 흰색 가짜수염을 플로리앙 씨의 얼굴에 걸어주었다.

“아유 얼마나 보기 좋아. 애기들이 아주 꺄르륵, 꺄르륵 신이 나겠어.”

“······.”

“왜 눈을 그렇게 뜨세요.”

“사장님, 저 마음에 안 들죠?”

“에헤이 또 왜 그러실까. 자, 같이 웃어보죠. 스마일~.”

“······스마일.”

거 참, 장난감 파는 회사 사원이 이렇게 동심을 못 지켜줘서야 되겠나? 에잉 쯧쯧.

“사장님! 여기 계셨군요! 말씀하신 대로 선물보따리도 모두 준비해놨습니다!”

“좋네요. 아, 애들은요?”

“곧 올 겁니다. 미리 자리를 잡아 놓으시죠.”

나는 내 입에도 가짜 수염을 붙인 뒤, 페시옹 씨의 인도를 따라 자리를 잡았다.

열차의 객차를 손봐 썰매처럼 단장한 자리는 척 보기에도 동심이 숨펑숨펑 솟아날 것처럼 잘 꾸며져 있었다. 역시 돈을 바르면 안 될 게 없다.

“자. 이쪽으로 가는 거예요.”

“엄마. 저 할아버지는 누구에요?”

“우리 친구들에게 선물을 주러 오신 성 니콜라오스세요.”

“호, 호, 호. 다들 반갑구나. 난 산타클로스에요.”

나는 몇몇 부모님들 손을 꼭 잡고 다가오는 아이들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자, 우리 꼬마는 소원이 뭐니?”

“전 장난감을 가지고 싶어요.”

“그러면 이 이삭의 민족 카드팩이 제격이구나. 자, 여기 있다. 잘 쓰렴.”

“전 글자를 읽고 싶어요!”

“그러면 이 이삭의 민족 카드팩이 제격이구나. 자, 여기 있다. 신부님께 잘 배우렴.”

“전···.”

“그러면 이 이삭의 민족 카드팩이 제격이구나. 자, 여기 있다.”

“감, 사합니다아...”

크헤헤헤.

세상에 공짜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우리 어린이들, 스타터팩으로 시작해서 옆집 친구한테 박살도 나보고, 얍삽이에 당해도 보세요. 짜증난다구요? 혹시 알아요? 더 많은 카드를 사면 이길 지도?

“페시옹 씨.”

“예, 사장님.”

“트레비식과 머독 두 사람에게 한 번 더 기관차를 점검해보라고 하세요. 점검은 아무리 해도 유비무환이니까.”

“예, 사장님.”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기관차 쪽에서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철강업을 시작하고 고로로 강철을 뽑아내기 시작한 지 어언 4년 째. 마침내 미네소타-루이지애나까지 이어지는 간선 철도가 완성되고 남은 철주괴가 처음으로 프랑스 본토에 도착했으니 이제 남은 건 하나 뿐 아닌가.

“우리 파리 시민들이 잘 받아들여줄까요?”

어느 새 자기 보따리에 있는 카드팩을 모두 나눠준 플로리앙 씨도 수염을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내 옆에 와 있었다.

“이게 되겠습니까, 사장님?”

“제 말대로 해서 안 된 적 있었나요?”

“끙. 그렇긴 한데...”

“난데없이 말 없는 철마가 파리 한복판에 돌아다니는 것보단 삐까번쩍한 산타클로스의 철마가 첫인상은 더 좋지 않을까요.”

그리고.

나는 말을 덧붙였다.

“파리를 두 번이나 구원하신 전쟁영웅도 불러냈는데 시민들이 섭해하면 그게 이상하죠.”

“···알겠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내일 잡지사에 돈 좀 뿌려서 호의적인 기사들 쏟아내면 금상첨화겠군요.”

“여윽시 우리 부사장이야.”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마차에서 우리 귀빈들께서 내리고 계신다.

“아이고 우리 살아있는 광고판, 아니 귀빈이 오셨네.”

“광고판?”

“귀빈이라고 했는데.”

“아무튼, 이게 뭔 난리고?”

“우리 회사에서 발명한 석탄을 이용한 차세대 슈-퍼 운송수단이지.”

“···그 십 년 전부터 하던 거?”

“예압. 우리 파리 시민의 구원자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께서 친히 올라 이 운송수단의 무해함과 유용함을 전국에 널리 알릴···, 악! 때리지 마!”

아, 아! 뼈 맞았어! 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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