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인상 (4)
1798년 여름.
“······마지막 대의원 표는, 2번! 야당인 민주공화당입니다!”
“이로써 상원과 하원, 대법원은 미합중국 2대 대통령은 과반을 얻은 토마스 제퍼슨, 부통령은 낙선자인 존 애덤스가 되었음을 선서합니다.”
“제퍼슨, 미합중국을 잘 부탁하네.”
“수고 많으셨습니다, 워싱턴.”
“““와아아! 제퍼슨! 제퍼슨!”””
바다건너 미합중국에서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임기를 마치고, 그 후임으로 토마스 제퍼슨이 당선되었다는 소식이 유럽으로 퍼지고.
“♩♪”
“세상에, 바이올린으로 어떻게 저런 소리를 낼 수 있단 말인가?!”
“흑흑, 니콜로! 날 가져요!”
“파가니니, 그는 신이야!”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불과 16세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가 자기 이름을 떨치기 시작할 무렵.
프랑스에 있는 나폴레옹은 거울을 보고 옷매무새를 고치고 있었다.
금줄을 비롯한 장식이 찬란하게 들어간 장군 예복을 입을까도 했지만 그녀가 혹시 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에 대신 샤프한 기병장교 예복을 입기로 했다.
이렇게 공을 들이고 긴장을 할 정도로 나폴레옹이 여태 여자 경험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어디 괴테와 장 보델에 대해 심오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여자 만나기가 쉬운 일인가?
가끔 일 때문에 만나서 대화를 나눌 때마다 얼핏얼핏 보이는 그녀의 지성미는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어디보자, 꽃은 이따가 사면 되고. 저녁 식사 예약도 잡아 놨고, 식사 후에 볼 베토벤 연주회 티켓도 있고···.”
그 구하기 어렵다는 베토벤의 연주회 티켓까지 준비했으니 그녀가 좋아해주면 좋으련만.
아, 고백은 어떻게 할 거냐고? 파리 가스등 점등시간에 맞춰 반지를 건네줄 예정이었다.
파리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영롱한 가로등 밑에서 사랑하는 연인이 된다니, 로맨틱하지 않은가?
연애소설을 쓰는 제인 그녀라면 좋아할 거라 확신했다.
아, 점등식을 볼 자리는 준장이라는 자신의 권능을 아주 조금 사용해, 비번인 공관병 페탱이 미리 목 좋은 곳을 맡아놓을 예정이었다.
그 대가로 페탱의 주머니에 빳빳한 5리브르 짜리 지폐를 두어 장 꽂아주었으니 그 녀석도 막 서러워하지는 않을 거다.
나폴레옹은 마지막으로 어깨에 내려앉은 먼지를 훌훌 털어버린 뒤, 집 문을 열고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작전은 빈틈이 없으니 이제 실행할 차례 아닌가.
***
제인이 프랑스로 오고 난 지도 이제 어언 4개월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언어 쪽에 특출난 그녀의 재능 덕택인지,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던 프랑스어도 이제는 어느 정도 듣기도, 구사하는 것도 가능했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한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 세상에, 대체 동사에 왜 성별이 있는 거야?
- 3군 동사? 이건 또 뭐지? 블러디 헬!
- 숫자를 대체 왜 이런 식으로 세는 거야?
그러나 이런 개같은 프랑스어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으니.
‘영국에서 어디 이런 교육을 받을 수 있었을까.’
하는 게 첫 번째. 그리고.
“오스틴 씨, 많이 기다렸습니까?”
“아니요, 저도 이제 막 왔답니다. 보나파르트 씨.”
“하하, 그래요? 하마터면 늦을까봐 마음을 졸였는데 다행이네요.”
“호호.”
사실은 약속시간에 늦을까봐, 그리고 가슴이 기대감으로 콩닥콩닥대는 바람에 1시간 전부터 나와 있었지만 제인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면 이제 가실까요?”
“물론이죠.”
곱상하게 생겨서 멋진 예복까지 다려 입은 군인이 숙녀를 향해 손을 내밀자, 숙녀 또한 손을 기꺼이 잡으며 말했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걸어 들어간 곳은 약속장소 근처의 서점이었다.
“오늘은 뭘로?”
“단테는 어때요, 오스틴?”
“아, 단테라. 좋고 말고요.”
두 사람은 책 한 권을 산 뒤, 가까이 있는 카페로 들어가 나란히 커피를 한 잔 씩 주문했다.
함께 앉아 커피를 홀짝이며 책을 읽는 두 사람.
그렇게 책을 읽다가 이따금씩 눈을 마주칠 때마다 얼굴을 붉히는 두 사람.
그럼에도 어깨와 어깨 사이 5센티를 차마 좁히지 않는 두 사람.
그 모습을 누군가 본다면 혀를 끌끌 차면서 ‘개답답하네! 아, 왜 키스 안함?’이라고 얼굴을 찡그렸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으로 한 여자에 푹 빠진 남자와, 자기가 쓰는 소설 속 주인공이 된 여자는 그 달콤한 5센티를 좁힐 용기가 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저 사람의 마음이 내 마음과 다르다면 어떻게 하지?’
그런 조그마한 불안감이 맥동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 법.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고 황혼이 푸른 하늘 위에 기지개를 키기 시작하고 카페가 오늘 장사를 마칠 준비를 하자, 두 사람은 아까보다 더 심하게 뛰는 마음을 지닌 채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
베토벤의 연주는 웅장했다. 역시 파리 최고의 음악가답다고 해야 하나.
“대단한 공연이었어요! 보나파르트 씨가 예매하느라 힘들었겠는데요?”
“크흠. 뭐, 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는 별 거 아니었습니다.”
“호오? 정말요?”
윽, 아프다.
그녀가 넌지시 물어보며 싱긋 웃자 가슴이 너무 아프다.
“커흠! 큼! 아! 그러고 보니 슬슬 시간이 점등식 시간에 가까워지는데, 혹시 같이 보러 가시지 않, 겠습니까?”
이런 병신 같으니. 자기도 모르게 마지막에 말을 절고 말았다. 이래서는 전혀 자연스럽지가 안잖아!
혹시라도 제인이 거절하면 어떻게 한다? 어쩌지. 어쩌지.
그러나 그녀는 무척이나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이죠!”
···애는 몇 명이 좋을까? 그래도 한 다섯 명은 돼야겠지?
아니다. 이런 망상에 빠져 있을 시간이,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나폴레옹은 예처럼 제인의 손을 슬며시 잡고는 며칠 전 페탱에게 일러놓은 장소를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음, 저 멀리 돗자리까지 깔고 남이 오지 못하게 막고 있는 젊은이의 뒤통수가 익숙한 거 보니, 일처리는 잘 된 듯 싶었다.
“콜록, 콜록!!”
“왜, 왜 그래요 보나파르트? 어디 아파요?”
“아니, 갑자기 기침이, 쿨럭!”
누구나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소리를 내자, 저 멀리 익숙한 뒤통수도 스르륵 고개를 돌렸다.
···그래, 경례는 됐으니 이제 놀러가라.
“보나파르트? 정말 괜찮은 거예요?”
“크흠흠. 아, 이제 괜찮습니다. 오스틴 씨. 오! 이런! 마침 저기 목 좋은 곳에 자리가 났군요. 저기서 점등식을 보면 딱일 거 같은데...”
나폴레옹은 그렇게 읊조리며 제인의 손을 슬그머니 잡아끌었다.
두 사람이 그렇게 가로등 밑에 발을 내딛고 나서 잠시 후.
온 세상이 환하게 밝아 왔다.
인류가 만들어낸 과학과 이성의 산물이 온 파리를 환하게 밝히기 시작하자, 노란 불빛이 검은 하늘과 어우러져 어여쁜 야경을 만들어냈다.
오직 전 세계에서 한 군데. 이 프랑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아름다움.
제인은 그 광경을 천천히 눈에 담더니, 꿈을 꾸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 몇 번을 봐도 신기하고, 예쁘네요.”
한참동안 그 얼굴을 바라보던 나폴레옹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스틴 씨. 아니, 제인.”
나폴레옹은 품속에서 반지를 꺼내 제인의 손에 살포시 쥐어주며 말했다.
“나와, 이 나폴레옹과 교제해주시겠습니까?”
이어지는 답은 간단했다. 기꺼이.
***
“킁, 뭐 이쁘긴 하네.”
올해로 22살이 된 수아송은 코를 킁하고 풀며 말했다.
중남부의 조그마한 도시 오툉에서, 파리로 올라온 지도 어언 4년 째.
시장바닥에서 신문 팔아먹던 꼬마는 이제 리어카 닮은 수레를 끌고 다니는 노점상이 된 지 오래였다.
혁명 이전이었으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겠지만, 어디 혁명 이후 신문과 잡지가 보통 잘 팔렸었나.
특히나 이삭의 민족에서 <포브스>와 <막심>을 발간한 이후 원래는 신문의 ㅅ도 안 보는 사람들이 대거 잡지 판으로 넘어오면서 그 파이가 어마어마하게 증가했고, 수아송도 그 수혜를 톡톡히 본 사람 중에 하나였다.
어디 가정주부 중에 <포브스>의 일일 요리코너를 안 본 사람이 있겠는가, 어디 기숙학교 학생들 중 <막심>을 몰래 사서 기숙사 안에 안 들고 가는 놈이 있던가.
심지어는 수녀원의 어린 수녀들 사이에서도 알음알음 <막심>을 돌려본다는 말이 도니 혈기왕성한 프랑스 청소년들은 오늘도 수아송의 주머니를 낭낭하게 채워주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서 이번에 나온 그 카드팩이라는 거. 리어카에 실었다하면 온 동네방네 사람들이 나와 지폐를 수아송의 주머니에 쑤셔 넣는 게 아닌가.
“으차.”
수아송은 자신의 월셋집 앞에 리어카를 세워놓고는 구석에서 잡지 몇 부와 뭔가 수북하게 들어 있는 종이봉투를 챙겨 일어났다.
지금 시간이 12시. 가로등이 새벽 1시면 완전히 꺼지니까 수아송의 메인 고객님들을 위해선 서둘러야 했다.
수아송은 아까 사놨던 이삭의 민족 간편식사를 입에 물고는 아무렇게나 씹어 넘겼다. 배를 간단히 싸게 때우기엔 이거만한 게 없었다.
그는 챙긴 짐을 떨어지지 않게 복대처럼 옷 속에 둘러맨 뒤, 파리 14구에 있는 한 기숙학교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성질 좀 부릴 것처럼 생긴 수위가 정문에 둘. 여느 때와 같다.
수아송은 고개를 돌려 거리에 매달아 놓은 시계를 살폈다.
새벽 12시 56분. 조금만 기다리면 이제 등이 꺼진다.
1분, 2분, 3분. 마침내 툭-하는 소리와 함께 가로등이 꺼지자, 기숙학교의 앞에는 수위실에서 나오는 촛불 말고는 빛이 하나 없었다.
그는 두어 번 숨을 내쉬고는 살금살금 그림자에 숨어들어 기숙학교 벽을 타기 시작했다.
대략 3미터가 넘는 꽤 높은 벽이었건만, 저잣거리에서 22년을 살아온 수아송은 구렁이 담 넘듯 순식간에 벽 위에 올라갔다.
그러자, 담 밑에서 조그맣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저씨!”
누가 알아채지 못하게 칙칙한 담요를 두른 소년 둘.
돈 깨나 번다는 집에서 이 비싼 기숙학교로 보낸 학생들이자, 오늘의 메인 손님이었다.
수아송은 조용히 옷 안에서 가져온 짐을 풀어 담 밑으로 내려주었다.
“자, 여기 있다.”
“고맙, 아니, 왜 다시 올려요!”
“돈부터 줘야지 이 녀석들아.”
“물건부터 봐야죠!”
“뭐? 야 임마, 너 몇 학년이야?”
“4, 4학년이요.”
“내가 니 선배들하고 몇 년을 해먹었는데 구라를 칠 거 같냐? 어서 돈부터 내놔.”
“아니, 그래도!”
“야, 기조. 그러지 말고 그냥 먼저 드려.”
친구가 그렇게 말하자, 소년은 뾰루퉁한 표정으로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 내밀었다.
“어디보자. 하나, 둘, 셋···. 좋아, 확실하네.”
수아송은 그제서야 짐을 소년들에게 내려주었다.
“이삭의 민족 카드팩 20개하고, 또 <막심> 7부, <포브스> 3부. 맞지?”
“네.”
“좋아, 우리 꼬맹이들. 다음에도 이 수아송 특급배송을 이용해달···.”
- 삐익! 삐익! 거기! 당신 뭐야!
수위들의 호루라기 소리가 나자, 수아송은 담을 언제 올라갔냐는 듯 재빠르게 내려와 뛰기 시작했다.
“이런 썅! 또 놓쳤어!”
“미친 놈, 뭐 저렇게 빨라?”
“제기랄, 공쳤구만. ···그래도 저 놈 한 번 온 날에는 또 안 오니까 수위실에나 들어가 있자고.”
수위들은 씩씩거리며 수위실에 문을 닫고는, 모자를 벗어 아무렇게나 걸어놓고 의자에 턱-하고 기댔다.
“쯧, 할 거도 없는데 시간 녹일 겸 카드나 치자고.”
“그거 좋지. 그런데 괜찮나? 자네는 나한테 한 번도 못 이겼잖나.”
“그건 내 카드들이 구려서 그랬던 거고! 큼, 오늘은 다를 거야. 아까 보따리장수한테 새 카드를 왕창 얻어왔거든!”
두 수위는 주머니에서 귀중품처럼 고이 모셔놓던 덱을 꺼내 탁자를 잡고 마주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