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5화 첫인상 (3) (225/341)

첫인상 (3)

“그러니까... 뭐라고?”

“헉, 허억, 헉. 이거··· 무조건··· 허억.”

마차가 다니지도 않는 이 새벽에 갑자기 내가 머물고 있는 곳까지 달려온 나폴레옹 형은 무릎을 부여잡은 채 숨을 헐떡였다.

그, 아저씨? 누가 잡아가는 것도 아닌데 숨 좀 가다듬고 말하지 그래? 그러다가 숨 넘어 가시겠어. 그러다 천식 생겨요. 천식. 안 그래도 쓰레기 같은 이 18세기 말 의료기술인데 그러다가 제 명에 못 산다니까?

그 뿐인가? 집 앞에서 사람이 쓰러지면 막 사람들이 웅성웅성! 어머, 저 집에서 사람이 죽었다네요? 어머어머 진짜요? 하면서 집값이 팍팍 떨어진다고. 아, 내 집이면 상관없는데, 이거 내 집 아니란 말이야.

왜 내 집이 아니냐고? 호시탐탐 내 목을 노리는 두 명의 살수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니 페시옹 씨한테 낭낭하게 임대비 주고 집을 빌렸다. 돈 몇 푼보다는 내 건강이 더 소중하거든.

“그에에엑, 흐에엑.”

“···조금만 기다려봐.”

나는 칫솔을 다시 입에 물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물이라도 안 떠다 주면 나폴레옹 이 인간 당장에 ‘갸아악! 나 죽어!’하면서 쓰러질 거 같단 말이야. 아니, 그나저나 대체 얼마나 뛰었으면 사람이 이렇게 죽는 소리를 낸단 말인가.

- 벌컥, 벌컥.

“후, 이제 좀 살 거 같구만.”

물이 가득한 머그잔 한 잔을 통째로 원샷 때린 나폴레옹 형은 옷소매로 마저 입 주변을 슥- 닦은 뒤, 옆으로 맨 가방을 뒤적거려 내게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

“뭐긴, 니가 읽어달라고 한 그 원고들이제.”

뭐어, 읽어 달라고 하긴 했는데... 뭐 기한을 빠듯하게 준 것도 아니고 아침 댓바람부터 이렇게 뛰어올 이유가 있나?

“혹시 일중독이야? 아니면 드디어 이 기욤의 크나큰 은혜에 감읍한 나머지···.”

“이름은 잔 오귀스탱, 아니. 영국인이니 제인 오스틴이군. 소설 이름은 <첫인상>. 내가 비록 대단한 문장가는 아니지만 이 사람 보통 사람이 아이다.”

나폴레옹 형은 내 말은 귓등으로 흘리면서 예의 그 종이 뭉치를 휘휘 흔들었다. 종이 뭉치는 아마도 그 제인 오스틴이란 사람의 원고였나 보다.

“아니,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래? 그래봤자 이제 20대 초 아냐? 20대 초가 대단한 걸 써봤자지.”

“그걸 스무 살에 재무총감 단 놈이 말한다고?”

“······뭐어 보편적으로는 그렇다 이거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나폴레옹 형의 손에서 종이 뭉치, 아니. 원고를 꺼내 겉표지를 읽어 내려갔다. 얼마나 대단하면 까탈스러운 이 코르시카 출신이 이렇게 극찬을 한담.

“제인 오스틴 습작, 1797년 집필. <첫인상>.”

- 사라락.

표지가 넘어가고 첫 단락이 눈에 들어왔다.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이런 남자가 이웃이 되면 그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을 거의 모른다고 해도, 이 진리가 동네 사람들의 마음속에 너무나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그를 자기네 딸들 가운데 하나가 차지해야할 재산으로 여기게 마련이다···.]

잠깐만, 이거 어디서 본 적 있는데? 어디서, 어디서 봤더라? 기억해내라, 기욤. 아니, 한국인 기찬아. 이거 어디서 본 적 있지 않냐?

“······고등학생을 위한 한국대 추천도서 목록 100?”

“니 지금 뭐라고 했나?”

“아, 아냐.”

그래. 그거 맞다. 야간 자습시간에 공부는 하기 싫고, 뒤에 선생님들 지나다녀서 도망도 못 가니까 얌전히 청소년 권장도서 읽었었는데 그 때 이거 비스무리한 걸 읽었던 기억이 난다.

“형, 그 사람 이름이 뭐라고?”

“제인 오스틴.”

“제인 오스틴, 제인 오스틴.”

오 시발. 맞다. 맞아. 제인 오스틴!

들어본 적 있다. 읽어본 적도 있고. 그런데 그때 읽었을 적에는 저런 제목이 아니었던 거 같은데. 아,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인가.

“···하, 이거 생각지도 않다가 로또 맞았는데.”

“로또? 로또는 또 뭐고?”

“뭐긴 대박이지.”

나는 고개를 갸웃하는 나폴레옹 형을 응접실에 잠시 놔두고는 서둘러 계단을 올라 방문을 두드렸다.

- 쾅쾅쾅!

“페시옹 씨!”

잠시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삐거덕 소리와 함께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방문 밖으로 나왔따.

“···예, 예에 사장님? 흐아아암. 아침부터 무슨 일이십니까?”

“오늘 출근하면 바로 작가계약서 하나 뽑아서 사장실로 가져와요! 계약 조건은 업계 최고로!”

***

파리, 6구.

소르본 대학.

“어디보자, 다음 수업이...”

수수한 흰 옷을 입은 제인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스케줄을 적어놓은 수첩을 펼쳐 읽어 내려갔다. 온 세상천지가 난생 처음 듣는 프랑스어이기에 미리미리 수업준비를 하지 않으면 강의를 놓쳐버리는 탓이었다.

그렇게 제인이 복도에 우두커니 서서 수첩을 뒤지고 있을 때, 누군가 저 멀리서 뛰어와 제인을 향해 말했다. 프랑스 억양이 많이 섞인 영어였다.

“제인 오스틴 씨?”

“네? 아, 네! 그렇습니다만 왜 그러시죠?”

제인의 말에 검은 피부를 가진 남자는 환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휴, 드디어 찾았군요! 전 이삭의 민족 비서실장 알렉상드르 페시옹이라고 합니다.”

“비서실장이요? 그런 분이 어째서 절?”

“사장님께서 제인 씨가 쓰신 <첫인상>을 보시고 제인 씨가 마음에 드셨는지 정식계약을 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절 직접 보내셨구요.”

“정식, 계약이요?”

제인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정식 계약이라니, 그러면 자신이 쓴 글이 정말로 책이 되어 팔린단 말인가.

처음 글을 쓴 이래 수년 간 출판사로부터 ‘귀하와 함께하지 못하여 슬픕니다만 우리는 귀하의 앞날을 응원합니다.’ 따위의 답장만 받아본 제인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하지만 전 아직 배우는 입장인데...”

“하하, 저희가 지금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계약서 내용을 확인한 뒤에 결정하셔도 괜찮습니다.”

넉살 좋게 웃는 흑인의 말에, 제인은 잠시 침묵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제인 씨!”

페시옹이라는 비서실장이 부른 마차를 타고 10분여 정도 갔을까. 샹 드 마르스 광장을 건너 도착한 그르넬흐 거리에 내린 제인은 눈이 휘둥그레 해질 수밖에 없었다.

거리 한 편에 자리한 건물이 대강 110야드, 그러니까 프랑스식으로 말하면 100미터 정도 되는 크기를 가진 4층짜리 건물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간판 하나를 달고 있었다.

[Peuple De Épi]

“여기가 저희 이삭의 민족 본사입니다.”

“무척, 무척 크네요.”

“하하, 그렇습니까? 지금은 이래도 15년 전에 막 사장님께서 사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방 두개에서 출발했었답니다.”

페시옹은 내심 자부심을 느끼는 듯 그렇게 말하고는 건물 문을 열고 제인에게 손짓했다.

비서실장의 안내를 따라 건물로, 그 중에서도 1층 한켠에 마련된 응접실로 들어가자 몇 주 전 환영식에서 만났던 두 사람이 소파에서 일어나며 인사 삼아 고개를 까닥였다.

사장인 기욤, 그리고 나폴레옹이라고 했던 채점관이었나.

제인 또한 그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인. 저와 나폴레옹 두 사람은 제인 씨의 문학적 재능이 매우, 매우매우매우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띄워주시는 거 아닌가요?”

“아뇨 아뇨. 그럴 리가요! 여기 있는 우리 나폴레옹 씨의 안목이 얼마나 높은데요. 안 그렇습니까, 나폴레옹 씨?”

아니. 왜 칭찬을 해줬는데 뚱한 표정으로 날 째려본담.

“좀 더 첨언하자면 우리 나폴레옹 씨가 말하길, 제인 씨의 재능은 너무나도 찬란해서, 그 정도가 가늠이 안 될 정도라고 하더군요.”

“···내는 그렇게까지 한 적은 없, 악!”

나는 탁자 아래로 손을 숨긴 채 나폴레옹 형의 허벅지를 잡아 비틀며 조용히 속삭였다.

- 거 영업하는데 적당히 맞장구나 쳐주십쇼. 아시겠습니까, 휴먼?

- 읍, 읍!

그래, 진즉에 그렇게 협조적으로 나올 것이지. 왜 초를 치냔 말이야. 이 양반아.

“큼큼, 어디까지 했었죠, 제인 씨?”

“···제 재능이 뛰어나시다고...”

“아 그렇죠! 이 뭐냐, <첫인상>! 딱 보자마자 아, 이건 대박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지 뭡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가락을 까닥였다. 곧 사환 하나가 갓 찍어낸 따끈따끈한 계약서를 탁자 한 가운데 슥-하고 올려주었다.

“이게 뭔가요?”

“계약서입니다. 앞으로 저희 이삭의 민족이 제인 오스틴 씨의 작품 활동을 전적으로 후원하고, 대신 제인 오스틴 씨는 앞으로 저희 전속 작가가 되는 거죠.”

“···판매액은 어떻게 주실 거죠?”

오. 이거 봐라. 일반적인 사람이면 내가 계약서를 내밀자마자 도장부터 찍었을 텐데 역시 대문호 아니랄까봐 일머리 돌아가는 게 보통이 아니다.

좋다, 서로 딱 깔끔하게 계약조건 다 머리에 넣고 합의 봐야지 나중에 구설수 나오면 서로 힘들어.

“제인 씨, 보통 인세가 8퍼센트에서 10퍼센트 사이인건 아시나요?”

“···네.”

“저흰 통 크게 15퍼센트 드리겠습니다.”

“···네?”

“제인 오스틴 씨 같은 재능은 돈 몇 푼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사실 제인 오스틴이 아니면 이렇게 투자 할 이유가 없지. 세계적으로 이름을 남길 대문호니까 당연히 이 정도는 값싼 매몰비용 삼아 잡아야한다.

생각해보자, 미래를 아는 축구감독이 어린 시절의 리오넬 메시를 영입할 수 있다고 하면 그깟 돈 몇 푼 아끼겠나. 100억, 1000억을 쏟아서라도 잡겠지. 그런 거다.

나는 계약서를 제인 씨 쪽으로 넘기면서 덧붙였다.

“그래서, 하시겠습니까?”

제인은 잠시 계약서를 들여다보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안 할 이유가 없네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역시 사람은 책을 읽어야 한다. 고마워요! 한국대 선정 청소년 권장도서!

이제 우린 200년 넘게 전 세계에서 인세를 호로록 먹을 수 있다!

“아, 그런데 말입니다. 그 <첫인상>이라는 소설, 혹시 다른 제목 생각해 놓으신 거 있으십니까?”

“다른 제목이요?”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오만과 편견>이라는 이름은 어떨까 하고 생각은 했었는데...”

“역시!!!”

제인 오스틴, 그녀는 신이야!

***

“그러면 이제 전 나가보겠습니다.”

“···네?”

“뭐?”

“뭘 뭐야 뭐는. 일 다 끝났으니까 난 가야지. ···아, 혹시 서로 얘기 나누고 싶으시면 응접실을 계속 이용하셔도 됩니다. 크헤헤.”

- 달칵.

기욤, 빌어먹을 놈은 그렇게 말하며 나폴레옹에게 윙크를 날리고는 사라져버렸다.

문이 닫히고 둘만 있는 응접실, 어색한 기류가 스멀스멀 올라와 나폴레옹과 제인 사이를 휘감았다.

이럴 때는, 이럴 때는 어떻게 하더라? 여자랑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눠본 게 너무 오래 전이라 머리가 하얘진다.

“···채점관님은 좋아하시는 작가가 있으신가요?”

“아, 어, 저요?”

“네, 책을 많이 읽으신다고 하셔서...”

나폴레옹은 먼저 치고 들어온 제인의 말에 깜짝 놀랐다가, 제 추태를 알아채곤 큼큼- 헛기침을 했다.

“큼큼, 전 그... 요한 볼프강 괴테라는 작가를 좋아합니다.”

“어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요?”

“···혹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아십니까?”

“정말 명작이죠!”

어라, 이 여자. 의외로 말이 잘 통할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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