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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화 첫인상 (1) (223/341)

첫인상 (1)

추운 북해의 바람이 브리튼에서 그 모습을 거두고, 슬슬 따스한 봄바람이 햄프셔 주에 위치한 작은 마을, 스티븐슨에 그 모습을 비추기 시작할 무렵.

그 작은 마을에 있는 유일한 교회를 맡은 시골사제, 조지 오스틴은 깊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제인 그 아이를 머나먼 프랑스에 혈혈단신으로 보내는 게 맞을까?”

하다못해 런던이나 리버풀, 맨체스터 같은 이 브리튼 땅이라면 몰라도, 결혼도 아직 안 한 처자가 외국이라니.

역시 아무리 생각해봐도 재작년에 좋은 혼사 기회가 왔을 때 시집을 보낼 걸 그랬나. 조지는 아파오는 관자놀이를 엄지로 꾹꾹 누르며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 아버지.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온다고 그걸 고민하고 있으세요?!”

장남, 헨리 오스틴은 눈이 휘둥그레 해져서는 무슨 말이냐는 듯 조지에게 물었다.

“외국, 그것도 프랑스다. 너희는 잘 체감이 안 되겠지만, 너희가 태어나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영국과 전쟁을 하던 사이란 말이다. 그런 나라에 우리 제인을 홀로 보내라고? 세상에, 네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단번에 기함을 하셨을 게다.”

“그렇다고 제인처럼 재능 있는 아이를 이 영국 촌구석에서 썩히시지도 않았겠죠.”

“···크흠.”

헨리는 아버지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는 낮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이 꽉 막힌 영국 땅에서 평범하게 태어난 우리가 성공하기란 코끼리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거랑 다를 게 없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구나.”

“그 개 같은 외국유학금지법 이후로 우리 같은 사람들이 고등교육을 받을 수단도 적어지고, 심지어 여자면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는커녕 수업 대신 치마길이 단속하는 법이나 알려주는 수녀원기숙학교 말고 갈 곳도 없지 않습니까.”

외국유학금지법. 프랑스에서 유학하면 프랑스 간첩이 되고, 스페인에서 유학하면 스페인 간첩이 되니 영국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서는 외부에 사람을 유출하면 안 된다는 해괴한 논리로 해외유학을 금지한 희대의 엽기적인 법.

듣기만 했을 때는 ‘어, 일리있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법안을 통과시킨 귀족원 나으리들의 면모를 하나씩 살펴보면 바보 천치조차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대번에 알 수 있으리라.

웨스터민스터에서 한 자리 해먹으시는 귀하디귀한 귀족 분들이 프랑스인 배우자와 첩을 들이는 건 괜찮은데, 옥스퍼드에 입학한다 쳐도 귀족들 등쌀에 떠밀려 왕따나 당하는 서민들이 참다못해 ‘씨발, 그래 니들 똥 굵다. 나도 니네하고 같이 공부 안 할 거야.’하고 외국에 유학을 나가는 건 간첩죄라니.

고위 공직자들이 외국인 출신 아내를 들이는 거랑 서민들이 공부하는 거랑 둘 중에 뭐가 더 안보적으로 위험할까. 당연히 전자지.

세상에 뭐 이딴 경우가 다 있는지. 지옥에서 베엘제붑을 데리고 와서 보여주면 그 대악마마저도 ‘아, 이건 좀...’하고 치를 떨 거다.

아무튼 간에 이 영국 땅에서 제인처럼 빛나는 아이가 제 재능을 펼치기란 하늘의 별따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바다 건너 프랑스처럼 여자가 서민원 의원을 맡는 나라라면. 그런 곳이라면 제인이 날 수 있지 않을까. 이번에 제인이 얻게 될 기회는 보통 기회가 아니었다.

게다가 법적으로 문제가 일어날 염려도 없다. 명백히 ‘소르본 대학 문학부에 위탁교육을 할 예정.’이라고 써져 있지 않나. ‘소르본 대학 문학부 입학’이 아니란 말이다.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니 억지트집을 잡지 않는 이상 이걸 유학으로 볼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심지어 주최자인 기욤은 현 수상인 윌리엄 피트와 사적으로 친하다는 소문까지 도니 머리 좀 돌아가는 공무원이라면 대부분 넘어가줄 테지.

“으음.”

“최근 맨체스터 쪽에서 일하면서 친해진 사람이 있습니다. 네이선 로스차일드라고, 이삭의 민족 영국 지점장인데 안 그래도 이번에 본사에서 작가 지망생을 뽑는다고 추천할 사람 없느냐고 묻더군요.”

“···믿을만한 사람이냐?”

“그럼요. 저랑 지금까지 여러 번 계약을 했는데 단 한 번도 펑크를 낸 적이 없습니다.”

장남의 말에 조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삭의 민족 지점장이라는 믿을만한 후원자가 뒤를 봐준다면 먼 외국에서도 나름 위해를 입지는 않을 테지.

“······그래, 똑 부러지는 헨리 네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믿어보마. 제인, 프랑스로 보내자.”

“잘 생각하셨습니다, 아버지!”

헨리는 입을 찢어져라 웃으며 서둘러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 제인! 제인! 된대! 너 이제 프랑스로 갈 수 있다고!

- 으아아앙, 오빠아아...!! 흑흑, 고마워!

- 울기는 왜 울어, 이 멍청아! 크흡.

“···하여간 누굴 닮았는지 남매가 저렇게 눈물이 많담.”

조지는 그렇게 말하면서 소매를 들어 눈가를 훔쳤다. 자꾸만 손이 가는 게 눈에 티끌이 들어간 듯 했다.

***

프랑스, 파리.

골목 사이사이를 지나고, 또 지난 끝에 도착한 조그마한 선술집. 남들 눈에 띄지 않게 검은 옷을 입은 한 남자는 선술집 문고리를 두드렸다.

- 누구쇼.

“나야, 마티유.”

- 우리 수학 가르치던 교수님 이름이 뭐였지?

“아니, 우리가 무슨 애도 아니고 이 나이에 이런 거 까지 해야 해? 우리 애가 이제 걸어다녀 인마.”

- 안 하면 안 들여보내 준다?

“미친놈, 어떻게 된 게 학교 때랑 바뀐 게 없네. 하아... 피에르시몽 라플라스 교수님. 이제 됐냐?”

그제서야 걸려 있던 빗장이 풀리고 끼이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아이고, 유부남 프랑수아 마티유님 아니십니까. 어서옵쇼.”

“대체 동창회를 왜 이런 구석탱이 술집에서 하는 거야?”

왜긴, 지금 내가 파리에 있는 거 알면 날 끌고 갈 인간이 한 둘이어야지. 내가 파리에 들어온 거 알면 죽창을 든 홍위병과 함께 로베스피에르가 나타나 날 납치해가지 않을까. 나도 이렇게 접선하듯이 만나긴 싫다고.

“애초에 네가 오지랖만 안 부리고 다녔으면 그럴 일도 없잖아.”

“됐고 술이나 받아.”

“아이고 이거 전직 재무총감님이 주시는 잔을 황공해서 어떻게 받아야하나. ···크, 맛은 괜찮네. 아, 다른 사람들은?”

나는 대답 대신 술집 구석 어드메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건, 이건 말도 안 돼! 분명 내 몬스터 카드가 더 공격력이 높잖나! 이렇게 어이없이 지는 게 어디 있나!”

“밑에 적힌 효과를 잘 읽으셨어야죠. 그루시 대령. 필드 위에 기마병이 있으면 이 장창병 카드의 공격력이 올라간다는 거 모르셨습니까?”

“무슨 소리! 속도를 붙여 돌격하는 숙련된 기병대라면 장창병 따위는 쉽사리 압도할 수 있다는 말일세! 이 그루시가 그런 창병진 하나 못 잡아먹는 똥별로 보이는가?”

“그건 야전이고, 이건 카드놀이 아닙니까.”

“니콜라 다부 대령! 이건 사기야!!”

“사기라면 저기 창립자가 있으니 제가 아니라 그쪽에 대고 말하시지요.”

“두고 보게나, 내가 내일 더 대단한 카드를 들고 관사에 찾아갈 테니!”

“뭐, 그래도 저한테 질 것 같습니다만.”

“갸아아아악!!!”

꽥꽥 소리를 지르는 그루시나, 옆에서 평온한 얼굴로 살살 긁는 다부 대령이나.

저게 이제 서른을 넘어가는 아저씨들이 맞냐? 진짜 가슴이 웅장해진다. 역시 단 한 순간도 조용해질 날이 없다.

파리중앙군사학교에서 주던 짬밥에 사실 대마초라도 섞여 있는 거 아닐까? 어떻게 된 게 졸업생이 나 말고 죄 비정상이람.

그루시와 다부의 모습을 보고 절레절레 고개를 젓던 마티유 형은 다시 한 번 내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나폴레옹은? 우리 중에 두 번째로 출세하신 귀한 분은 어디가셨어?”

“이제 퇴근시간이니까 곧 올 텐데.”

- 똑, 똑, 똑.

“왔나보네.”

방금 전과 같이 신성한 통과의례를 끝내고 문을 열자, 눈에 다크서클이 가득한 사회인이 비틀거리며 들어왔다.

“아니, 이게 시체야 사람이야.”

“···다 잘 지냈나.”

“말 하는 거 보니까 아직 시체는 아닌 거 같은데.”

“···내 지금 농담할 기운도 없다. 술이나 가득 하나 따라줘라.”

편지가 아니라 얼굴을 맞대고 수년 만에 마주한 나폴레옹은 군모를 식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놓고는 의자에 턱-하고 기댔다.

“으어어, 죽겠다.”

“방첩사령부 쪽에 보직 받았다고 좋아하더니만, 왜 이렇게 죽상이야.”

“씨발, 별 등신 같은 새끼가 상관이랍시고 꼴 받게 한다 아이가.”

나폴레옹 형은 이제 고개를 완전히 의자 뒤로 꺾은 채, 두 팔을 휘적거리며 말했다.

“그 노괴 놈, 꼰대라는 말도 그 노괴 놈한테는 아까워. 그런 놈이 방첩사령관이라고? 허, 지다가던 개가 웃다가 뒈져버려도 놀랄 일이 아니제.”

“뭐 얼마나 속에 쌓였길래 저런데.”

“그러게.”

나폴레옹은 고개를 슬쩍 돌려 우릴 바라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방첩사령관이란 놈이 일은커녕 경찰부장관과의 권력 싸움에만 눈이 멀었데이. 밑에서 내가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서 보고서를 아무리 올려도 그 노괴 놈은 오직 경찰 보안부랑 쌈박질하느라 관심도 없제. 똥별새끼 같으니.”

내가 아메리카와 유럽을 오고가며 별 일을 다 하는 동안 나폴레옹은 밥그릇 싸움에 정신이 팔린 상관 때문에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받은 듯 했다.

확실히 방첩이라는 게 경찰과 군 두 부서에 발을 걸치다보니 밥그릇 싸움이 심하긴 하지.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그 사이에 낀 나폴레옹 형이 수척해진 것도 이해가 갔다.

나폴레옹 형은 탁자 위에 있는 포도주 한 병을 까더니 그대로 병째 들이키기 시작했다. 반쯤 마셨을까, 나폴레옹 형은 병을 다시 탁자 위에 쿵-소리와 함께 놓더니 말했다.

“크으. 미안하다. 오랜만에 봤는데 이렇게 푸념이나 늘어놓고.”

“뭘, 그런 말 하라고 친구끼리 보는 거 아니겠어?”

“하, 내일 아침에 카드팩 몇 개 더 사야겠구만. ···좋아, 짜증나는 건 치워놓고 재미나 보자고.”

그 날, 선술집의 불은 오래토록 꺼지지 않았다.

***

어우. 지금 몇 시지.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헝클어진 머리를 북북 긁으며 시계를 보았다.

“아니, 벌써 9시라고?”

“끄어어어... 왜, 니 뭔 일 있나?”

간밤에 우리 집에서 2차를 달린 나폴레옹은, 잠자리 삼아 잔 소파에서 그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오늘 미래의 이삭의 민족 작가님들이 오시는 날이란 말이야. 빨리 준비 안하면 늦겠어.”

“그냥 니 밑에 사람 보내면 되는 거 아이가? 꼭 니가 나가야 되나?”

“어허, 사업가한테 첫인상이 얼마나 중요한데. 내가 나가서 얼굴도 좀 비춰주고, 격려 겸 말도 좀 길게 늘어놔야 ‘아, 여기 입사하길 잘했다!’하는 거라고.”

“허, 무슨 장광설을 늘어놓으려고.”

“궁금하면 같이 가보던가.”

“마침 휴일이니 뭐.”

우리 두 사람은 서둘러 마차를 잡아타고 우리 신입 작가지망생들이 기다리는 르 아브르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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