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2화 돈, 돈, 돈 (6) (222/341)

돈, 돈, 돈 (6)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이걸로 세례는 끝났소. 이제 하늘에 계신 주님과 성모께옵서 이 기물의 앞날을 기꺼이 축복해주실 것이오.”

비오 6세는 내게 뭐라 할 말이 있는 듯이 입술을 움직이려다가, 한숨을 살짝 내쉬고는 날 향해 카드 뭉치를 내밀었다.

“여기. 받으시오, 재상.”

“아이고, 성하. 감사합니다요.”

세례 때문에 성수와 성유(聖油)가 발린 지라 손이 축축해졌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이걸로 이번 이탈리아 행의 목적은 다 달성한거나 마찬가지인데.

“마이, 마이 프레셔스...”

“···오, 주여.”

거 봐라, 우리 교황님께서도 너무 기쁘신 나머지 하느님께 직접 직통으로 감사를 전하고 있으시지 않은가.

하늘에 있는 주님도 나중에 코흘리개 꼬맹이들이 교황청에서 공인한 카드에 적힌 효과들 때문에 제들이 알아서 글자를 배우려고 드는 걸 보신다면 우리 교황님을 그 분의 옥좌 옆에 모셔둘 지도 모른다. 잘됐네, 잘됐어.

이제 최종단계에 접어들 차례다.

***

사장님이 근 3년 만에 프랑스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서 간밤에 파리에서 르 아브르까지 마차를 잡아타고 달려온 플로리앙은 제 미간을 두 손으로 꾹꾹 문지르며 뇌까렸다.

“당최 이해가 안 가는데요?”

“엥.”

엥은 무슨 엥. 이 빌어먹을 사장님 같으니. 어릴 적부터 착착 프랑스 고등교육과정을 밟아온 일반인인 플로리앙의 뇌구조로는 도저히 이 인간을 이해하려해도 할 수가 없다.

“그래요, 카드를 팔아먹겠다! 좋습니다! 그런데 대관절 생쥐스트와 사드 그 두 사람은 왜 필요하단 겁니까?”

“왜냐니요. 그냥 턱-하고 내놓으면 그 카드를 누가 사겠습니까?”

“트럼프 카드는 다들 사잖습니까.”

“에헤이, 그건 할아버지 할머니 어렸을 적에도 하던 전통놀이니까 그런 거고요. 사람들로서는 지금 우리 걸 살 이유가 없다 아닙니까, 살 이유가.”

“살 이유라니요?”

사장님은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리고는 태연하게 궐련을 입에 꼬나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꼬물거리던 애기 때부터 숱하게 접해온 트럼프 카드, 그리고 난생 처음 보는 그림하고 글자들이 적혀져 있는 해괴한 카드. 뭘 살 지는 딱 정해져 있는 셈이죠.”

“사장님,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사업을 철수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여태까지 들은 걸로는 괜스레 지금도 부족한 인력만 갉아먹으면서 그렇다고 리턴이 확실한 것도 아닌 일거리 아닌가.

그러나 사장님은 고개를 가로로 두어 차례 흔들더니, 성냥을 꺼내 궐련에 불을 붙인 뒤 답했다.

“사람들이 우리 카드를 친숙하게 여기도록 만들면 얘기가 달라지죠.”

“어떤 수로요?”

“어릴 적 베갯머리에서 부모님들이 들려주던 오래된 전설이라던가, 귀에 딱지 앉도록 들었던 성경책 내용이라던가. 그런 거 있잖습니까.”

어디서 본 듯, 어디서 들어본 듯 한 친숙한 내용들을 담은 카드. 사장님은 연기를 후-하고 내쉬면서 덧붙였다.

색상, 성능, 값까지 다 똑같다고 봤을 때 사람들은 친숙한 물건을 처음 보는 물건보다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기존에서 쓰던 물건이 있다면 어마어마한 성능 차이가 나지 않는 이상엔 새 제품을 꺼려하는 경향까지도.

괜히 기업들이 처음 제품을 만들었을 때 돈을 어마어마하게 퍼붓는 게 아니다. 자동차 회사는 무료로 시운전 및 드라이브 기회를 제공하고, 식품회사는 무료 시식회를, 전자기기 회사는 보조금을 듬뿍듬뿍 얹어 주는 게 아니란 말이지.

그래서 문제였다. 과연 내 카드들을 ‘지금’ 가판대에 올려놓았을 때 잘 팔려나갈 것인가. 과연 사람들이 난생 처음 보는 특이한 놀잇감을 위해 은화 한 닢을 던져주겠는가.

수익 모델이야 좋다. 한 번 카드를 사면 잃어버리지 않는 이상 또 살 이유가 없는 트럼프 카드와 달리, 새로운 카드를 발매할 때마다 사람들이 사가는 21세기 수익모델이니 안 좋을래야 안 좋을 수가 없는 일.

내 23년 듀얼리스트 인생을 걸고 내가 만든 카드들이 재미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꼬맹이 시절에 열광하던 화이트 매지션이니, 푸른 눈의 흑룡이니 하는 선망의 대상을 다 때려 박았는데 재미가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지. 와! 킹짱룡! 와! 마법사!

그러니 언젠가는 입소문을 타 알음알음 수익이 나오기 시작할 거다. 다만 그게 느리다는 게 문제겠지만.

나는 다 피운 궐련을 마차 창밖으로 툭-던지며 말했다.

“그러니까 작가님들 좀 굴려봅시다, 플로리앙 씨. 스토리는 내가 대강 짜놓은 게 있으니 글 쓰는 재주만 있으면 됩니다.”

18세기, 이 시대의 연예인은 곧 작가들이었다. 미라보 그 양반만 해도 글 쓰는 걸로 이름을 얻고 그 인기에 힘입어 국민의회 의장까지 했던 사람이니, 잡지에 자기 이름 걸고 밥을 벌어먹을 수 있다는 건 21세기로 따지면 인스타 셀럽이라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면 작가도 있겠다, 그리고 잡지도 있겠다. <포브스>에다가 대강 면 하나 추가해서 카드 게임에 담긴 스토리를 풀면 얼마나 효과가 좋겠나.

게다가 프랑스 전국에 퍼져있는 사제님들, 지금쯤이면 교황청에서 날아온 우편을 다 한 번 씩은 받아보셨을 텐데, 우리 사제님들이 직접 <포브스>와 카드를 들고 살아있는 홍보간판이 되시지 않을까? 이야 이거 지폐를 가져다가 욕조도 가득 채우겠다.

“이제 무슨 말씀인지는 이해했습니다만, 지금 당장엔··· 어렵습니다.”

그러나 플로리앙 씨는 도저히 안되겠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기존에 쓰는 잡지 두 부에, 취재, 거기에 사장님의 그··· 스토리까지 쓴다면 아마 과로로 쓰러지지 않을까요?”

“흠.”

그건 좀 곤란한데.

“새로 사람을 좀 고용해야겠군요.”

“쓸 만한 작가를 구하려면 인건비가 꽤나 나갈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안 그래도 요새 잡지 시장 경쟁이 어마어마합니다. 잡지 수만 지금 거의 100개가 넘어가요.”

그으으으러면 진짜 곤란한데. 프랑스에서 너무 오래 떠나 있었나? 플로리앙 씨의 말에 눈앞이 아찔하다.

하기야 이미 박 터지는 경쟁에서 검증된 귀하디 귀하신 몸을 모시려면 그만큼 돈이 깨지긴 하겠지. 이걸 극복하려면 샘성처럼 대학교나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지원을 넣어 자기 입맛에 맞는 인재들을 육성하는 수밖에 없나.

아예 이참에 똘똘한 어린 학생들 데리고 학교 비스무리한 걸 만들어봐야 하나. 어째 하나를 해결하면 하나가 또 튀어나온다.

“어쩔 수 없죠, 정식 계약 대신 파트타임으로 웃돈 주고 잠깐 씁시다. 그런데 플로리앙 씨. 실력은 출중한데, 배경 때문에 기회를 살릴 수 없는 그런 사람 없을까요?”

“그렇게 말씀하셔도··· 요즘 세상엔 여자들도 맘만 먹으면 잡지에 투고하는 세상인데요. 심지어는 이번에 결혼 대신에 동거를 활성화하자는 사람도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맞지. 올랭프 드 구즈(Olympe de Gouges)였나? 그 아줌마는 이번에 국민의회 의원도 하는데 뭐.

···그런데 말이지. 외국도 우리랑 똑같던가?

“마이어 로스차일드 씨는 아직 영국에 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좋네요. 우리 틀니딱딱 가톨릭 꼰대의 나라는 제압했으니 지팡이 짚고 다니는 국교회 꼰대의 나라도 한 번 구워삶아 봅시다.”

***

1798년 초.

프랑스. 파리.

“···파라오? 성지를 수호하러 원정을 떠나는 빛의 기사단?”

“아, <포브스>에서 이번에 나온 소설 말인가? 요즘 열기가 뜨거워. 꼬맹이들도 필리프 대왕 대신 빛의 기사단 놀이를 한다니까?”

“허, 그래요?”

“듣기로는 얼마 후에 그 스토리를 담은 카드를 출시한다던데, 트럼프 비스무리하게 말이지. 인기를 보니까 꽤 팔리겠더라고.”

“흐음. 그래도 뭐, 잠깐 아니겠습니까?”

재미있는 소설이 실린 잡지가 한두 개던가. 잠깐 핫 했다가 또 사라지겠지.

그러나 그로부터 몇 주 후.

“아저씨! 여기 한 팩!”

“사실 앞에서 팩을 까면 쓰레기고 뒤에서 팩을 까면 좋은 게 나오는 거 아닐까?”

“오! 오! <예루살렘의 천공룡>이다! 와아아!!”

“젠장할! 저 놈은 저런 게 나오는데, 난 왜 푸른 눈의 흑룡이 안 나와! 이봐! 다음 팩 내놔! 다음 팩!”

“죄, 죄송합니다만 이미 매진이라···!! 다음에 오시, 으어억!”

“으아아아아!!”

[인민의 벗, 11구에서 폭력사태 발생 집중 취재. ‘앞 사람이 내 카드를 도둑질 해갔다.’]

[이삭의 민족 부사장, 플로리앙 아르몽. 빠른 시일 내에 생산라인 증설하겠다.]

[전직 재무총감 니콜라 드 콩도르세. 새벽 일찍 홀로 한 블록에 있는 카드 매장을 쓸어가···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먹는 법.]

온 프랑스가 광풍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딘가의 시골마을.

“···사악한 파라오 람세스 2세가 그 무도한 군세를 휘몰아 단숨에 하느님의 종 앞에 당도하였지만, 히브리인들을 이끄는 모세는 담담한 표정으로 천천히 자신의 발을 홍해 앞에 내딛었다.”

- 꿀꺽.

이미 수번이나 신부님들 입에서 나온 성경책의 내용이었건만, 오늘은 달랐다. 딱딱한 성경책 그대로의 내용이라기보다는 소설책에 더 가까운 그것에, 사람들은 너도나도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하늘에서 불덩이! 즉, 상대방에게 500의 데미지를 주는 이 <파이어 볼>카드처럼 불덩이가 떨어지고! 상대방으로부터 한 턴 동안 피해를 받지 않는 이 <홍해의 기적>카드에서처럼 바다가 열렸으니!”

“오오!”

프랑스 땅에 살아가는 수많은 사제들은 그 두 팔을 붕붕 휘두르며 오늘도 세일즈에 바빴다.

***

영국, 햄프셔.

- 똑, 똑, 똑.

“예, 나갑니다 나가요.”

국교회 사제복을 차려입은 중년 남성이 서둘러 현관문을 열었다.

“우편입니다. 그 뭐냐, <타임즈 앤 포브스> 한 부랑, 여기. 런던 존 머레이 앤 선즈(John Murray & Sons)라는 곳에서 보낸 편지입니다.”

“오! 드디어 왔구만! 정말 고맙소.”

“그럼 이만.”

우편배달부가 건네 준 신문과 편지봉투를 받아든 남자는, 신문은 대강 탁자 위에 올려두고 서둘러 편지의 밀랍 봉인을 뜯어냈다.

“어디보자... ‘안녕하십니까, 존 머레이 앤 선즈 출판사입니다. 귀하께서 본사로 보내주신 원고는 잘 읽어보았습니다. 그러나 본사가 추구하는 책의 스타일과 귀하의 집필스타일은 다소 차이가 있는 듯 싶습니다. 비록 이번에는 귀하의 책을 출판하지 못했으나···.’ 이런 제기랄.”

자기도 모르게 크게 한숨을 내쉰 남자는 탁자에 던져 둔 신문을 들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2층 복도 첫 번째 방, 사랑하는 일곱 째 딸아이의 이름이 새겨진 방문 앞에 서자 눈이 절로 질끈 감겨온다.

남자는 또 다시 한숨을 내쉬고는 손을 들어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제인?”

- 아버지?

“네 앞으로··· 신문과 편지가 왔구나.”

- 어머!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나봐! 가져다 주셔서 감사해요! 지금 바로 나갈게요!

달카닥.

문이 열리고, 딸아이가 빼꼼 방 밖으로 나와 남자의 손에 들려있는 종이뭉치들을 보고 웃었다.

“어라? 이거 뜯어져있네요? 아버지가 먼저 보셨어요?”

“응? 어, 음...”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날쌘 다람쥐 같은 딸아이가 편지들을 홱 채갔다.

그렇게 1분, 2분. 무거운 시간이 흐르고.

“···아쉽네요.”

“제인...?”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마음이 많이 아플 텐데도 별일 아니라는 듯 행동하는 딸의 모습에, 남자는 가슴 한켠이 아려왔다.

“제인, 이 출판사 놈들 눈이 삔 거지. 네가 결코 못난 게 아니란다.”

“헤헤. 알아요, 알죠. 그런데··· 잠깐 혼자 있고 싶네요.”

“···그래. 마음이 정리되면 내려오렴.”

달카닥.

문이 닫히고, 적막이 깔리자. 남자는 또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일곱째가 상처를 많이 받은 것 같은데, 저녁에는 아이가 좋아하는 비프스튜라도 끓여야겠다.

그렇게 계단을 뚜벅, 뚜벅 두 칸 쯤 내려갔을 무렵.

“아빠! 아빠!!”

“어, 어?? 제인, 괜찮니?”

“저, 이거! 이거 해볼래요!”

[이삭의 민족, 잡지사 문하생 모집. 성별무관, 경력무관, 합격 시 소르본 대학교 문학부 파견.]

딸아이, 제인 오스틴은 아버지가 볼 수 있게 신문을 활짝 펼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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