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1화 돈, 돈, 돈 (5) (221/341)

돈, 돈, 돈 (5)

“자, 따라서 올바른 마케팅에는 일전에 강의했었던 4가지 요소를 통해···.”

- 탁, 탁, 탁.

- 사각, 사각, 사각.

분필이 초록색 칠판을 두들기는 소리. 그리고 그에 맞춰 종이 위에 필기구가 춤을 추는 소리가 강의실을 가득 메웠다.

사람이 내는 소리라고는 두꺼운 안경을 쓴 노교수의 말과 간간히 들려오는 옅은 숨소리 뿐, 그렇게 조용하다면 조용하다고 할 수 있을 법한 강의실 한복판에 손 하나가 슥-하고 올라왔다.

“교수님, 질문 있습니다.”

“오 질문이라! 뭔가요 학생?”

흰머리가 희끗희끗 보이는 노교수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반색했다.

“이전에 말씀하셨던 대로라면 소비자들이 효율을 중시하는 현대 마케팅에서 구시대적인 세일즈의 역할은 상당히 축소되지 않나요? 굳이 아까운 인력을 투입해 직접 방문한다던가 하는 세일즈의 시대는 이제 끝 아닌가 싶습니다.”

“아주 좋은 지적입니다, 이름이?”

“1학년 과대표 임기찬입니다.”

“좋아요. 기찬 군, 오늘 수업 끝나고 잠깐 제 연구실에 들렀으면 좋겠군요.”

“···예?”

어라. 시발. 이거 뭔가 잘못된 거 같은데.

어찌된 게 째깍째깍 시간이 흘러갈 때마다 사형을 기다리는 사형수마냥 가슴이 섬짓섬짓해진다.

“정각이군요.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다들 주말 재밌게 보내시고, 월요일 1교시에 봅시다.”

“““수고하셨습니다. 교수님.”””

그렇게 필기노트와 태블릿PC를 주섬주섬 가방에 쑤셔 넣고 뒷문으로 나가려는 찰나.

“기찬 군?”

“예, 예?”

“하하하, 지금 어디가나요? 어서 따라오세요.”

“옙.”

교수님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오르자, 저 멀리 교수님의 성함 세 글자가 또박또박 적혀있는 연구실 문이 보인다.

“들어오세요.”

“옙.”

손가락을 한 번 튕기면 A+가 D-로 바뀌는 마법을 부리시는 분께 내가 무슨 저항을 할 수 있겠나, 일단 먼지가 안 된 거에 감사, 또 감사 해야지.

“차 좋아하나요? 아니면 커피?”

“···커피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하, 나도 커피 좋아하는데. 이거 저와 기찬 군 사이에 접점이 많네요?”

“···하하.”

“자, 여기 커피에요.”

“감사합니다아...”

좆 됐다. 이거 아무리 봐도 빠져나갈 구멍이 안 보인다.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 나머지, 나는 얌전히 교수님이 건네는 믹스커피를 받아 호로록-하고 목 뒤로 넘겼다.

음, 이 맛 굉장히 안정적이야. 모카골드인가?

“아까 질문 말인데.”

“쿨럭!!”

바로 본론이라니, 조금은 마음의 안정을 취하게 해주세요.

그러나 교수님은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계속 이어 말씀하셨다.

“기찬 군, 예전에 샘성 부회장을 맡았던 최지성이란 분 아시나요?”

“처음··· 듣습니다만...”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세요? 아니! 입맛은 왜 또 다지시냐고!

***

- 생각할 시간에 일단 들이박고 생각해도 늦지 않다.

최지성 부회장.

몸둥아리 하나만 들고 독일로 건너가 단 3년 만에 매출 0원이었던 유럽 반도체 사업부 연매출을 1억 2500만 달러까지 끌어올린 괴물. 심지어 3년 간 해당 사업부에는 최지성 본인을 제외하고는 직원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말도 안 되는 성장 속에는 독일 전화번호부를 통째로 외워버리고, 하루에도 에스프레소를 수십 잔씩 빨며 직접 반도체를 실은 트럭을 몰아 수천 곳이 넘는 전자회사에 찾아간 그의 괴물 같은 일화가 들어 있었다.

물론 말년은 정치에 엮여 좋지 않았지만 상경계 학생이라면 그를 모를 수가 없단 말이지.

그래서 내가 직접 이 머나먼 이탈리아까지 왔다. 그 괴물 같은 사람처럼 100퍼센트 따라하지는 못 하더래도 따라는 해 볼 수 있는 거 아닌가.

어차피 나한테 있는 거라곤 악이랑 깡 밖에 없다 이 말이야. 파산을 앞둔 경영자는 뭐든 할 수 있다고.

“···그러니까 지금, 재상은, 교황인 내가 그 카드에 세례를 하길 원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만.”

“···진담이오?”

그럼 진담이지 건담이겠냐.

내 얼굴을 읽은 비오 6세는 아찔하다는 듯 말했다.

“···이것 참, 당혹스럽구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잠시 말없이 허공을 쳐다보더니, 손짓을 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신부, 경비병 할 것 없이 모두 물렸다.

“기욤 재상.”

“예, 성하.”

“이제 엿들을 사람이 없으니 다 털어놓아 보시오. 무얼 원하는 게요?”

“뭘 원하다니요?”

“아비뇽을 원하오? 좋소, 주겠소! 어차피 갈리아 땅에 있는 곳이니 가타부타 무슨 말을 하겠소. 혁명정부가 가져간 사제들의 부정한 재물에 대해서도 더 왈가왈부 하지 않으리다!”

워, 이 아저씨 평소에 속에 쌓인 게 많았나? 주변에 심리상담사라도 하나 놔드려야겠어요.

늙은 교황은 이제 이탈리아인 특유의 격정적인 제스처까지 취하면서 내게 쏘아붙였다.

“그러나 성직자 민사만은 절대 내줄 수 없ㅅ···!”

“성하, 무슨 말씀인지는 모르겠지만 전 제가 한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습니다.”

나는 품속에서 종이를 포장지 삼아 싼 카드 뭉치를 내밀며 말했다. 교황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그게 정말 진담이었소?”

“아까부터 진담이라고 했습니다만.”

“그렇, 구려.”

방금 전까지 투지로 활활 타오르던 교황의 몸이 바람 빠진 풍선마냥 흐느적거렸다.

“세례라, 세례. 못할 것도 없지. 그 전에 하나 물어봐도 되겠소, 재상?”

“뭐지요?”

“그 카드 쪼가리에 대관절 내 세례가 왜 필요한 것이오?”

“뭐어...”

뭐라고 하지. 그냥 날 것 그대로 뱉을까? 돈 같이 버실 생각 없으신가요-라고.

아니면 조금 립서비스를 해줄까. 이게 다 가톨릭 세계의 진일보와 주님, 성모님을 위하여-쏼라쏼라.

음. 역시 전자가 나을 것 같다.

잠시 눈앞의 노인의 정신 건강을 위해줄까 싶었지만, 어차피 빨간 약 먹을 텐데 미리 맞는 게 낫지 않을까?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하지 않는가.

“성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우리 가톨릭 사제들께서는 성경의 언약궤를 지키시기 보다는 제 사리사욕을 담은 금고를 지키는데 더 많은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까.”

“지금, 그게 무슨 말이오!? 그건 가톨릭 전체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소!”

“그렇다면 제가 압수한 교회재산 30억 리브르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건, 그러니까 주(主)가 아닌 일부의...”

“일부가 아니었으니까 전국적으로 혁명이 터졌겠죠?”

“···.”

기선제압치고 너무 아픈 곳을 건드렸나. 교황님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런. 안 그래도 나이 많으신 거 같은데 이러다가 고혈압으로 쓰러지면 내가 너무 개새끼가 되는 거 아닌가.

“성하, 제가 방금 전에는 조금 공격적으로 말했습니다만, 전 교황청을 적대하고픈 생각은 맹세코 없습니다. 다만··· 뭐랄까요. 성경에서 주님이나 예수님이 카드놀이는 사탄의 놀이라는 말을 한 적 없는데, 우리 사제님들께서는 게임에 무척이나 노발대발하시지 않습니까.”

도박 하는 걸 잡으면 뭐라고 하지도 않지. 귀족들이 돈 걸고 카드 칠 때는 스리슬쩍 같이 껴서 카드 치다가, 서민들이 심심풀이로 카드 칠 때는 엄격, 근엄, 진지해져서는 ‘네 이놈! 감히 사탄의 놀이를 하다니! 꾸짖을 갈!’하면서 훼방을 놓으시지 않나.

“···그래서 지금 그런 일이 없게 카드에 세례를 해달라는 게요?”

“그렇기도 하고.”

“그렇기도 하고?”

“부차적인 목적도 있지요.”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

처음 신부서품을 받고, 교황이라는 자리에 오르기까지.

비오 6세는 그 생애 동안 결코 험한 말을 입에 담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인간은... 정말 미친 것 아닌가?

“카드 팩 당 판매 수익의 0.1퍼센트를 교황청에게 드리지요.”

“수익을 나누자니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우리 사제님들, 아 정말 말이 많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교황님께서 아무리 신실하고 참된 복자라 한들, 밑에 있는 몇몇 사제들은 탐욕스럽지 않습니까. 그것마저 부정은 못하시겠지요?”

“···그렇소.”

“그래서 제가 지금 제안해 드리는 겁니다. 제가 나눠드리는 수익 가지고 교황청에서 신부들에게 직속으로 월급을 꽂아주는 거죠.”

교황청이 사제들에게 월급을 꽂아준다. 본래 월급쟁이들은 돈 주는 사장에게 굽신굽신 거리는 법. 그렇게만 된다면 적어도 사제들에게 실추되었던 교황권이 어느 정도 힘을 되찾을 것이다.

“왜 내게 그런 제안을 하는 거요? 도대체 거기서 재상이 얻어갈 이익이 뭐가 있다고?”

“뭐랄까, 아. 개를 한 번 생각해보시겠습니까?”

“···개?”

“개라는 동물은 아주 영리해서, 자신에게 밥을 주는 주인과 이방인을 아주 잘 구별한다고 하지요. 주인은 절대 물지 않고, 침입자는 물어버리니 말입니다.”

“지금, 지금 우리 사제들을 개라고 빗대는 거요?”

“아니요. 전 생산하는 건 쥐뿔도 없으면서 사리사욕 채우기에 급급하여 서민들 등골이나 빼먹는 주제에, 교황이 내린 말은 내팽겨치고 이상한 잡변이나 늘어놓는 쓰레기들을 빗댄 겁니다만.”

그리고 그 쓰레기들은 특유의 약삭빠른 눈치 덕에 제들 배를 채워주는 사람은 절대 공격하지 않지요. 젊은 프랑스인은 덧붙였다.

“전 그 쓰레기들에게서 해방되고, 교황님은 교황권을 굳히실 수 있고, 윈윈 아닙니까.”

“···그런 신성모독 같은 말을 빵빵 내뱉다니... 귀하는, 죽어서 심판대에 서는 게 두렵지 않소?”

“제가 한 번 죽어봤는데, 그런 건 없더랍니다.”

“허.”

비오 6세는 그제서야 눈앞의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이 인간은 그냥, 그냥 제 앞길을 막는 걸 치울 뿐이다. 청소부가 먼지를 쓸어버리듯 별 감정도 없이 치워버리는 것이지. 아직까지는 수단이 많이 얌전할 뿐, 회까닥 돌아버리는 순간 무슨 짓을 할까.

그렇게 비오의 머리가 복잡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을 무렵, 젊은 프랑스인은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다가 말했다.

“아, 그리고 너무··· 정치적으로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성하.”

“···?”

“그 뭐냐, 성직자의 본래 역할은 복음을 전하고 서민들을 교육하고, 또 구휼하는 거 아닙니까.”

“···그렇소.”

그는 예의 그 카드뭉치를 들어올렸다.

“근데 이게 또 애들 까막눈 퇴치하는 데에는 직빵이랍니다? 와! 우리 애들이 알아서 알파벳을 배우려고 하다니! 이것 참 놀랄 노자!”

“···그래서?”

“그래서라니요, 성하. 우리 교황청에서 공인한 공식 -사탄의 마수에서 유일하게 벗어난 카드- 들이 곧 우리 아이들 까막눈을 퇴치해줄 텐데요. 기쁨의 춤이라도 추셔야죠!”

도저히, 도저히 대화의 템포를 따라갈 수가 없다. 방금 전까지는 리슐리외 같은 철인 아니었나? 철인은 순식간에 광대로 변해 있었다.

“아, 혹시 카드가 마음에 안 드시면 언제든지 얘기해주십시오. 카노사의 승리라던가, 아니면 여리고의 나팔이라던가, 성하께서 만들고 싶은 카드가 있으면 바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경의 뜻대로 하시오.”

결국 비오는 두 손을 번쩍 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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