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돈, 돈 (2)
“이건 뭐... 보통 난리가 아닌데.”
“허허, 그럴 만도 하지요. 손님.”
“···그렇습니까?”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던 남자는, 앞에서 들려오는 마부의 말에 고개를 돌리며 되물었다.
“아이, 그러문입죠 손님. 난생 처음으로 정치인을 우리 손으로 뽑아보는 건데, 다들 흥분되지 않겠습니까요. 적어도 앞으로 한 달 간은 계속 이럴 겁니다.”
그렇게 얘기하고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마부의 말마따나, 창밖에 스쳐지나가는 파리의 시가지엔 온통 사람들로 발 디딜 틈 하나 없었다.
삼색기나 적기를 흔들며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는 청년들이 한 움큼 있노라면, 그저 축제분위기에 들떠 거리에 가족들과 함께 거리에 나온 사람들이 또 한 움큼 있었고, 커피숍에서 정장을 차려입고 신문을 읽어 내려가다가 간간히 옆 테이블 사람들과 토론을 하는 신사들이 한 움큼 보였다.
나름 볼만한 광경이었다.
그렇게 넋 놓고 풍경을 구경하다보니 마차는 어느새 목적지까지 다다랐고, 남자는 품 속에서 지갑을 꺼냈다.
대강 한 시간 쯤 달렸으니, 요금으로는 1 리브르 정도 될까.
“무사히 태워다줘서 고맙습니다. 여기 삯입니다.”
“어유, 감사합니다요.”
남자는 1 리브르 짜리 지폐 대신 거스름돈으로 가지고 다니던 은화 동전 네 닢을 마부의 손에 들려주고는 사뿐히 좌석에서 내려왔다.
옛날에 쪼들리고 살았던 기억 때문인가, 고권 지폐는 남 주기가 싫었던 탓이었다.
길을 건너 대리석으로 입구를 장식한 건물 앞으로 다가가자, 경비를 서던 위병들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무슨 용무십니까?”
“반갑네. 오늘 세 시에 사령관님과 면담이 잡혀있는데. ···한 번 확인해주겠나, 제군?”
“예, 바로 확인해드리겠습니다. 장군님.”
금색 견장을 본 위병 중 하나가 잠시 수첩을 뒤적거리더니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말했다.
“보나파르트 준장님. 바로 사령관님께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주 고맙네.”
철옹성 같은 입구가 열리고 위병의 뒤를 따라 층계를 올라가자, 낯익은 얼굴이 반겨준다.
“아, 보나파르트 준장. 딱 맞춰 잘 왔습니다.”
라파예트 사령관은 환하게 웃으며 나폴레옹에게 어서 자리에 앉으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나란히 자리에 앉자, 시중을 드는 고용인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탁자 가득 다과상을 차려주었다.
라파예트는 잔을 들어 목을 축인 후 말을 시작했다.
“우선 툴롱에서 파리까지 먼 길 오느라 수고했습니다.”
“아닙니다. 사령관님께서 부르시는데 당연히 와야지요.”
“···귀관, 안 본 사이에 사투리가 많이 줄었습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음. 아침마다 거울에 대고 아-에-이-오-우를 한 덕이 있구만.
나폴레옹은 내심 뿌듯해하며 되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절 부르신 겁니까, 사령관님?”
“귀관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고 싶어서 말입니다.”
새로운 기회라? 이미 기회는 차고 넘칠 정도로 받은 나폴레옹 아닌가. 그런 자신에게 새로운 기회라니?
“죄송합니다만,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국가방첩대 부사령관 자리가 비어있습니다, 보나파르트 장군.”
국가방첩대? 그러니까, 파리 보안사령부 말하는 건가?
“얼떨떨한 얼굴이군요.”
“그렇, 습니다.”
라파예트는 엷게 미소를 띄곤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제가 봤을 때, 귀관의 야전경험은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글쎄요.”
“자신 있게 말해도 좋습니다. 지금 귀관의 나이 또래 중 귀관만큼 야전 경험을 착실하게 쌓은 친구는 없으니까요.”
아미앵, 그 다음은 코르시카. 두 번이나 대규모 회전을 경험해본 지휘관이 그렇게 많던가.
“지휘관은 전장에서 병사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야합니다. 병사들의 사기가 어떠한지, 적의 형세에 비해 아군의 형세는 어떠한지. 매우 중요한 일이지요.”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훌륭한 지휘관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라파예트는 덧붙였다.
“지난 두 번의 전투에서 보나파르트 준장에게는 기욤 총감이 따라다녔지요?”
“그렇습니다만.”
“꽤 공신력 높은 사람에게 전해 듣기로는 보나파르트 준장이 기욤 총감에게 보급 같은 일체의 잡무를 떠 맡겼었다는데 맞습니까?”
아니, 그게 대체 어디서 새나간 거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파리에서 근무하는 라파예트 옆에서 온갖 말을 늘어놓을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아. 그루시 행님, 또 니고?
“···그, 그것이.”
“귀관을 책망하려는 건 아닙니다. 사람 목숨이 오가는 전장에서 일을 더 잘 처리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건 당연하지요. 허나.”
라파예트는 나폴레옹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훌륭한 지휘관은 단순히 전선에서 군을 지휘하는 것 뿐 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병사들이 얼마만큼의 식량을 소모하는지, 또 손망실 되는 총기는 몇 정인지, 보급로를 어떻게 짜고, 후방에서 준동하는 적들에게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할지. 그 모든 것을 할 줄 알아야 비로소 훌륭한 지휘관이 될 수 있는 겁니다.”
“···.”
“이제 제 나이가 마흔입니다, 보나파르트 준장. 미라보 의장이 판테온에 묻힐 때 오십 살 남짓이었으니, 어떻게 보면 제가 팔팔하게 살아있는 것도 앞으로 10년 뿐이겠지요.”
그러니까 젊고 능력 있는 유망주에게 경험치 물약을 달달하게 부어주겠다. 라파예트의 뜻은 간단했다.
“국가방첩대 부사령관이란 감투는 굉장히 좋은 자리입니다. 일전에 뒤무리에 총독도 젊은 시절 거쳐 간 엘리트코스지요. 전선이 아니라 후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어떤 능력이 필요한지 상세히 알아갈 좋은 기회입니다.
어떻게, 관심 있습니까?”
세상에. 처음에는 제대 희망서를 써야하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건 특급 동앗줄이었다. 현직 최고위 군사령관이 직접 내려주는 밧줄? 아, 이걸 어떻게 참나.
“물론입니다, 사령관님!”
“아주 좋습니다, 보나파르트 장군. 자, 이제 일어나지요. 안면도 틀 겸 해서 앞으로 장군과 합을 맞춰 나갈 방첩사령관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예, 사령관님!”
라파예트 사령관을 따라 잠시 걸은 뒤 도착한 방 앞에는 말끔하게 생긴 노신사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노신사는 라파예트와 나폴레옹을 번갈아 보더니 라파예트에게 말했다.
“조카님. 이 자인가?”
“예, 숙부. 제가 말씀드렸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준장입니다.”
“흐음. 그렇군.”
노신사는 잠시 턱을 쓸어내리더니 나폴레옹을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반갑소. 방첩사령관 프랑수아 클로드 아무르 드 부이예(François Claude Amour) 소장이라고 하오. 조카님이 귀관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던데, 모쪼록 앞으로 좋은 파트너가 되었으면 좋겠구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준장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장군님!”
***
1797년 2월.
프랑스령 미네소타.
이 미네소타가 참 좋은 게 뭐냐면, 얼음이 아아아아주 흔하다는 거다.
아직 21세기의 황사조차 없는 지금, 대충 밖에 나가서 삽으로 얼음 좀 깨다가 커피랑 홍차에다가 투척하면 수타벅스 뺨치는 시원한 아이스 커피와 아이스 티가 된단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음료수에 얼음을 넣자, 어떻게 이 추운 날씨에 그런 미친 짓을 할 수 있느냐는 듯 이상한 눈빛으로 날 봤지만, 뭐. 어떻게 해? 이미 철원그라드와 서울크바로 단련된 한국인의 얼을 가진 난 영하 10도 정도야 껌인걸.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너희들이 약한 것이다. 이 나약한 양놈들아.
···아, 나도 양놈인가?
아무튼 오늘도 여김 없이 얼음을 한 국자 퍼서 홍차에 투척한 나는, 오늘 아침 배달된 신문을 쭈욱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일전에 말했던 것처럼, 시에예스 사제님과 로베스피에르 두 사람은 모두 불출마. 그 덕에 평원파는 제롬 페시옹(Jérôme Pétion de Villeneuve), 산악파는 조르주 쿠통(Georges Auguste Couthon)과 파브르 데클랑탱(Fabre d'Églantine)이라는 두 사람이 주축이 되어 의회를 이끌기 시작했다.
뭐 말이 그렇지, 사실상 시에예스 사제님과 로베스피에르 모두 막후에서 당수를 맡아 의회에 어느 정도 영향력은 행사할 테니 그렇게 막 정세가 변한 건 아니다.
그 외에도 앙드레 기조(François Guizot)니, 조제프 푸셰니 하는 의원들이 당선.
누구냐고? 나도 몰라.
애초에 입법의회 시절 의원들이 아니니까 내가 의회에서 마주칠 일도 없었다고.
아, 제롬 페시옹이란 사람은 안다. 그 뭐냐, 콩도르세 국장님 친구고 나랑 일전에 밥도 한 번 먹어본데다가, 파리에서 열심히 구르고 있는 우리 알렉상드르 페시옹 과장을 우리 회사에 추천해준 게 저 아저씨거든.
심지어 페시옹 씨의 이름도 저 아저씨 이름을 따다 만들었을 만큼 흑인들의 인권에 여러모로 관심이 높고 그만큼 흑인들이 입장에서 고마운 사람이기도 했다. 이렇게 보니 좋은 분이 당선됐구만. 잘됐군 잘됐어.
의원 당선 란을 넘기자 이제 행정부 얘기가 나온다.
음, 뭐. 적당히 갈라 먹었네.
내무부와 경찰, 법무부 등은 산악파의 좌익계가 가져갔고, 외무부와 전쟁부, 재무부 등은 평원파의 우익계가 가져갔다.
그 중에서도 재무총감은 끝까지 경쟁자 없이 빈 공간이었다가, 카르카손 법원장과 은행장을 맡던 평원파의 도미니케 뱅상이라는 사람이 당선되었고. 이건 즉, 양당이 시발 편먹고 날 저 자리에 박아 넣을 생각이었다는 거다.
이 인간들 진짜로 내가 프랑스에 발만 디디면 납치해다가 황금-행정 옥좌에 안치시킬 예정이었어.
절로 오한이 들고 입이 바짝바짝 말라 난 내가 만든 특제 아이스티를 한 모금 더 삼킬 수밖에 없었다. 크으 이 맛이지.
그래도 속을 좀 졸였던 거에 비하면 나름 파리와 베르사유 상황이 나쁘지 않아서 다행이다.
나쁜 게 내 상황이여서 문제지.
나는 신문을 저리 치우고 속속들이 도착한 이삭의 민족 회계보고서를 슬그머니 다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파리에 있는 우리 회계팀이 불철주야 고생해서 내 앞으로 올려 준 이 보고서에는 리치왕의 서리한처럼 끔찍한 저주가 붙어있는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걸 펼칠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게 말이 안 된단 말이야.
<1797년 2분기 예상 당기순이익>으로 시작되는 목차를 넘기자, 척 보기에도 아슬아슬하게 이익의 대변과 손실의 차변이 교차한다. 흑자긴 하지만 이 정도면 플러스마이너스 0이나 다름없다.
다음 보고서, 3분기 예상 보고서를 펼치자 대번에 머리털이 숭숭 빠지는 기분이다. 죄 빨간불. 이젠 손실이 이익을 조금씩 뛰어넘기 시작했다는 거지.
아직까지는 괜찮다. 내가 현금자산으로 쌓아놓게 존나게 많거든.
우리 영국 왕립해군은 날마다 내가 만든 PX에서 생필품을 쓸어가 주시고, 이제 프랑스, 영국, 미국 3개국에 지사를 낸 우리 이삭의 민족의 근본, 간편식사 판매도 굳건하다.
영국 런던에선 날 따라한 놈들이 우후죽순 생기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런 놈들은 나와의 치킨게임 앞에 다 뒤져나갈 뿐. 어딜 따라하려고 해? 이 새끼들아.
그 외에 멀미약도 계속해서 팔려나가고 있으니 들어오는 수익은 모두 건실하기 그지없다.
문제는 이 철강업이라는 게 풍혈을 쓴 것마냥 그 모든 현금을 호로로록 뽑아 먹고 있다는 거지.
지금 강철을 뽑아내도 뽑아내는 족족 맨땅에 철도 만드느라 때려 넣으니 이걸 가져다 팔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서 빨리 공사를 끝내야 가져다 팔 거 아닌가.
“앞으로 완공까지 1년인데, 버틸 수 있으려나?”
버틸 수는··· 있겠지. 그런데 버틴 후에는 배때기에 구멍 몇 개 나서 내장이 흘러나올 거고.
현금이 필요했다. 그것도 아주 막대한.
나는 오늘 아침, 파리에서 도착한 예의 그 보드게임을 꺼내 탁자에 올렸다.
이걸 어떻게 만들어서, 어떤 식으로 팔아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