칙칙폭폭 (3)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끄으으윽.”
삐그덕 삐그덕 거리는 관절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키자 온 몸이 비명을 질렀다.
뭐지, 뭐 때문이지? 누가 내 몸을 샌드백마냥 후려갈겼나? 아니면 이번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로 환생을 한 건가?
다른 건 몰라도 벌써 지팡이 짚고 다니긴 싫은데. 게다가 그렇게 되면 내 나이는 이제 몇 살로 쳐야 되는 거지?
좋다. 헛소리가 잘 나오는 거 보니 슬슬 정신이 돌아올 때가 됐구나.
나는 가까이 있는 의자를 끌어다가 앉은 후, 주위를 둘러보았다.
“끄으으... 물... 무우울.... 누가 물 좀 줘...”
“구아아아악...”
“쿨, 쿠울.”
흠. 내가 언제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시체들을 직원으로 고용한 거지.
다들 나무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조금씩 움찔거리는 게, 어젯밤에 성공 기념으로 너무 달렸나 싶다.
아. 그게 아니면 설마 나한테 환생 특전으로 부두술사나 사령술사 같은 특성이 있었나?
“거기 누구 없습니까?”
“예, 사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술 냄새가 진동하는 방문을 열고 내가 나지막이 말하자, 기다렸다는 듯 사환 한 명이 튀어나왔다.
“제가 어제 만들어놓으라고 한 건 준비됐습니까?”
“예, 사장님. 조리장에 있습니다.”
“좋네요. 30분만 있다가 통째로 가져와주십시오.”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지끈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일어난 직원들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말했다.
“···사장님?”
“옙.”
“이게 대체 무슨 스픕니까? 허여멀건 해가지고...”
뭐긴 사골국이지 이 양놈들아.
나는 크게 한 국자 떠서 트레비식 씨의 접시에 덜어주며 말했다.
“해장에 좋은 스프입니다. 르무야쥐 비슷한 거니까 먹어도 괜찮습니다.”
“예에...”
뭐야 그 마지못해 먹는다는 얼굴은. 하여간에 영국인 아니랄까봐, 그러지 말고 마 함 무바라 이거 디진다 아이가.
“···냄새는 좋은데.”
“하기야 맛없기밖에 더하겠어?”
“후르릅.”
결국 우리 직원들은 내가 준비한 스프를 한 사람 한 사람 차례차례 목 뒤로 넘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 같이 익숙한 얼굴을 짓기 시작했다.
“크어어어어.”
“뻑 예.”
저 얼굴, 많이 본 얼굴이다. 전날 소주 깐 아저씨들이 해장국집에서 첫 술 뜨고 짓는 표정이다.
“어떻습니까?”
“어떻기는요, 이야 이거 속이 확 풀리는 걸요?”
음후헤헤. 당연하지. 내가 자취하면서 술 꼴은 새끼들 뒤치다꺼리 한답시고 사골국만 몇 번을 끓였는데. 된장하고 고추장이 없어서 그렇지, 그것만 있으면 선지해장국 만드는 것도 쌉가능이다 이 말이야.
맛? 음식에 더럽게 깐깐한 나폴레옹도 내가 끓인 사골국은 해장삼아 잘 먹더라.
그렇게 1시간 여, 다들 그릇을 비운 걸 확인한 나는 손뼉을 크게 부딪히며 말했다.
- 짝, 짝, 짝.
“자, 다들 잘 먹었으면 이제 출근합시다. 출근.”
뭐해 이 인간들아. 먹었으면 일을 해야지. 해야 할 게 산더미라고.
***
강철을 토해내는 현대식 고로의 프로토타입이 완성되긴 했지만, 아직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태산처럼 쌓여있었다.
미네소타에서 해운이 가능한 마을까지 철도를 깔고, 또 육지를 통과해야 하는 곳 마다 철도를 깔고, 또 거기서 루이지애나까지 철도를 깔고...
“누벨 오를레앙에서 생 루이까지는 무조건 연결해야합니다.”
“음. 2호 고로는 언제 또 나옵니까?”
“확실하게는 말할 수 없지만, 대략 두 어 달은 넘습니다.”
“쓰으읍. 어쩔 수 없군요. 뮈라 소령에게 생 루이 일대의 탐사를 맡깁시다. 편도로 3주 정도 주면 되겠습니까?”
“당장에라도 어디 튀어나가지 못해 안달 난 친구니 그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고로가 여러 대로 늘어나기 전까지는 생산된 강철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건 아니니까 꼭 필요한 곳에 필요한 자원을 가져다가 써야한다.
미네랄 한 덩이와 가스 한 덩이로 커맨드센터랑 배럭이랑 팩토리 만들고 남는 돈으로 배틀크루져까지 한 부대 뽑아와-라는 수준의 개 같은 난이도.
그나마 벌쳐를 쓸 수 있다는 게 다행이다. 최소한 맵은 밝히게 해주니 아주 개 같지는 않네.
“더 급한 게 있습니다. 기관차 부품 같이 세밀한 건 지금 미네소타에서 만들기 어렵습니다. 파리에서 서둘러 공수해와야 철도를 깔던 뭘 하던 굴려볼 수 있을 겁니다.”
“그건 미국 쪽 해운회사랑 얘기해보죠. 그 쪽에도 떡고물을 돌려줘야 나중에도 관계가 원만해지지 않겠습니까? 지금부터 안면 좀 터야 나중에 싸바싸바도 해보죠.”
“알겠습니다.”
혼자만 맛있는 거 먹는 사람은 체하기 마련이다. 수업시간에 아파치 까면 옆 자리 짝꿍한테도 하나 주고, 뒷자리 친구한테도 하나 줘야 선생님한테 이르지 않는단 말이다.
게다가 앞으로도 징하게 얼굴 맞대고 살 텐데, 초면에 시루떡이나 무지개떡 돌리면서 ‘안녕하세요, 이번에 옆집에 이사 온 사람인데요.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인사하면 얼마나 좋아.
그러나 이런 모든 골칫거리를 제외하고, 제일 큰 난관은 따로 있었다.
“사장님.”
“예.”
“식량 말입니다만. 이곳 미네소타에서는 재배가 어려울 듯 싶습니다.”
나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하아, 그렇습니까? 뭐 때문이죠?”
“이렇게 추운 날씨에서 농사를 지었다간 농민들이 십중팔구 독감으로 죄 쓰러질 겁니다.”
“···고작 영하 10도인데?”
“고, 고작 10도라니요. 그런 엄동설한을 누가 버틴단 말입니까.”
음, 우리 불란서 프렌즈들은 코리아의 철원그라드를 아직 맛보지 않아서 모르는구나... 사람은 영하 30도에도 말짱히 잘살아 있답니다?
“사장님께서도 아시다시피 1785년 즈음해서 불어온 한파에 프랑스가 박살나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그러고 보니 그 때는 내가 진짜 발바닥에 땀이 나게 뛰어다닌 끝에 겨우 살아날 수 있었지.
“지중해 근방에서 살던 프랑스인들에게 이 미네소타는 너무 혹독한 곳입니다. 말 그대로 살 수는 있으나, 농사까지 지으라고 하면... 글쎄요.”
애초에 의도한 거기도 했지만, 내가 던진 모집공고에 따라온 사람들은 파리나 프로방스 같은 부유한 곳보다는 못사는 서부나 남부 지방 사람들이 많다. 그 뭐냐, 일 년 내내 온화한 지중해 근방 말이다.
봄에는 황사, 여름에는 열대야, 가을에도 황사, 겨울은 한파, 그렇게 나름 각자의 좆같음으로 무장한 한반도에서 자라나, 더위저항 스탯과 인내심 스탯을 꽤 찍은 한국인마저도 에어컨 없이 동남아 가서 살라고 하면 당장에 기함을 할 텐데, 우리 연약한 남부 프랑스인들로서 미네소타에서 농사를 짓는 건 너무나도 무서운 일이다.
“하지만 어떻게 합니까? 식량을 배로 운반하는 순간에 유지비가 배로 들 텐데. 더 비용을 댔다간 재정이 불량해질 겁니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말했다.
우리 제철소가 꾸준하게 석탄을 때줘야 움직이듯, 사람은 배때기에 꾸준히 밥을 넣어줘야 움직인다.
이 미네소타에 어떻게 빵을 공급해줘야 잘했다고 소문이 날까.
***
루이지애나, 누벨 오를레앙.
“···나름 살기 괜찮은데?”
한 일 년 살았는데 기온도 따땃하니 좋고, 덕분에 수확량도 사람들이 필요한 것보다 많이 나니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별 범죄 같은 것도 없다.
자연히 총독이라고 해봤자 <1795년 3분기 결재서류> 같은 거에 도장이나 찍을 뿐, 밑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일은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저절로 해결되기 일쑤니 이 무슨 꿀보직이 아니랴.
심지어 총독 급이 직접 나서야 하는 귀찮은 일은 탈레랑 차관과 기욤이 해결하러 다니니, 하도 할 일이 없어 요새는 아예 자그마하게 포도밭이나 일궈서 용돈이나 벌어볼까 하는 생각까지 드는 뒤무리에였다.
- 똑, 똑, 똑.
“오오, 무슨 일인가! 어서 들어오게.”
옛날 같았다면 입을 삐죽 내밀고 ‘나 말고 다른 사람 찾아가지 왜 나한테 옴?’이라 했겠으나 워낙 불러주는 사람도 없고 할 일도 없으니, 오랜만에 자신을 찾아주는 노크소리에 절로 몸이 달아올랐다.
“미네소타에서 총독님 앞으로 간단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기욤 총감이?”
비서에게 편지를 받아들고 밀랍을 뜯어내자, 딱 세 문장이 익히 잘 아는 필체로 쓰여 있었다.
[밀 800톤 당장 필요.
그리고 이번 추수 후 러시아인 포로를 미네소타로 보내주길 바람.
- 기욤 드 툴롱 -]
***
내가 학창시절에 배운 바로, 베트남은 연간 온화하여 벼를 세 번 추수한다고 했다. 루이지애나도 꽤 온화하니 남는 밀 좀 내가 사간다고 굶어죽지는 않겠지.
올해는 이걸로 넘기고 내년은 러시아인들이 와서 농사를 지어주면 된다.
미네소타가 영하 10도라고? 응 러시아는 영하 40도야. 그 동토에서 기어코 밀알을 뽑아내던 양반들이 이 땅에서 못 할 건 없겠지.
그리고 프랑스인을 이리가라 저리가라 하는 건 개인의 인권 침해지만, 포로들이 생활할 곳을 이리가라 저리가라 하는 건 별 말 없을 거 아닌가.
이걸로 대부분의 과제는 해결이 됐다. 이제 남은 건 기다리는 것 뿐. 더 많은 고로가 금형에서 튀어나오고, 더 많은 강철이 뽑혀 나올 때까지.
내게 필요한 건 그 많은 시간을 버틸 인내심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하는 건 인내였다.
***
1796년 1월.
프랑스령 미네소타.
“준비되셨습니까?”
머독 씨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후우, 물론이죠.”
“알겠습니다. 바로 시동 걸도록 하죠.”
- 푸쉬이이이이이익!
압력을 잔뜩 머금은 실린더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고열로 끓어오른 증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뚝 밖으로 뛰쳐나왔다.
꼭 거대한 강철 거인이 누워 담배를 물은 것 같은 풍경에, 나도 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이제··· 앞으로 나가 봅시다.”
“예, 사장님.”
운전석에 탄 기술자가 레버를 올리자, 바퀴를 움켜쥔 기다란 막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륜(動輪)이 힘을 받고, 그걸 후륜과 선륜이 받기 시작하자 거대한 강철마가 몸을 일으켜 선로를 타기 시작했다.
그러나 육중한 무게의 강철마가 몸을 통째로 눕혔음에도 불구하고 강철로 뽑아낸 새 선로는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 치이이익!
어렸을 적, 프랑스 툴롱에서 살던 내가 아닌, 대한민국에 살던 내가 TV에서 들었던 그 소리. 내가 TV에서 보았던 그 모습.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봤던 그 것이, 지금 달리고 있었다.
날 태우고서 달리고 있었다.
“하, 하하!”
“사장님! 성공입니다! 성공이에요!”
“내가 씨발! 된다고 했지! 으아아!!”
기차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상쾌했다.
영하의 온도였지만 살이 에기는커녕 너무 상쾌했다.
수십 년 만에 맡는 매연도, 지금은 싫기보다 너무도 반가웠다. 꼭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난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