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3화 이웃집 (6) (213/341)

이웃집 (6)

“기꺼이··· 라고.”

애덤스는 눈앞의 청년이 한 말을 되뇌더니 바람 빠진 풍선처럼 흐물흐물거리다가 자리에 풀썩-하고 주저앉았다.

그런 자신을 보고, 곁에 있던 의원들의 낯에 당혹스러움이 어렸지만 지금 그런 부차적인 것 따위에 할애할 정신은 없었다.

분명 아까 의사당에 들어올 때, 입구에서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 발언 하나 하나 고스란히 내일 아침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목이 좋은 신문가판대에 올라갈 게 뻔했다.

아직도 독립전쟁 당시의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 있는 친애하는 필라델피아 시민들과 미국인들께서는 ‘거 말 한 번 시원하게 하네!’라면서 이 프랑스인의 이름을 연호하겠지.

이건 사기다. 사기. 프랑스가 정말 파리를 버리고 필라델피아에 10만 명을 파병해준다고 생각하는 멍청이가 이 의사당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시민들 중에는 그걸 정말 믿어주는 멍청이가 있다. 사기란 본디 사기꾼이 돈을 먹고 나르기 전까지는 사기가 아닌 법 아닌가. 멍청이들은 정말로 보스턴 항구에 다시 한 번 영국군 레드코트가 상륙하는 그 날까지 저 프랑스인이 지껄인 약속 하나만 믿고 제 주머니만 채우기 바쁠 테지.

하지만 그건 그것. 이건 이것. 저 한 마디 말로 친불을 당의 기조로 미는 제퍼슨의 민주공화당은 날개를 달고 승천할 것이고, 그 말인즉슨 친영을 당의 기조로 미는 애덤스의 연방당은 추락할 것이다.

그래. 다음 선거엔 민주공화당이 과반을 먹겠구나.

죽마고우까지는 아니더라도 애덤스와 연방당이 꿈꾸던 ‘덜 험악한’ 미영관계의 꿈은 이제 허공에 날리는 티끌 마냥 사라질 거다.

이제는 빈말로라도 ‘영국과 화해’라는 문장을 입 밖으로 꺼내면 ‘님 혹시 매국노? 잉글랜드 개새끼 해봐.’라며 사상검증을 받게 되겠지.

그 뿐인가? 주의 권리를 확대하자는 제퍼슨의 주도 아래 애덤스가 상상하던 이 아메리카 대륙을 통치할 강대한 미합중국, 하나의 강한 정부 아래 단결할 미합중국도 사라질 것이다.

강력한 지휘체계를 갖춘 연방군도, 주들에게 권리를 행사할 연방대법원도 그 잘난 ‘주의 권리 확대’라는 민주공화당의 캐치프레이즈에 밀려 유명무실해질 테지.

그렇다면 이 미약한 국가는 이제 어찌한단 말인가?

비록 허울뿐이나 적의 명분을 거세시킬 외교적 성문 하나 없이, 게다가 하나의 지휘관 밑에서 단결되지도 않는 오합지졸들이 저 강대한 유럽국가로부터 미합중국을 지킬 수 있을까?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보스턴 부둣가에서 구두나 닦는 구두닦이 소년조차 간단하게 말할 수 있으리라.

못 지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지 대가를 지불하여 지킨다면, 아마 막대한 피가 흐르고 나서야 막을 수 있겠지. 그러나 그 정도로 대가를 지불한 뒤의 미국이 과연 정상적인 나라의 모습일까?

오. 신이시여. 제발 이 미합중국을 보우하소서.

애덤스는 아무 말 없이 두 손을 모아 빌고 또 빌었다.

***

- 꼬르륵.

“야.”

“왜.”

“니 배에서 나는 소리 아니냐?”

“여기저기서 나는데 누가 내든 무슨 상관이야.”

“그건 그렇지.”

국회의사당 앞은 점심시간을 한참 넘겼음에도 수많은 기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주린 배를 채우느라 잠시 시간을 낸 틈에 희대의 핫토픽을 놓치기라도 하는 날에는 모가지 아니겠는가.

그렇게 백여 명에 달하는 기자들이 다함께 배로 합주를 할 무렵, 웬 프랑스인들이 구수한 냄새가 풍기는 바구니를 들고 슬금슬금 다가왔다.

“킁킁, 이게 무슨 냄새야?”

“아이씨. 침 나오네. 쓰읍.”

“자, 이삭의 민족에서 나온 간편식사가 왔어요. 하나에 20센트! 와, 싸다 싸!”

“뭘로 만든 겁니까?”

“뭐긴요, 당연히 이 아메리카에서 나온 밀과 고기로 만든 거랍니다?”

“으음. 맛은 딱히 나쁘지 않네. 바쁠 때 딱이겠어.”

“그럼요. 그럼요. 앞으로도 많이 이용해주세요! 맞은 편 상가에 곧 오픈할 예정이랍니다.”

그렇게 몇몇 프랑스인들이 지나간 이후로 잠시 시간이 흐르자.

“어, 어! 나온다! 의사당 문이 열렸다!”

“기욤 전 대통령 각하! 한 말씀 해주시죠!”

“저리 비켜! 내가 먼저라고! 내가 먼저 자리 잡았다고!!”

“하하, 모두 답변해드리겠습니다. 천천히 진행하시지요.”

의사당에서 나온 젊은 프랑스인은 프랑스 억양이 물씬 풍기는 영어로 크게 말했다.

“각하! 프랑스가 미국의 군사적 안전을 보장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듣기로는 필라델피아를 위해 파리를 포기하겠느냐는, 굉장히 과격한 질문에 기껍게 대답하셨다는 데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뒷짐을 지고 별거 아니라는 듯 나이브하게 말하는 프랑스인과 달리, 그 앞에 선 백여 명의 기자들의 손은 쉴 새 없이 수첩 위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뜸을 들인 프랑스인은 주위를 슥-훑더니 입을 열었다.

“사람이 목숨을 걸어도 되는 것에는 딱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신앙의 자유이며, 둘째는 조국이고, 셋째는 가족이며, 넷째는 주권입니다.

여러분들의 조상이 처음 이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들인 이유는 신앙의 자유를 찾기 위함이었으며, 여러분들이 독립을 위해 전쟁을 벌인 것은 조국을 찾고, 가족을 수탈에서 보호하기 위함이었으며, 자신의 주권을 자기가 뽑아본 적도 없는 누군가에게서 되찾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 프랑스인도 같습니다! 우리가 혁명을 일으킨 것은 가족을 수탈에게서 보호하기 위함이었고, 남작이니 자작이니 지껄이는 무능력한 위정자들을 몰아내어 주권을 되찾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 프랑스 헌법 조문에서 자유와 평등, 박애의 정신이 살아있는 한, 전 결코 자유의 형제인 미국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나는 이젠 아예 두 팔을 붕붕 돌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와아아! 미합중국 만세! 프랑스 만세! 미불동맹 만세!”

음음. 기자 여러분, 열화와 같은 성원 감사드립니다. 나중에 A4 용지와 마카를 들고 오시면 제가 친히 싸인 해드리죠. 아, 사진은 곤란.

그나저나 필라델피아 불바다라니, 이건 뭐 개소리가 따로 없다.

필라델피아가 불타? 쌍둥이 타워가 불타는 건 본 적 있었어도, 그 외에 미국 본토가 불에 타는 일 따위 내가 기억하기론 없다.

어디 북쪽에 사는 모 괴뢰집단의 수장이 대포동 미사일과 함께 트립하거나, 터번을 쓰고 수염을 오지게 기른 이슬람 원리주의자가 수상할 정도로 잘 폭발하는 알라봉과 함께 트립하지 않는 이상 내가 알기로 미국에서는 전쟁은 안 난단 말씀.

따지고 보면 2차 세계대전도 본토가 아닌 하와이가 얻어맞은 거지, 샌프란시스코나 로스앤젤레스 같은 곳은 총알 한 방 안 맞지 않았나. 역시나 난 착한 어른이다. 거짓말은 안 했으니까. 죽어서 발설지옥에 떨어지지는 않겠어.

막말로 내가 병신도 아니고, 막 지르겠나? 다 내 깊은 고심과 고뇌 끝에 내뱉는 말이다 이거야.

“동맹은, 외교는 신뢰입니다! 그러나 신뢰라는 것은 참으로 무서워서, 한 번 신뢰가 무너지면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세상이 황폐화되고 그러다가···.”

미래를 아니까 좋구나. 막 질러도 되고. 꼬우면 환생하시라고.

***

1794년 10월.

프랑스령 루이지애나.

정말 아름다운 날이다. 새들은 지저귀고, 꽃들은 피어나고, 맛 좋은 음식들이 가득하니 이 어찌 좋지 아니한가.

“10월인데도 이렇게 온화하다니, 가끔 허리케인 같은 것만 없으면 정말로 지상낙원이 따로 없는 곳일 텐데. 퍽 아쉽구만.”

찰랑이는 비취색 바다를 안주 삼아 포도주를 즐기던 탈레랑은 그렇게 읊조렸다.

“일을 아주 잘 처리해주니 더 내가 왈가왈부할 건덕지도 없고 말이야.”

탈레랑은 잠시 포도주 잔을 옆으로 치우고는 오늘 아침 항구에서 배달된 미국 신문들을 눈에 잘 보이도록 들어올렸다.

[“국물이 뻑뻑하고 고기도 많이 들었네요. 이 집 스튜는 정말 일품입니다.” 기욤 전 프랑스 대통령, 가게 주인에게 덕담!]

[“미합중국은 위대한 나라, 미국몽 함께하겠다!” 프랑스 전 대통령의 파격적인 인사말! 그가 반한 미국몽이란 무엇인가? 민주공화당 제임스 먼로에게 묻다!]

가볍게는 일상부터.

[“이곳에 묻힌 피와 땀이 헛되지 않게 행동하겠다. 전우여 잘 자라.” 기욤 드 툴롱, 필라델피아 참전용사 묘역 방문.]

무럽게는 각종 의정활동까지.

“거 참, 적당한 재료 몇 개 던져줬다고 이렇게 일품요리로 조리를 하다니. 역시 이 탈레랑보다 열 배는 적합한 인재야.”

누군가가 들었다면 당장에 권총을 뽑아들었을 법한 말을 입 밖으로 꺼내며, 탈레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전쟁? 자유의 형제 미국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심금을 울리는 그의 말. 과연 우리 미국인은 이대로 괜찮은가?]

“이건 대체 무슨 꿍꿍이람.”

마지막 남은 신문 일면에 장식된 글을 보자마자, 탈레랑은 얼굴을 찌푸렸다.

뭐어... ‘정치에서 고려해보겠다는 건 안 된다는 것이고, 된다는 건 고려해보겠다는 말이고, 안 된다는 건 하면 안 되는 겁니다.’라고 자신이 요전에 말해주기는 했었으나, 이건 좀 궤가 다르지 않은가.

전쟁이다. 전쟁.

다른 것도 아니고 무려 전쟁이라는 줄 위에서 곡예를 부리다니, 평소에 사람 목숨을 끔찍이 알던 재무총감이 맞는가? 원래라면 질색에 팔색을 하면서 ‘아잇 씻팔!’하고 욕지거리를 내뱉어야 하는 게 재무총감의 성정 아닌가.

그렇다면 무엇 때문일까? 뭐가 재무총감으로 하여금 그 전쟁이라는 단어까지 입에 담을 정도로 귀하디귀했을까.

미국과의 동맹? 기껏해야 삼류 국가와의 동맹 아닌가.

유럽에 있다면 전선이라도 채울 보충병이나마 보내줄 수 있지, 이 머나먼 대서양 건너에 있는 나라가 유럽의 전쟁에 병사를 보낼 수 있을 정도로 강대국인가? 그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아메리카라는 대륙이 그 정도로 귀한 땅인가?”

탈레랑은 턱을 쓸어내렸다.

광활하기야 하다. 그러나 그 광활한 땅이 다 쓸모가 있겠느냐-라고 묻는다면 글쎄올시다.

그러나 재무총감은 이 아메리카를 원한다. 단순한 외교적인 거스름돈 이상으로 이 아메리카를 중히 여기는 게 분명하다.

무엇 때문일까.

“그, 저...”

“음? 아, 자네로군.”

집중력을 쓴 탓일까, 탈레랑은 자신의 옆에 다가온 사환을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사환이 말을 하고 나서야 그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내 미안하네.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서.”

“아, 아닙니다.”

“고맙네. 그런데 무슨 일인가?”

“총감 각하께서 보내신 탐사대로부터 1차 보고서가 올라왔기에 필라델피아에 보내기 전 결재를 받으려 합니다.”

“그건··· 내가 아니라 뒤무리에 총독에게 가봐야 하는 것 아닌가.”

“뒤무리에 총독님께서는 항만회사들과 만나기 위해 잠시 시간을 내신 탓에, 차관님께 가져왔습니다.”

“흠. 알겠네. 한 번 보여주게.”

내심 쉬다가 일하는 기분이라 언짢았지만, 탈레랑은 순순히 사환이 건넨 종이뭉치를 받아들고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

“그, 차관님?”

“···이런 세상에.”

“차관님?”

“기욤, 기욤, 기욤! 당신은 대체!”

탈레랑은 보고서에 적힌 수많은 자원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