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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화 이웃집 (1) (208/341)

이웃집 (1)

이제 독립한 지 갓 10년이 지난 응애응애 신생국 미합중국의 주머니에는, 21세기 현대인이 익히 알고 있는 수도 워싱턴 D.C.도,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브런치를 들고 바쁘게 출퇴근하는 뉴요커들의 도시 뉴욕도, 온 세상 똘똘한 사람들이 모이는 도시 샌프란시스코도 아직까지 없었다.

미국이 손아귀에 쥔 건 기껏해야 영국이 식민지 항구로 개발을 해놓은 해운도시 보스턴과 찰스턴, 그리고 독립전쟁과 대륙회의를 결의한 필라델피아.

따라서 미국인들은 독립전쟁 이후, 임시 수도로 저 세 도시를 저울질 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새로 수도로 사용할 계획도시를 만들자!’라는 의견에 만장일치로 찬성하고는 ‘임시 수도’로 1785년부터 1790년까지는 뉴욕을, 1790년부터 ‘계획도시’가 완성되는 날까지는 필라델피아를 수도로 삼아 국정을 운영하고 있었다.

물론 그 세 도시 모두 유럽의 파리, 런던, 브란덴부르크 같은 수도에는 손톱만큼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지만 나름 덕담한답시고 입에 침 좀 묻히면 신대륙의 마르세유, 혹은 도버라고 불러 줄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어디까지나 ‘입에 침 좀 묻히면 불러 줄 수 있을 정도’ 말이지.

“이런 세상에, 이딴 게 수도로 삼은 곳이라고? 도시라는 이름의 품위도, 아름다움도, 멋도 찾아볼 수가 없군. 개판 중에 개판이구만.”

당연하게도 예술과 음악에 후원하는 걸 즐기며, 프랑스 혁명왕국에서 외무부차관 및 국민의회 의원을 겸임하는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 페리고르에게 필라델피아는 깡촌 오브 깡촌에 불과했다.

촌스러운 복장의 미국인들, 그리고 마치 영국의 식민지라는 걸 보여주고 싶다는 듯 그것보다 더 촌스러운 영국식 가옥들까지.

“끔찍하군. 파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

“그러면··· 배를 돌릴까요?”

“어허. 농이 지나칩니다, 선장.”

임지(任地)가 불쾌해 투덜댈망정, 어디까지나 국가 간의 일을 중재하러 배에 오른 사람으로서 탈레랑은 불쾌함은 제 마음 속 깊은 곳에 넣어두고 그 대신 책임감과 사명감을 대신 꺼내들었다.

“우리의 친우 프랑스여, 아메리카 대륙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미합중국 국무장관(United States Secretary of State) 토마스 제퍼슨이라고 합니다.”

“장관님께서 이렇게 환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프랑스 외무차관 탈레랑이라고 합니다.”

“르브렁 외무장관께서는 잘 계시는지요? 제가 주불(佛) 미국대사로 있던 시절에 참 신세를 많이 진 바람에 개인적으로 그 분의 안부가 참 궁금합디다.”

“하하하, 제퍼슨 장관님의 바램 덕인지 오히려 저보다 더 팔팔하시답니다. 그것보다, 이거 르브렁 장관님이 부러워지는군요. 원체 인간관계가 넓으신 분인데 이렇게 대서양 넘어서까지 훌륭한 친우를 가지고 계시니 말입니다.”

“하하하!”

“하하하!”

한 가지 다행인 점은 탈레랑 자신과 제퍼슨이라는 미국의 외교관이 나름 죽이 잘 맞는다는 점일까.

두 사람은 만난 첫 날부터 종교는 물론이요, 정치적 신념부터 시작해 오페라는 어떤 작품을 좋아하는지, 파리에 베토벤이라는 아주 유명한 독일인 음악가가 있다는 둥 서로에 대한 공치사, 더 나아가서 사교적인 대화까지 서슴없이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쾅-!

“이보시오, 제퍼슨!”

“···저 분은 누굽니까? 장관님?”

“쯧, 인성에 심각한 결함을 가진 난쟁이랍니다.”

“흥! 키만 더럽게 커서 피가 뇌로 안 가는 바람에 멍청하기 짝이 없는 꺽다리보다야 낫지. 반갑소, 미합중국 부통령 존 애덤스(John Adams)라고 하오.”

한 눈에 보기에도 성깔 꽤 있어 보이는 짜리몽땅한 부통령은, 대뜸 탈레랑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죽은 미라보와 닮아 있기에 탈레랑은 흔쾌히 손을 내밀어 맞잡았다.

“좋아. 손님과 안부도 나눴으니, 이제 볼일을 볼 차례로군. 제퍼슨,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미합중국의 손님을 대접한단 말이오?”

“당연히 국무장관으로서···.”

“국무장관은 지랄. 그 자리는 랜돌프(Edmund Jennings Randolph) 그 친구 거요! 꺽다리 네놈 게 아니라!”

“완전히 미쳤군, 애덤스. 타국의 귀하신 손님 앞에서 이 무슨 난동인가?!”

“꺽다리 너야 말로 임기가 끝났으면 얌전히 내려올 생각이나 하지. 추레하게 임기가 끝났는데도 그 국무장관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다니, 미래의 후손들에게 부끄럽지도 않나?”

“부끄러운 꺽다리가 난쟁이 매국노새끼보다는 낫지!”

“···저 그냥 나가겠습니다.”

위정자들 간의 대화라기보다는 건달이나 왈패 같은 시정잡배들 간의 대화가 이어지자, 탈레랑은 슬그머니 자리를 파하고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한 차례 숨을 돌린 그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길래 미국이 이런 꼴이 났는지 알아보기 위해 주미 프랑스 대사관으로 발걸음을 마저 옮겼다.

“탈레랑 의원, 오랜만입니다.”

“주네 대사님(Edmond-Charles Genêt).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하하, 글쎄요. 이야기가 꽤 길어질 텐데.”

대사의 말은 길었지만, 들을만한 가치가 있었다.

미국의 국회는 현재 두 파로 갈려있었다. 연방당과 민주공화당.

연방당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를 원하는 당이었고, 민주공화당은 보다 폭넓게 주들의 자치권을 존중해주는 공화주의적 국가를 원하는 당이었는데. 각각 당수로 존 애덤스와 토마스 제퍼슨을 내세워 의사당에서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뭐, 사실 미국인들이 서로 물고 뜯고 맛보던 말던 우리와는 상관이 없지만. 양측의 외교적 포지션이 다르다면 말이 달라지지요.

연방당은 영국식 의원내각제를 지지하며 독립전쟁 이후 경색된 영국과의 관계를 풀어나가고 싶어하는 낌새입니다.”

“그렇다면 제퍼슨의 민주공화당은 어떻습니까?”

“민주공화당은 미국식 공화주의를 지지하고 영국과의 관계보단 우리 프랑스에 더 우호적입니다.”

영국과 다시 물꼬를 트려는 연방당과 프랑스와 친밀한 관계를 이어나가고 싶어하는 민주공화당.

이제 이해가 간다. 그러니 탈레랑의 방문에 그리 서로 물고 뜯고 싸워대지.

“부통령이자 연방당의 수장인 애덤스는 이번에 존 제이라는 전직 대법원장을 영국에 파견해 조약을 맺기로 했답니다.”

“···조약의 내용은?”

“그건 모르지요. 아직 그 자가 영국에 있으니. 우리가 조약의 내용을 알려면 대략 4달 정도는 기다려야 할 겁니다.”

벌써 친영주의자들이 행동에 나섰다라, 상황이 그닥 좋게 돌아가는 것 같지는 않다.

아메리카는 어디까지나 프랑스의 ‘부속영토’다. 미국처럼 자신들의 본토가 아니란 말이다.

당연히 둘 사이가 경색되면 본토에서 병력을 날라 배치해야할 프랑스보다 미국이 유리하다. 물론 전면전이 되고 본토에서 프랑스 대육군이 온다면 미국 정도야 갓난 애기 팔 비틀 듯 쉽게 제압할 수 있겠지만 그 쯤 되면 손실이 이득보다 더 커질 지경이다.

“주네 대사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제 식견으로는··· 일단 외교적으로 경고부터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미불 양국의 동맹관계에 대한 경색을 우려한다-정도로. 그렇게 되면 연방당 쪽을 압박해 뜻을 돌려놓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미국과 프랑스는 동맹국이다. 일전의 미불통상동맹조약에 의거하여, 프랑스는 독립전쟁에 수많은 병력을 파견해 미국을 돕지 않았나. 당장 현직 국민방위대 사령관인 라파예트 사령관도 이 독립전쟁에서 명성을 쌓았다.

“그리 좋은 수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예? 왜지요?”

“그렇게 되면 우리 프랑스가 미국에 대해 내정간섭을 하는 그림이 되지 않습니까.”

“글쎄요. 어디까지나 외교적 항의 아닙니까.”

“외교관들끼리의 상식은 일반인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상식인 경우가 많지요. 당장 영국의 식민지로 시달린 경험이 있는 미국인들이, 과연 우리 프랑스의 외교적 항의를 그대로 받아들일까요?”

“으음.”

주네 대사의 침묵을 배경 삼아, 탈레랑은 계속 말했다.

“중요한 건 민의입니다. 민의. 우리 프랑스와 미국은 모두 인민의 뜻을 따르지 않습니까.”

“민의라면?”

“연방당의 마음을 돌리는 건 이미 떠난 배나 마찬가지입니다. 저 치들은 아마 우리가 압박을 넣으면 넣을수록 반프랑스 정서를 자극해 자기들의 이득을 보려하겠지요.”

“흠. 그러면 민주공화당을 지원하는 건.”

“그거야 빼도 박도 없이 내정간섭 아닙니까.”

“연방당을 압박하는 것도 아니고, 민주공화당을 지원하는 것도 아니라면, 대체 어떻게 두 당을 지지하는 민의를 잡으시겠다는 겁니까?”

탈레랑은 으쓱하고 어깨를 들어올렸다.

“그거야 지켜보면 될 일이지요.”

***

1794년 8월 초.

미합중국 임시 수도, 필라델피아.

“죄송합니다, 제가 몸이 좋지 않아서...”

“어떤 의사가 그러던데 황열병이라고 하더군요. 으윽, 머리가 또.”

“콜록콜록.”

탈레랑은 그 후로 만남을 거절하기 시작했다.

“탈레랑 차관님! 왜 그렇게 대화를 피하십니까!?”

“당연히 몸이 좋지 않아...”

“그런 분이 연방당 놈들과는 포커를 치십니까!!! 대체 왜 우리 민주공화당과는 말을 안 해주신단 말입니까!”

정확히는, 민주공화당과의 만남을 말이다.

당연히도 민주공화당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대체 왜 저 친영주의자 매국노 새끼들과 어울린단 말인가? 그것도 영국이라면 각혈을 하고도 남을 프랑스인이?

“제퍼슨 장관님,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프랑스인들이 저 매국노 놈들과 붙어먹는다면 우린 끝입니다! 끝!”

“우린 망했어! 이제 여긴 연방당 놈들이 지배할거야!”

그와 달리, 연방당 입장에서는 호재인 듯 호재 아닌 호재 같은 무언가 이상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왜 프랑스인이 우리 쪽과 긴밀하게 물꼬를 트려할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민주공화당과 붙어먹는 게 이치에 맞지 않나?”

“···일단 상황이 이상하니 이제부터는 가급적 그 탈레랑이란 작자와 거리를 두지요.”

그러나.

“아이고, 의원님! 어디가십니까!”

“탈, 탈레랑 차관?”

“오늘도 한 게임 치러 가셔 되지 않겠습니까. 하하! 오늘은 절대 안 봐드립니다.”

“미안하지만 제가 오늘은 중대한 일이 있어서···.”

“무슨 소리십니까, 의원님의 스케줄은 다 꿰고 왔는데. 자, 어서 가시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레랑은 꾸준히 치근덕거리기 시작했다.

“제기랄, 저 인간 대체 원하는 게 뭐야?”

“난, 난 도통 모르겠소.”

그렇게 몇 주가 지나고, 탈레랑은 비밀리에 연방당을 향해 러브콜을 날렸다.

“···탈레랑 차관으로부터 미합중국의 적법한 국무장관과 대면을 하고 싶다는 연락이오.”

“적법한 국무장관과 대면이라면, 역시! 제퍼슨 그 작자를 패싱하겠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걸로 보이긴 하네만... 뭐, 좋아. 한 번 만나보는 게 좋겠소.”

내 칼도 아니고 프랑스의 칼을 빌려 프랑스를 두둔하는 정적을 죽일 수 있는 기회. 연방당은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하, 안녕하십니까! 연방당을 대표하여, 탈레랑 차관님과 좋은 관계를 맺···.”

“거 씨발, 당신들 지금 장난합니까?”

“···예?”

“이 탈레랑이 이렇게까지 말해줬는데 모르겠소?”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하아. 그, 큼지막하고, 번쩍번쩍 빛나는 거 있잖소이까.”

“큼, 큼지막하고, 번쩍번쩍 빛나는 거?”

“황금! 뇌물 내놓으라고!”

대놓고 뇌물을 요구하는 외교관의 모습에, 미합중국은 덜컥 뒤집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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