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7화 멋진 신세계 (9) (207/341)

멋진 신세계 (9)

1794년 7월 초.

루이지애나, 누벨 오를레앙.

스페인에게서 텍사스를 제외한 아메리카 대륙 땅을 모두 할양받는 데 성공한 우리 프랑스였지만, 이 18세기의 한계 때문에 아메리카 땅을 통제할 지방관과 공무원을 삽시간에 전부 보내는 건 불가능 했다.

따라서 우리가 도착한 루이지애나는 뭐랄까, 아직 스페인과 프랑스 그 중간 어드메에 위치한 애매한 포지션의 모습이었다.

국경 경비는 스페인 식민지군이, 항구와 도심 경비는 프랑스계 식민지 치안유지대가 나눠 처리하고 있고, 총독부에는 과장급 인사 몇을 제외하곤 전부 기존 스페인 공무원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스페인은 이 공무원들과 병력들을 누에바 에스파냐에 재배치할지, 아니면 다른 식민지로 보낼지, 그것도 아니라면 본국으로 송환해야 할지 대대적인 행정계획에 착수해야했기에 시간이 필요했고.

프랑스는 조약을 근거로 들어 저 스페인인들을 당장에라도 쫓아낼 수는 있었지만, 그렇게 스페인 공무원들과 군인들이 다 나가버리면 누벨 프랑스는 말 그대로 행정공백에 노출되니 프랑스에서 필요한 인력이 올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물리자. 꽤나 요상한 풍경이 연출되었다.

“아메리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누에바 에스파냐의 루이지애나 총독, 마누엘 가요소 데 레모스(Don Manuel Luis Gayoso de Lemos y Amorín) 준장입니다.”

“반갑습니다. 기욤 드 툴롱입니다.”

“···누벨 프랑스 루이지애나 총독,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 소장이오.”

프랑스를 대표한 우리 두 사람과 스페인을 대표하는 마누엘 준장은 잠시 악수를 나눈 후 총독부 청사 안으로 들어갔다.

“명예로운 스페인군의 일원으로서, 여러분과 같은 신사들에게 항복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마누엘 준장을 따라 총독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누엘 준장은 벽에 장식된 예장용 검을 뽑아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예비군 소위긴 하지만 현재는 어디까지나 민간인이기에 나는 뒤로 빠졌고, 나 대신 뒤무리에 소장이 나서서 마누엘 준장의 검을 받아들었다.

“귀하는 훌륭히 싸우셨습니다. 프랑스군의 일원으로서 귀하의 명예로운 항복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루이지애나 및 기타 지역에 대한 행정 위임에 관해 도와드리겠습니다.”

으음, 아무리 생각해도 21세기의 감성을 가진 내게는 퍽 어색하다. 도지사가 다음 당선자한테 인수인계하는 것도 아니고, 외국군 군정장관한테 인수인계해주는 거나 다름없는 그림 아닌가.

여하튼 마지막으로 총독부에 걸린 스페인 왕국기 대신 프랑스의 삼색기를 올리며 첫 날의 일정은 끝이 났다.

그렇게 해가 어둑어둑 떨어지고, 내일의 일정을 위해 숙소로 가는 길. 나는 날 호위하는 기병 소령을 내 마차로 불러들였다.

“충성! 무슨 일이십니까, 각하!”

“성함이, 아마 조아킴 뮈라 소령이었죠?”

“그렇습니다, 각하!”

이야 아주 파이팅이 넘쳐. 그루시 형이 제대로 된 사람을 보내줬구만. 근데 뭔 소령따리 옷이 장군, 아니 원수 뺨치게 화려하지. 혹시 비대한 자아의 소유자인가?

뭐,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하다.

나와 함께 도착한 개척단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뉘었다.

첫 번째는 러시아 포로들.

조국에게 버림받고 멘탈붕괴가 온 이 친구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테니 패스.

두 번째는 우리 회사 사람들.

이쪽도 굳이 설명해줄 필요가 없으니 패스.

마지막 세 번째는 모험과 낭만, 그리고 위험을 찾아 배에 오른 마초들.

평생 농사나 짓고 사는 것 보다 위험한 도전을, 안정적인 삶보다 모험적인 삶을 원하는 이들은 이 신대륙에서 제 2의 콜럼버스, 제 2의 바스쿠 다 가마를 꿈꾸고 있었다.

게다가 두 달 간 그 좁아터진 배에서 칙칙한 남정네들끼리 부대끼고 살았으니 이젠 남성 호르몬이 넘치다 못해 폭발할 지경 아니겠나.

아마 한 달 정도만 더 숙성시키면 헐크 호건과도 일기토를 떠서 이길 수 있을 세계 최강의 마초들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자고로 훌륭한 리더가 되려면 밑 사람들의 감정을 잘 다스려야 하는 법. 케이지에 갇힌 배고픈 사냥개 앞에서 먹음직스런 고기를 흔드는 악취미는 없다.

“소령, 기병대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준비만전입니다!”

뮈라 소령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덩달아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내일 아침 8시가 되는대로 북쪽으로 출발하세요.”

“어디까지 찍고 오면 되겠습니까!”

“어디긴, 이 세상의 끝까지 찍고 돌아오십쇼.”

“명 받들겠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미소가 한 움큼 걸려있었다.

***

“자, 모두 하선하시오! 하선!”

“천천히, 다치지 않게 내려오시오!”

끼이익-하는 소리와 함께 넓은 나무판자가 배에서 부두로 내려가고, 7천여 러시아인들은 새로운 세상에 발을 디뎠다.

“뭐 이렇게 따듯해?”

“어우 땀이 그냥 쏟아지네.”

“악! 뭐야 이거? 모기?”

기온, 습도, 벌레까지. 모든 게 여태껏 살아온 고향과 다르다.

“쯧. 뭐 아무리 고향하고 다르다지만 정 하나 못 붙이고 살겠어?”

“그래. 라스푸티차에서도 밭 갈고 살았는데 여긴 천국이지.”

“암. 그렇고말고.”

새로운 시민권, 그러니까 ‘프랑스인은 아니지만 아무튼 프랑스인에 준하는 자격’을 부여받게 된 러시아인들은 그렇게 읊조렸다.

싫다고 해도 어쩌겠나. 조국은 자신들을 이미 내쳤는데. 그들에게 남은 건 이제 악바리를 제외하고는 남아있지 않았다.

“자, 다들 절 따라와 주십시오.”

모두가 배에서 내리자, 이번에는 말을 탄 프랑스인의 뒤를 따라 한참을 걷기 시작했다.

노상에서 점심과 저녁을 먹고, 대강 보따리 짐을 베개 삼아 하룻밤 잠을 청한 끝에 그들이 마주한 것은.

“···세상에.”

광활한 평야.

저 막대한 토지를 다 개간한다면 이 세상에 굶어죽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없을 거다. 저 땅을 모두 파도 사람 입이 부족하다면 세상에 사람이 50억 명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지평선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거대한 강 미시시피에서 흘러나온 강줄기가 평야를 가로지르는 비옥한 땅.

농사꾼을 위한 유토피아, 과장 좀 하면 아담과 하와가 노닐었다고 전해져오는 에덴동산과 같은 모습에 전율하지 않을 농사꾼은 없었다.

그렇게 모두가 입을 떡하니 벌리고 말을 잇지 못할 때.

“여러분.”

“예, 예?”

“저 멀리 원하시는 만큼 개척하십시오. 개척한 만큼 여러분의 소유권을 인정해드리겠습니다. 추가로 궁금하신 게 있으시다면 총독부로 찾아오십시오.”

땅을 팔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포로들의 식량을 피 같은 세금으로 댈 수는 없으니. 그런데 소유권? 개척하는 만큼?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그러나 프랑스인은 그렇게 말한 뒤 홀연히 말머리를 돌려 사라졌다. 남겨진 자들은 모두 멀뚱멀뚱 그 뒷모습을 눈으로 쫓다가, 사람이 점이 돼서 사라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러니까··· 땅을 개척하면 그게 내 땅이 된다. 이 말인가?

내가 자영농이라고?

내가 자영농이라니! 내가! 내가!

어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봇짐을 꺼내 총독부에서 지급해준 괭이와 종자 주머니를 꺼내들었다.

“퉷. 좋아, 어디 한 번 해보자고.”

“이 씨부럴 땅 새끼야! 여기 폭풍 농사꾼 세르게이가 간다!”

“와아아아!!”

괭이가 땅에서 튕겨져 나오긴커녕 부드러운 버터마냥 괭이가 가는대로 큼지막한 구멍을 내고, 물길을 파면 맑은 시냇물이 졸졸 흘러 삽시간에 흙이 물을 한 움큼 집어 삼킨다.

눈이 펑펑 내리던 러시아에서도 땅을 갈아먹은 이 사람들에게, 루이지애나의 비옥한 옥토는 너무나도 쉬운 상대였다.

***

“끼얏호우!”

“가자! 이 뮈라의 뒤를 따라, 세상의 끝을 보러가자! 미래는 우리를 세계 최고의 탐험가로 기억할 거다!”

“와아아아!! 뮈라! 뮈라!”

시발. 저게 마적 떼지 어떻게 군인인가.

“아무래도 저 놈들은 미친 것 같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르봉 선생?”

“······크흠.”

이삭의 민족에서 나온 기술자, 르봉은 샤르보노의 말에 연달아 헛기침을 했다.

필리프 르봉은 차마 부정할 수가 없었다. 젊은 혈기에서 나오는 그 에너지야 르봉 자신도 알고 있다. 당장 르봉 자신도 아침에 출발할 때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한다는 사실로 가슴이 두근두근 대지 않았나.

하지만 출발한 지 4시간이 넘어서도 텐션이 떨어지기는커녕 눈을 홰까닥 뒤집고 저러는 건··· 글쎄. 좀 많이 이상한 거 같긴 하다.

그래도 뭐... 결과만 좋으면 됐지. 그래.

잠깐의 자기합리화를 마친 끝에, 르봉은 다시 본연의 업으로 돌아갔다.

“그게 뭐하는 거요?”

“계산식입니다. 뭐, 머릿속으로 모의실험을 돌린다고 해야 하나요.”

마차에 타서 머리가 어지럽고 멀미가 날만도 하건만, 르봉은 멀미약을 눈에 몇 방울 떨어트리더니 아무렇지 않다는 듯 수첩에 계속해서 무언가를 슥슥 적어나갔다.

“계산식?”

“전로에 들어가는 금속의 양, 그리고 거기에 반응하는 산소의 양, 그걸 때울 코크스의 양, 어느 정도까지 가열했을 때 어느 정도 순도의 철이 뽑혀 나올 것인가. 뭐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그게 수첩에 몇 번 그적거린다고 되는 거요?”

“실험을 실제로 해보기 전까지는 모르죠. 다만 이렇게 미리 예상 값을 뽑아 놓으면 나중에 도움이 된답니다.”

르봉은 웃는 낯으로 수첩을 흔들며 말했다.

***

1794년 7월 말.

누벨 오를레앙.

“이야, 나름 선글라스 테가 나는데?”

21세기 안경점에서 파는 수준은 아니더라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파는 짝퉁 선글라스 수준은 되네.

나는 안경알에 그을음을 만들어 파는 원시적인 선글라스를 쓴 채 룰루랄라 해변의 삶을 즐기고 있었다.

새들은 지저귀고 꽃들은 피어나고, 이런 날에 나 같이 착한 어린이는 와인 한 잔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게 세상의 이치지. 이건 삼강행실도에도 적혀져 있는 내용이다. 몇 장 몇 절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다.

그리고 딱 까놓고 말해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렇게 재충전하는 거 말고 없다.

개척단도 이미 보내놨고, 누벨 오를레앙 행정은 뒤무리에한테 짬 때려놨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없단 말이지.

우리 개척단이 출발한 게 약 2주에서 3주 전이었으니 대강 1주 내지 2주 정도면 돌아올 테고 그 때부터 광산을 개발하든 아니면 시마이를 치든 할 거 아닌가.

그 때까지 기욤은 편히 쉴 거예요. 기욤은 자유에요. 오홍홍.

“그, 각하?”

“예압. 왜 그러십니까아.”

나는 선글라스를 눈 아래로 내리면서 말했다.

“그게... 보스턴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보스턴? 느낌이 안 좋은데.

“누가 보냈는데요.”

“탈레랑 의원님이 보낸 편지입니다.”

나는 말없이 편지를 받아 봉인을 뜯고 내용물을 읽어 내려갔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미국에서 추방당하게 생겼습니다.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 페리고르가.]

내가 요즘 눈이 침침해졌나? 이게 무슨 개소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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