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4화 멋진 신세계 (6) (204/341)

멋진 신세계 (6)

1793년의 12월 24일의 크리스마스이브.

저 하늘 위에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신이 있다면 그 또한 부침 많던 올 한해의 마지막을 칙칙함으로 장식하고 싶지는 않은지, 모처럼 하늘 위에서 눈송이가 하나 둘 땅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와아! 눈이야! 눈!”

“엄마! 나 친구들이랑 놀면 안 돼?”

“에휴. 어디가지 말고 요 앞에서만 놀아?”

“아싸아아!”

장장 1년여 간 전쟁으로 가슴앓이를 하던 시민들에게, 때맞춰 하늘에서 내리는 눈송이는 울적했던 마음을 달래주는 좋은 놀잇감이 되어주었다.

그 뿐인가.

연인들은 서로 팔짱을 끼고 시내를 걸어 다니다가,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하고 호객하는 오페라 단원들에게 등을 떠밀려 ‘어, 어.’하다가 어느 새인가 극장 첫 번째 열에 앉아 꼼짝없이 크리스마스이브 기념 오페라를 감상하게 되기도 했고.

“큼큼, 아리따운 숙녀 분?”

“저요?”

“물론이죠, 여기 아리따운 분이 당신 말고 또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 프랑스 기병 소령 조아킴 뮈라와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시지 않겠습니까?”

“어머나.”

가로등 불빛을 배경삼아 새로운 연인이 탄생하기도 하고.

“뮈라! 뮈라! 이 새끼 어디 갔어!”

“분, 분명히 아까 관사에 계셨는데...”

“그 말은 지금 없어졌다는 거잖아! 지금 날 놀리는 거야!?”

“아닙니다!”

“제기랄, 내가 오늘 그루시 대령님 비번이라고 했어 안했어! 안 그래도 영관이 부족한데 뮈라 그 인간까지 없으면 오늘 사무는 누가 보냐!? 당장 튀어나가서 끌고 와!”

“알겠습니다!”

부득이하게 어떤 곳에서는 큰 소리가 나오기도 하고.

그렇게 많은 소리가 들려오는 파리였지만, 오늘 가장 행복한 사람들을 고르라면 당연히 이 축복받은 날 결혼식을 올리는 부부였다.

“신랑, 프랑수아 마티유.”

“예.”

“신부, 안 조제프 테르바뉴.”

“네.”

“두 사람은 앞으로 남은 생애동안 상호 간을 변함없이 사랑하고 존중하며, 가정의 평화를 지켜나갈 것을 주님과 성모 앞에 맹세합니까?”

사제복을 입은 주례가 그렇게 말하자, 육군 중령 예복을 입은 신랑과 드레스를 입은 신부는 나란히 서로를 쳐다보았다.

“““네, 맹세합니다.”””

“축하합니다. 두 사람은 이제 정식으로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부부가 되었습니다.”

“““와아아!!!”””

주례를 맡은 사람이 현직 국민의회 당수고 하객들 중 신문에 이름 실리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는 것만 빼면 여느 결혼식과 같았다.

부케를 던지고, 누구는 받고, 다시 신랑과 신부가 나란히 팔짱을 끼고 여기 저기 박수를 받으러 다니고, 그에 질세라 하객 쪽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오고.

하여간 신랑 측 하객 중 대다수가 군바리들 아니랄까봐 박수 치는 것도 경쟁이 붙었나 소리가 커지면 커졌지 절대 작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

손이 아프다. 안 그래도 두개골이 빠개질 거 같은데 저 치들 따라 계속 손바닥을 놀리다간 정말 뼈가 상할 것 같아.

그렇다고 가장 친한 친구가 결혼하는데 손을 쉬는 건 내 가슴 속 삼각형이 용납하지 않는다. 그만 좀 찔러라 좀.

결국 나는 사람들 사이를 슥 비집고 들어가, 신랑이 잘 볼 수 있게 앞으로 나섰다.

“큼큼.”

“기욤! 와줬구나!”

“누구 결혼식인데 당연히 와야지. 여기 축의금. 넉넉하게 넣었어.”

“축의금은 무슨, 그냥 몸만 오지 그랬어.”

“입으론 그러면서 받는 거 보면 손은 솔직하네.”

“그럼 누가 주는 건데.”

“말하고 행동하고 다르면 산타가 선물 안준다는데.”

“올해엔 이미 선물을 너무 많이 받아서 괜찮을 것 같네.”

얼씨구 아주 입이 귀에 걸리셨네.

그래. 내가 졌다. 졌어. 에퉤퉤, 어서 신혼집으로 꺼지라지.

“뭘 그렇게 뚱해있냐?”

“각박한 현대사회에 길 잃은 기욤의 영혼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관한 깊은 성찰 중이었지.”

“···너 뭔 일 있냐?”

“아니. 없는데.”

“있는 거 같은데?”

마티유는 잠시 눈을 돌려, 한창 하객들과 얘기하는 신부를 힐끔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말해봐. 뭔 일인데?”

“북쪽 나라에 계신 어느 전제군주께서 날 아아아주 고깝게 보시는 모양이야.”

탁 털어놓으니까 뭔가 어감이 이상하네. 북쪽나라, 거기에 전제군주라... 돼지가 아니라는 점만 빼면 모 김 씨 일가와 비슷한··· 윽, 머리가.

“북쪽이면 스웨덴?”

“어.”

“너 원래 그쪽이랑 무역 안하잖아.”

“해야 되게 생겼으니까 골치가 아프지.”

“뭘 수입해 와야 하는데.”

“철광석.”

“굳이 거기서만 가져와야 해?”

“기술자들이 그렇다고 하네.”

내가 말했지만 열이 뻗친다. 마치 상황이 ‘이미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존나 뺑이나 쳐라’라고 나한테 말하는 것 같지 않나?

대관절 내가 무슨 죄를 졌다고 한 나라를 호령하는 군주라는 새끼들이 쫌생이처럼 일개 개인한테 이 지랄인지.

마음 같아서는 당장 배를 타고 스톡홀름으로 쳐들어가 목을 따오고 싶었으나, 겨우 철 쪼가리 안 팔아준다고, 그것도 공적인 일도 아니고 내 개인적인 일 때문에 엄한 생사람을 사지로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자기한테 물건 안 판다고 군대 동원해서 다 때려 부수면 그게 해적새끼고 깡패새끼지 사람인가?

“그럼 뭐 뾰족한 수라도 있냐?”

“없으니까 내 잘생긴 얼굴이 이렇게 일그러져 있는 거 아니겠어?”

“알자스-로렌으론 안 돼?”

거, 아무리 그래도 듣는 척도 안하는 건 좀 너무한데.

“안 된데.”

“그럼 답 나왔네 뭐.”

“···답이 나와?”

“스웨덴은 안 팔고 프랑스 본토로는 안 된다며? 그러면 한 가지 뿐이지.”

마티유 형은 손가락을 펴며 말했다.

“식민지.”

“식민지라, 어감이 좀 그런데.”

“식민지가 뭐 어때서? 정 그러면 해외영토라고 하지 뭐. 여하튼, 이번에 아메리카에 어마무시한 땅을 전쟁배상금으로 얻었다면서? 몇몇 동기들 말로는 측량도 다 안 되어 있다고 하던데.”

“···허 참. 그건 또 어디서 주워들었대?”

“야, 우리 동기 중에 군대에 남은 사람도 있지만 다른 길 찾아간 녀석들도 많아. 외교부라던지. 행정부라던지.”

아메리카. 아메리카라.

나는 턱을 쓸어내리며 곰곰이 단어를 곱씹었다.

“아무튼지 간에 그렇게나 광활한 땅이라면 그깟 질 좋은 철광석 몇 개 안 나겠냐? 뭐, 안 난다면 어쩔 수는 없지만은.”

“그래. 뭔 말인지 알아들어. 확률 상 그 드넓은 땅에 하나가 없겠냐는 거지.”

나는 품에서 봉투를 두 개 더 꺼내서 마티유 형에게 툭 던져주었다.

“야, 이건 뭐야?”

“뭐긴. 하나는 형수님 몫이고 하나는 언젠가 태어날 조카 몫이지. 난 가볼 테니까 형수님한테는 안부 잘 전해줘.”

“벌써 가게? 어, 야! 야!”

미안하지만 나 같이 바쁜 벌꿀은 노닥거릴 시간이 없거든.

아, 꿀벌이지. 아무튼.

***

내가 현대에 있을 시절, 플레이 해본 컴퓨터 게임 중 어떤 주인공이 있었다.

초록색 슈트를 입고 전기톱과 더블배럴 샷건으로 악마들을 족치던 주인공은, 점점 거대해지는 악마를 상대할 때마다 쫄기는커녕 ‘존나게 큰 악마! 핫하! 더 많이 찢을 수 있겠지!’라며 기쁨에 미쳐 날뛰었던 걸로 기억한다.

마치 내 지금 상황과 비슷하지 않은가?

내가 기억하기론 중국이었는지 인도였는지 그게 한반도의 33배던가였고, 미국이 그 중국보다 컸으니까··· 아무튼 졸라 크다.

내가 그 초록 슈트를 입은 주인공이고 이 북아메리카라는 대륙이 내가 잡아야 할 악마라고 생각하면 어찌저찌 억지 좀 부리면 끼워 맞출 수 있지 않겠나.

하지만 난 미치지 않았다. 저 광대한 대륙에 몇 명을 몰아넣어야 내가 원하는 걸 쟁취해 낼 수 있을지 가늠도 채 할 수가 없다.

뒤무리에가 인솔하는 7천명으로는 턱도 없겠지.

추가로 1천? 1만? 10만? 한 100만 쯤 넣으면 되려나?

그러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마련하고? 고용해서 월급을 준다면 난 파산이고, 여태껏 살아왔던 삶의 터전을 버리고 프랑스를 떠나라고 윽박지르면 희대의 개새끼가 되고 만다.

“무역국 쪽에 사람 하나 찾아달라고 해주세요.”

“누굴 찾으면 되겠습니까?”

“아메리카 지리에 익숙한 사람. 아마 신대륙 모피 무역을 업으로 삼는 사람 중에서 찾아보면 될 겁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말을 할 줄 알면 더 좋구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그러니 소수정예, 일당백으로. 어쩌면 불가피하게 남의 도움을 받아야할 상황까지 고려한다.

“그루시 대령한테도 사람을 하나 보내죠.”

“무슨 내용으로 보내면 되겠습니까?”

“저번 우디노 부장 스카우트 때처럼, 부대 내에 골칫거리 같은 사람이 있으면 보내달라고 해주십시오. 되도록 에너지 넘치는 사람으로요.”

“예. 사장님.”

소환사의 협곡을 지키는 탑의 제왕, 아칼리 선생님께서는 항상 ‘빠르고 민첩하게’라고 말씀하셨다. 그만큼 속도는 어느 일에서나 중요하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아메리카를 털어먹으려면 보통 빠르기로는 안 될 터. 심장이 터질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려줄 사람이 필요하다. 에너지다 넘치다 못해 객기까지 겸비한 사람.

“더 내리실 명령은 없으십니까?”

“생쥐스트 편집장과 사드는 자리에 있습니까?”

“예, 지금 한창 내일 아침에 나갈 <막심>의 마무리 작업 중입니다.”

“잠깐 불러와주세요.”

그 뿐 만인가? 자발적으로 개척에 나서는 사람도 필요하다. 프랑스의 안정적인 삶보다 새로운 터전을 개간해 인생을 바꾸고 싶어 하는 정열적인 사람들. 일확천금이든, 시궁창 인생을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도 상관없다. 그 드넓은 땅을 채우려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부족하니.

“각하, 이 생쥐스트를 부르셨습니까!”

“이 몸 사드, 대령했나이다!”

“한창 바쁘실 텐데 두 분을 오라가라해서 죄송합니다.”

“하하, 아닙니다! 지금 막 가학과 피학이라는 주제에 관해 열띤 토론을···.”

사드, 이 인간아. 당신만 보면 내가 현기증이 나.

“좋아요. 아주 쌩쌩하시다 이말이군요.”

“어··· 그, 그건 아닙니다만.”

“내일 1면에 광고 하나 실읍시다. 둘이 머리 맞대고 문구 하나 짜보십시오.”

“광고요?”

“예. 읽기만 해도 젊은 혈기에 못 이겨 자원자가 속출할 그런 문구.”

낭만과 탐험, 위험과 보상이 기다리는 두근두근 신대륙 탐사 기회에 사람 좀 꼬이게 해봐. 이 월급 루팡들아.

***

“그루시 대령님. 더 이상은 못 참습니다! 조아킴 뮈라 소령에게 벌을 주시던가! 아니면 제 계급장을 떼십쇼!”

“중령, 자네가 조금 참아볼 수는 없겠나?”

“갸아아아악!!”

용기병 연대장, 에마누엘 드 그루시 대령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생도 시절에는 그토록 영롱해보이던 상급자의 자리란, 사실 재미는커녕 온갖 개 같은 책임만 지는 자리에 불과했다.

부연대장이 저러는 이유를 이해는 한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부연대장이라고 외출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영관이니까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지켰는데 하급자인 소령 나부랭이가 가라질을 했다가 걸리니 꼭지가 돌아버리지.

임관 한지 10여년 만에 팍 삭아버린 것 같다.

“···이번에 신대륙 쪽에 기병대를 뽑는다더군. 근신 겸 당분간 신대륙에 넣어놓으면 정신 차리겠지.”

“감사합니다, 대령님! 감사합니다! 흑흑!”

그러나 그루시는 몰랐다.

[위험한 여정, 더울지 추울지 모름, 몇 달간 지속되는 길고 긴 탐사, 어디서 출몰할지 모르는 위험, 안전한 귀환을 보장할 수 없음, 성공 시 영광과 명예를 얻을 수 있음]

[이삭의 민족 본사]

“이거, 재미있겠는걸. 이 몸 조아킴 뮈라에게 딱 이겠어!”

고심 끝에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내린 결정과 달리, 이 사고뭉치 기병 소령은 이미 마음을 정한 생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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