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3화 멋진 신세계 (5) (203/341)

멋진 신세계 (5)

“흐어어어.”

사장실로 돌아와 대충 의자에 걸터앉자, 피곤에 쩐 나머지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나왔다. 해법을 찾아보겠답시고 파리 이곳저곳을 쏘다녔으니 몸이 비명을 지를 만도 하지.

잠이 쏟아져 눈꺼풀이 감기고, 머리도 잘 안 돌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생각을 멈출 수는 없다.

하루, 이틀, 삼일.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깨지는 건 내 회삿돈 아닌가. 어서 빨리 기차를 상용화시켜서 사람들의 돈을 빨아 먹··· 아니지. 표현이 조금 상스러우니 매출이라고 하자.

아무튼 어서 매출을 올리지 않으면 회계 상에 빨간불이 깜빡거리기 시작할지 모른다.

근 4년 동안 돈을 벌기는커녕 있는 돈까지 다 먹어치운 저 돈 먹는 하마를 빨리 세상에 내놓지 않으면 이젠 배보다 배꼽이 커질 지경이니까.

그건 내가 살아있는 한 절대 눈 뜨고 못 보지.

사장이라는 건, 회사를 이끈다는 건, 조직에 속한 모든 이들의 미래를 지고 가는 거니까. 나 혼자 무너지는 건 상관없다. 다시 홀로 일어서면 되니까.

하지만 우리 회사가 무너지면 나뿐만 아니라 우리 회사가 고용한 수백 명의 직원들 모두가 무너지고 만다. 내가 주는 월급으로 살아가는 수백 명의 수입이 끊기고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그런 꼴을 만들고 싶은 마음은 하나도 없다.

이제 막 파리에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룬 플로리앙 씨도, 영국에서 뺑이를 치고 있는 로스차일드 일가도, 호박파이를 잘 굽는 마리 씨도, 스타킹의 성적 호기심에 대한 척도를 분석하고 있을 생쥐스트와 사드까지. 다 내 가족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뻑뻑해진 눈을 문지르던 손을 뗀 후, 테이블에 놓인 종을 울렸다.

딸랑- 딸랑- 하는 소리가 잠시, 우리 사무실에 근무하는 직원 하나가 노크를 하고는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장님, 부르셨습니까?”

“찬물 한 바가지랑 설탕 두 스푼 넣은 커피 한 잔 부탁드립니다.”

“바로 대령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잠시 후 직원이 가져다 준 찬물을 손으로 떠서 한 차례 얼굴을 씻었다. 잠이 훅 달아나지는 않지만 눈이 뜨인다.

그 다음에는 커피.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를 삼키자.

“으겍! 에퉤퉤! 존나 뜨겁네!”

혀가 살짝 데였는지 아프다.

물집은 안 잡혔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덕분에 잠은 확 깼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좋아. 그러면 이제 어쩐다?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할까, 어떤 지식을 활용해야할까, 누구를 어디에 배치하고 누구와 거래를 터야할까. 생각할 게 한 가득이다.

“기찬아. 천천히 가보자. 천천히.”

- 통...이요?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프랑스의 18세기 제철 기술자들은 ‘2022년 상반기 공기업 공채 팜플렛’에 나온 거대한 전로의 존재를 모른다.

그 말인즉슨 그 전로가 미래 강철 대량생산의 키포인트였을 거 같은데.

“원리가 뭐지.”

하와와. 한 평생 기업들이 분식회계 돌리는 방법이랑 그걸 어떻게 두들겨 팰 수 있는지만 공부한 문돌이에게는 너무나 거대한 의문인거시와요.

뭐, 굳이 따지면 모양만 대충 카피하는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겉이 엇비슷하다고 성능이나 가동까지 엇비슷하게 성공시킬 수 있는 건 아니잖나.

쯧. 결국엔 어쩔 수 없나. 함부로 뽑지 않으려 했건만.

딸랑- 딸랑-.

“예, 사장님. 또 뭔가 시키실 일이 있나요?”

“네, 지금 당장 생탕투안 구로 가서 우리 수석기술고문님 좀 불러와 주십쇼.”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만. 괜찮을런지요?”

“에이 새벽 2시면 얼마 안 지났죠. 당장에 우리 둘 다 깨어있지 않습니까?”

“알겠습니다. 바로 고문님을 데려오겠습니다.”

- 쾅, 쾅, 쾅!

“으음...”

- 쾅, 쾅, 쾅!

“으, 으에? 이게 대체 뭔 소리야?”

“으음. 왜 그래요, 여보?”

“안느, 무슨 소리 안 들리오?”

- 쾅, 쾅, 쾅!

“어머, 누가 찾아왔나 봐요?”

“이런 젠장할, 대체 이 오밤중에 어떤 미친놈이 문을 두드리는 게야?”

남자는 욕지거리를 한 바가지 쏟아내고 낸 후, 베개 맡에 있는 등잔을 쥐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성질이 뻗힌 나머지 등잔에 불을 붙이려 성냥을 켜는데도, 두 개비나 부러뜨리고 나서야 겨우 불을 붙일 수 있었다.

- 쾅, 쾅, 쾅!

“간다고, 가! 참을성도 없는 놈이구만.”

가뜩이나 단잠을 자다가 깨어났는데 채근하니 화가 안 날래야 안 날수가 없었다.

남자는 서둘러 불이 켜진 등잔을 쥐고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 저택의 문을 활짝 열었다.

“누군데 이 오밤중에 지랄이···. 뭐야, 자네는 인사과 아닌가? 왜 여기 있나?”

“하하, 사장님께서 고문님을 모셔오라고 하셔서요.”

“아니, 나는, 지금 자야하는데...”

“이제 깨어있지 않으십니까. 어서 마차에 타시죠. 라부아지에 고문님.”

“정, 정 그러면 조금 기다려주게. 옷도 지금 잠옷이라···.”

“하하, 사장님이 언제 그런 거 신경 쓰는 거 보셨습니까?”

라부아지에는 차마 뭐라고 하지 못하고서, 마차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

“아, 라부아지에. 어서 들어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에...”

“왜 절 무슨 미친놈 쳐다보듯 봅니까?”

“아닙, 아닙니다.”

설마 자기 목숨까지 구해준 사람이 새벽에 잠깐 불렀다고 성질을 내는 거겠어? 에이 우리 라부아지에 씨가 그렇게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은 아니지.

···아닌가?

나는 분위기도 좀 환기시킬 겸, 직원에게 커피와 쿠키를 가져다달라고 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다 깨서 출출하실텐데, 먹으면서 얘기하시죠.”

“···감사합니다, 사장님.”

쿠키를 하나 주워 입에 넣는 라부아지에, 그리고 커피를 후후 불어 호로록 삼키는 나.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나는 커피잔을 얌전히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도 염치가 있지, 지금 막 자다 깨서 비몽사몽한 분에게 대단한 걸 요구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시군요.”

음, 내가 관심법으로 보아하니 우리 라부아지에는 자다 깬 게 매우매우 꼬우시군요. 내 마음 속 메모장에 적어놨으니 다음 연봉협상 때 봅시다.

“제가 알기로 라부아지에 씨는 병기국 소속으로 꽤 오랜 시간을 지내셨던 걸로 아는데. 맞습니까?”

“정확히는 화약국 국장이었지요.”

“그렇군요. 그러면 혹시 제철 쪽도 잘 아시나요?”

“제철이라, 음.”

라부아지에는 턱을 몇 번 쓸어내리더니 입을 열었다.

“전문가라고 뽐낼 정도는 아니지만, 화약국에서 일하면서 옆 부서들 이야기를 꽤 주워들었지요. 대강은 안다고 자신합니다.”

“역시 우리 1등급 노예!”

“···뭐라구요?”

“역시 유능하시다구요.”

큼큼, 거 미안하게 됐습니다. 나도 모르게 말이 헛 나왔네.

나는 미리 내가 그려놓은 그림을 한 장 내밀며 입을 열었다.

“한 번 봐주십시오.”

“이게 뭔가요? 거대한 통입니까?”

“제가 생각하는 제철법입니다.”

“제철법...말이십니까?”

라부아지에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도 그럴게, 내가 무슨 공학자나 과학자도 아니고 일개 사업가에 불과하지 않은가.

아무튼 내 전로 그림을 본 라부아지에는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떤 원리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아 그건 말이죠.

“몰라요.”

“예?”

“그건 이제 라부아지에 씨가 찾아야지요.”

‘지금 내가 대체 뭘 들은 거지’라고 생각하는 걸 보여주려는 듯, 라부아지에의 얼굴이 기괴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제가 잘못들은 거지요?”

“아뇨.”

“그게 대체 무슨···!”

라부아지에는 고개를 숙이고 양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가 말했다.

“사장님, 원리를 모르신다고 하셨잖습니까.”

“네.”

“원리를 모르시는데 사장님께서 생각해내신 이··· 도안이 가능할 거라 믿으십니까.”

“네.”

으음. 사람 얼굴이 저렇게 붉으락푸르락해지는 건 정말 오랜만에 본단 말이지.

나도 그루시가 갑자기 새벽에 우리 집에 쳐들어와 ‘내가 고안한 새로운 경제법이네 기욤.’하고 말한다면 친히 몽둥이로 머리를 두드려 제정신을 차리게 만들어 줄 용의가 있다.

“라부아지에.”

“···예.”

“일단 속는 셈치고 한 번 해보십시오. 돈은 얼마가 들어가든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레일도 못 깔면 여태까지의 연구비가 죄 기회비용으로 날아갈 텐데 여기서 돈 몇 푼 아낄 일이 아니다. 멈추면 죽도 밥도 안 될게 뻔하다. 어떻게 해서든 결과를 내야 해.

“후우. 그렇게 말씀하셔도...”

아이 씨. 이쯤 되면 그냥 ‘네 알겠습니다.’하면 안 되나? 이 기욤은 머뭇거릴 시간이 없단 말이다.

기차는 강철이 필요해요

우리 회사는 시간이 없어요.

기욤은 원리를 모르는 미래지식으로 빠른 연구를 원합니다.

<지금 즉시 ‘왜 되는지는 모르는’ 전로 연구하기>

결국 나는 이 매드 사이언티스트에게 당근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좋습니다. 이번 일을 성공리에 마친다는 가정 하에 겸사겸사 하고 싶은 실험이나 연구가 있으면 전폭적으로 지원해드리겠습니다.”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라부아지에의 얼굴은 어느 샌가 환하다 못해 빛이 뿜어져 나올 만큼 밝아져 있었다.

이 인간... 혹시 노린 건가?

***

1793년 12월 23일.

파리. 이삭의 민족 본사.

기요탱 박사, 몽펠리에 형제, 그리고 머독과 트레비식, 마지막으로 르봉을 비롯한 기술자들까지 모두 모인 이 자리는, 우리 이삭의 민족이 모을 수 있는 모든 이공계 전문가들이 모인 자리나 마찬가지였다.

우선 나온 얘기는 당연히 원료 이야기.

“철광석 산지야 군데군데 많지만은... 품질과 채산성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키는 곳은 이 프랑스에 한 군데 뿐입니다.”

“알자스-로렌이라.”

“투자를 한다면 알자스-로렌 외에 굳이 광산을 만들 이유가 없습니다.”

“투자비용까지 생각을 해보면, 어쩌면 스웨덴 쪽에서 무역을 해오는 게 더 싸게 먹힐 수도 있습니다.”

그 다음은 실질적인 전로와 용광로 운용.

“사장님이 말씀해주신 전로 말인데... 가능성은 있는 겁니까?”

“그으을쎄요. 전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거라.”

“독일인들의 여행기 중에 동양에서 비스무리한 걸 봤다는 내용이 있긴 합니다.”

“일단 조병창에 대강 주문을 넣어놨으니 주물이 도착하는 대로 시작해봅시다.”

그리고 조사.

“제가 생각하기엔 주철이 연철과 강철이 되려면 철 내부의 산소와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막 발견한 탄소라는 게 문제 아닐까요?”

“그런데... 철에 산소가 들어있습니까?”

“큼, 크흠.”

“그.. 르봉 씨? 혹시 라부아지에 고문님의 논문 안 읽어 보셨습니까?”

“앗.”

장장 6시간 동안의 토론 끝에 내 앞으로 압축 전달된 내용은 이러했다.

[일단 만들어는 보겠음. 그런데 될지 안 될지는 모름.]

[알자스-로렌에서 나는 일반 철광석과 스웨덴 산 고급 철광석을 동시에 다른 전로와 용광로에 넣고 경과와 추이를 지켜보겠음.]

이 정도면 충분하다. 전문가들이 머리 맞대고 ‘아 이건 좀.’이라는 결과가 안 나온 것만 해도 다행 중 다행이지. 저 사람들까지 ‘모르겠는데요?’를 시전하면 나는 정말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러나.

“씨발련들아!! 갸아아아악!!”

[스웨덴 왕국은 야만적이고 비문명적인 프랑스 국적의 회사에 대해 모든 종류의 무역을 불허함. - 구스타프 4세 아돌프 -]

내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좆같은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며 시작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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