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1화 멋진 신세계 (3) (201/341)

멋진 신세계 (3)

얼굴이 잔주름 하나 없이 깔끔하면 20년.

팔자주름이 생겼으면 40년.

팔자주름에 더해 이마에 주름 하나가 더 있다면 50년.

제각기 살아온 시간은 달랐으나, 그 모든 사람들은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이 밭을 갈고, 똑같이 성당에 나가 성모상에 대고 기도를 하는 삶을 살아왔다.

운 좋게 사냥에 나가 토끼를 한 마리 잡아오면 저녁으로 고기 한 점, 못 잡으면 딱딱한 흑빵만 물에 적셔 씹어 삼키는 삶.

가끔씩 초라한 통나무집 벽 너머로 외풍이 불어오면, 도끼를 들고 나가 근처 숲에서 떡갈나무를 패다가 엉성하게나마 벽에 덧대는 삶.

평소엔 높디 높은 고성에 사시는 영주님들 손가락 따라 요리조리 불려 다니고, 끝끝내는 그 영주님들마저 요리조리 움직일 수 있는 차르의 명에 따라 총을 들고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을 쏘러 수십, 수백 킬로미터를 걷는 삶.

수백 킬로미터를 걸어온 끝에도 군복을 입은 영주님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 따라 죽고, 죽이고, 이웃을 잃는 삶.

그렇게, 그렇게 20년이든 40년이든 50년이든 항상 입으로 ‘예. 영주님!’하면서 딱딱한 흑빵을 씹어 삼키고 묵묵히 복종했는데. 그 결과가 만리타국에 버려지는 거라니.

미쳐버릴 것 같다.

마을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생각나던 초라한 판잣집과 통나무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그 자리에 벽돌을 구워 만든 프랑스인들의 멋진 벽돌집이 채워진다.

길이라는 단어는 흙탕물이 군데군데 자리 잡은 흙길에서, 돌을 깔아 만든 도로와 그 옆을 따라 흐르는 배수로의 이미지로 바뀐다.

도시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그저 조금 더 높은 건물, 조금 더 많은 사람이 있는 마을에 불과한 도시가, 대낮처럼 밝은 가로등과 거대한 강철마, 수많은 사람들이 웃고 있는 모습으로 변한다.

“제발, 제발 집에 보내줘. 엄마가 있는 우리 집으로... 보내달란 말이야. 더 이상 여기 있기 싫다고...”

자기가 좋든 싫든, 여태까지 살아온 세상이 무너지고 관념이 무너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세상과 관념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머리 위로 누군가를 극진하게 모셔왔던 20년이 아무런 가치도 없고, 의미도 없었다.

성당에서 정교회 사제들이 종을 딸랑딸랑 울리면서 ‘여러분은 잘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착하십니다. 여러분은 내세에서 꼭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해줬던 건 그저 박살난 현실을 잊기 위한 정신승리일 뿐이었다.

날 때부터 ‘당연히 해야 했을 일’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았다.

머릿속은 수많은 생각과 현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데 마음은 공허하다.

“개새끼야! 우리가 뭐 큰 거라도 바랬냐! 집에 가고 싶다고! 집에!”

그래서 이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소리라도 지르지 않는다면 영영 바깥세상과의 문을 닫아버리고 혼자만의 세상에 갇혀버릴 것 같아서.

하하, 이것 참 대단한 호구새끼 아닌가.

자신이 태어날 때 달려와 축하해주기는커녕 얼굴조차 본 적 없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차르를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총을 쥐던 자신이, 모든 진실을 알고 난 뒤에 한다는 게 고작 저 단상 위에 있는 돼지새끼에게 소리 지르는 것뿐이라니.

이제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영주니 귀족이니 차르니 하면서 젠체하는 위정자들이 부르짖던 ‘야만’이니 ‘비문명화’라는 단어들 말이다.

그건 위선이고, 억압이고, 타인에게 하여금 굴종하고 순종하게 만드는 훌륭한 개목걸이에 불과했다.

“내려와라 이 개새끼야!! 우리가 죽어나갈 때 뜨끈한 벽난로에서 보드카나 까마시던 새끼가 우리보고 뭐?! 그렇게 니들이 잘났으면 니들이 나가서 싸우란 말이다!”

“이봐! 당장 물러나라!”

“헌병 양반! 제발 저 새끼를 한 번만 찌르게 해줘! 단 한 번만이라도!”

모든 걸 알고 나서도 개목걸이를 기꺼이 차고 있을 사람은 적어도 존재하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이삭의 민족 소속, 대민 상담소장 프랑수아 노엘 바뵈프라고 합니다.”

“······.”

“흠흠. 분위기가 많이 안 좋으니 이것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우리 프랑스 정부는 귀하들을 굶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여러분을 먹이고 입힐 모든 돈은 우리 프랑스 국민들의 세금입니다. 국민들의 세금을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선 몇 가지 불가피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점,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그러면 우릴 죽이기라도 하시렵니까?”

“아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항상 말끔하게 면도를 하고 다니는 다른 프랑스인들과 달리, 턱에 거뭇거뭇한 수염이 까맣게 올라온 프랑스인은 어떻게 그런 무시무시한 소리를 할 수 있냐는 듯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렇다면 무슨...?”

“저희는 여러분께 경작지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프랑스인의 세금을 쓰는 대신 여러분이 스스로 자급자족할 수 있게 말이지요.”

“···이 프랑스에 우리에게까지 줄 수 있는 땅이 있습니까?”

“없지요. 대신 바다 건너에는 있답니다. 아칸소라고요.”

“후우. 같은 농민 입장에서 땅 파먹고 사는 프랑스 농민들한테 민폐를 끼칠 수는 없지. 가겠습니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

사상이란 위대하다.

살벌했던 20세기 냉전 당시,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심장이었던 미국에서도 빨갱이는 곳곳에서 자연발생하여 조국의 기밀을 저어어기 멀리 있는 소련 크렘린에 가져다 바치기 바빴다.

왜냐, 그들의 사상이 옳다고 믿었으니까.

물질이란 위대하다.

기업이든 대학교든 4차 산업혁명에 관한 주제를 소개할 때 프레젠테이션에 예시로 나오는 건 전 세계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2009년의 사과맛 스마트폰이었다.

왜냐, 그만큼 충격적이었으니까.

지금의 난, 위대한 사상과 물질을 모두 가지고 있다.

이제 막 태동한 자유주의와 썩어빠진 봉건주의 둘 중에 뭐가 더 나아보이냐고 질문 한다면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들 100명 중 99명이 ‘자유주의’라 답할 거라고 자신한다.

마차와 증기기관차는 비교할 가치도 없고.

그러니 이걸 쓰까서 막 뿌려버리면?

수백 킬로미터를 걸어 심신이 피로해진 사람들에게 증기기관차와 가스등을 보여줘 심리적으로 흔들고, 거기에 자기네 정부가 자신들을 버렸다는 폭탄선언까지 곁들이면?

당연히 펑-하고 폭발하지.

어떻게 보면 내가 원하는 대로 사람의 심리를 조종했다는 점에서 나를 막 안 좋게 볼 수도 있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모습을 그 사람들에게 서슴없이 보여준 것 뿐이다.

소비자마케팅 학의 창시자인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유진 포터 교수님(Michael Eugene Porter) 가로되, ‘물건을 팔고 싶다면 소비자의 니즈와 머릿속을 꿰뚫어보라, 그러면 길이 열리리라.’ 하셨다.

그러니 학점 4.3의 이 기욤 드 툴롱이 어찌 스승의 가르침을 거부할 수 있겠느뇨?

마트에서 판촉행사를 한다고 그걸 소비자의 심리를 조종하는 거라고 말하지는 않지 않나. 그것보다는 빌 게이츠가 전파를 쏴서 사람의 심리를 조종하는 게 더 진정성 있게 들리겠다.

보이십니까, 포터 교수님? 당신의 가르침으로 제가 이렇게 훌륭한 선동가, 아니.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흑흑.

사실 얼굴은 본 적도 없고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지만 아무튼 포터 교수님이 쓴 책으로 공부를 했으니 크게 보면 난 그 분의 제자다. 아무튼 제자임. 아무튼 그럼.

그러나 이렇게 말을 땅땅 내뱉는 것과 달리, 내 머릿속에는 한숨이 늘어나고 있었다.

***

시간을 잠시 돌려, 증기기관차를 시연할 때.

나란히 증기기관차 옆에 쭈그려 앉은 나와 트레비식, 그리고 머독은 서로 묘한 시선을 주고받고 있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두 사람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고, 트레비식과 머독은 증기기관차와 내 눈을 번갈아보며 각종 공구를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가 하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어, 음.”

“그냥 말해주십쇼.”

“철도 레일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뭐가 문제인데요?”

트레비식은 내 말에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철도 레일이 휘어버렸습니다.”

“와, 시발. 좆됐네.”

어째 철도가 영, 곧지 못한 걸 보고 설마설마 했는데. 젠장.

내가 아무리 기하와 벡터, 물리와 화학 때문에 이과를 포기한 문돌이라 할지라도 철도 레일이 휘어버리면 그 위로 기차가 지나다니지 못하는 건 안다.

“문제가 뭡니까?”

“아무래도 레일이 기관차의 하중을 못 버티는 것 같습니다만...”

머독은 어두운 얼굴로 철도를 툭툭 치며 말했다.

아. 안되는데, 오늘은 이게 칙칙폭폭-엔진붕붕하면서 나가줘야 하는데.

“머독 씨. 그러면 아예 못 달립니까?”

“못 달리는 건 아닙니다만, 탈선의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면 안하느니만 못하겠군요.”

트레비식과 머독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 씨... 어쩌지.”

우리 프랑스의 위대함을 보여주겠다-라면서 끌고 왔는데 그게 전복되는 모습을 보여주면 그냥 마이너스를 넘어서 마이너스의 극한이 되어버린다. 그건 절대 사절인데, 그렇다고 안 보여 줄 수도 없고.

“살짝만 한 번 움직여보실래요?”

“살짝이라면... 예, 조금만 움직여 보겠습니다.”

트레비식은 그 정도야 뭐-하는 얼굴로 기관차에 타더니 석탄을 삽으로 퍼 엔진에 넣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석탄이 들어가자, 트레비식은 엑셀처럼 보이는 손잡이를 움직여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 끼기기기긱-!

“잠깐 잠깐. 내려와요, 내려, 내려. 이거 진짜 안 되겠다.”

섬뜩한 소리에, 나는 트레비식 씨에게 말했다.

무슨 귀곡성도 아니고, 철도에서 저런 소리가 나지?

그러나 철도와 기관차를 어떻게 손보기도 전에 구경꾼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사, 사장님. 러시아인들이 다가옵니다!”

이대로면 ‘프랑스의 기술력은 세계 제이이이일!!’이 아니라, 오히려 비웃음만 당할 텐데. 점점 주저앉는 철도에서 저 치들의 시선을 떼기 위해서는 뭔가, 뭔가 큰 게 필요했다.

“어... 트레비식 씨! 빨리 그 뭐냐! 경적! 경적울려요!”

“경, 경적이 어디 있더라···! 아, 여기 있다!”

- 뿌우우우-!

- 갸아아악! 괴물이다!

철로가 뿌득거리며 점차 주저앉는 소리를 가리려면 이 수밖에 없었다.

“계속 울려요! 계속!”

- 뿌우우우-!

***

레일이 휘어버리고 주저앉아버린 이유는 간단했다. 기관차가 조오오오올라 무거우니까.

근데 그렇다고 레일이 휘나? KTX로 수천 명씩 실어나르던 21세기 기차는 그러면 뭐, 비브라늄 레일을 쓴 건가?

하지만 휘었다. 휘어버렸단 말이다. 시발.

그러니 내가 뭐 어떻게 하겠나. 무슨 철이 우리 선로에 들어가는 지부터 싹 뜯어내서 조사해봐야지.

“각, 각하?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여기가 파리 조병창이죠? 철강 쪽 담당자들에게 기욤 드 툴롱이 전문가를 찾고 있다고 말해주십쇼. 보수는 섭섭잖게 드릴게.”

맨땅은 아니더라도 헤딩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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