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0화 멋진 신세계 (2) (200/341)

멋진 신세계 (2)

- 프랑스 개구리 놈들이 우릴 괴물밥으로 주려한다!

- 으아악! 자이체프가의 장남이 여기서 죽을 수는 없어!

- 끼에에엑! 도망쳐!

“어, 어, 아저씨들 밀지마요!”

대관절 앞서가던 동료들이 걷다 말고 갑자기 이상한 헛소리를 하며 우르르 뛰기 시작하자, 드미트리 또한 거대한 바다 위의 힘없는 돛단배마냥 사람의 파도에 휩쓸리고 말았다.

“켁, 켁! 이러다가 나 깔려 죽어! 죽는다고!”

“끼야아아악!”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군화에 정강이 쪼인트도 몇 번 까이고, 어떤 사람이 달리느라 앞뒤로 휘두르던 팔꿈치에 관자놀이도 몇 번 얻어맞고. 그렇게 한참을 고생한 끝에, 드미트리는 어느새 대열의 앞에 남겨지고 말았다.

대체 이 앞에 뭐가 있길래, 젊은 또래던 나이 한참 먹은 아저씨던 다들 겁을 한 바가지로 주워 먹고는 ‘돔황챠-!’하면서 뛰기 시작한단 말인가.

어디 뭐가 있나 한 번 보자. 얼마나 무우우서운 거길래.

···어라.

“저, 저게 뭐야.”

드미트리는 덜덜 떨리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자기도 모르게 읊조렸다.

난생 처음 보는 거대한 무언가가 검은 연기를 하늘로 토해내고, 햇빛에 반사된 강철 몸이 번쩍거리며 눈을 시리게 만들었다.

저 덩치면 예전에 할아버지가 말씀해주신 코끼리라는 오스만의 괴물인가? 아니면 마법사나 마녀, 집시가 피의 제물을 바쳐 탄생시킨 괴물인가?

성경에 나오는 사탄이 인세에 강림한다면 저런 모습일까. 손이 달달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려 당장에라도 땅에 털썩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뿌우우우-!”

“흐엑! 흐엑! 흐아아악!”

괴물이 노성을 지르자, 드미트리의 다리에 풀썩 꺾여버리고 말았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압도적인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제 드미트리는 고개를 돌려 저 멀리 걸음아 나 살려라-하고 도망가기 바쁜 동료들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아, 아, 아저씨들! 나 좀 데려가줘요!”

“뿌우우우-!”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 주님이시여, 영원한 빛으로 날 보호하소서. 거룩하신 지혜로 날 이끄시고 내 가는 길 어둠에 싸여 있어도 신성한 빛으로 내 영혼을 이끄소서.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 주님이시여···.”

사람이 핀치에 몰리면 신앙을 찾게 된다고 하던가.

드미트리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정교회 사제마냥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그, 거기 뭐하슈?”

“전능하신··· 에?”

“뭐하냐니까?”

“뭐··· 하냐니, 당연히 저기 괴물이 있으니까...”

드미트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도 그럴게. 자신에게 말을 걸어 온 건, 괴물의 눈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에서 사람이 반쯤 상반신을 내놓고 있는 사람이었다.

“괴물? 아, 이 ‘파리 증기기관차’말하는 거요?”

텅- 텅-.

괴물, 아니 증기기관차라는 무언가에 탄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기관차의 몸체를 손바닥으로 치자 쇠 특유의 텅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증기··· 기관차?”

“그래. 증기기관차. 그리고 우린 이삭의 민족 소속 기술자요. 기술자. 괴물에 탄 사람이 아니라.”

“그러면 저게 기계란 말인가요?”

“하하, 당연히 기계지! 그럼 뭘로 보이쇼? 그런데...”

기술자는 눈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드미트리를 훑어보더니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거, 지금 겨울인데 길바닥에 그러고 있으면 안 춥소?”

“큽.”

드미트리는 서둘러 땅을 짚고 일어서려했다. 아직 다리에 힘이 다 돌아오지 않아서 다리가 조금씩 후들거렸다.

겨우 기물 따위에 괴물이니 뭐니 헛소리를 하면서 기도문까지 외우다니.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진다.

“크흠. 큼. 그런데 이건 누, 누가 만드는 거죠?”

“낄낄, 얘기를 막 돌리는 거 보니 퍽 부끄러운가보지?”

“아아아니. 그게 아니고. 궁금하니까.”

“러시아인치고 프랑스어 꽤나 하는구만. 그래, 답해드리리다. 기욤 드 툴롱 사장님이 만들라고 하셨소.”

기욤 드 툴롱이라면... 그때 드미트리 자신과 악수했던 프랑스의 고관나리 아닌가. 그 이름을 여기서 듣게 되다니.

“그러면 여기서 뭘 하는 거죠?”

“주행테스트. 설계도대로 잘 가나 실험해보는 거요.”

“완성되면 그걸로 뭐하는데요?”

“뭐, 그거야 사장님이 쓰기 나름이지만. 물건도 나르고 사람도 나르고, 지금보다 교통이 수십 배는 편해지겠지. 겨우 말이나 소 따위를 타고 다니는 지금의 삶이랑은 비교도 안 될 걸? 인간이 드디어 생물을 넘는 힘을 가지게 된 거나 마찬가지니, 어마무시한 진보지. 하하하!”

“그렇··· 군요.”

드미트리는 자기도 모르게 이 증기기관차라는 걸 눈으로 훑고 또 훑고 있었다. 마치 불을 처음 발견한 인류처럼, 뽀롱뽀롱-하고 말하는 안경 쓴 펭귄을 처음 접한 아이들처럼.

그러나 드미트리가 이상한 게 아니었다. 러시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개발되었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본 적 없는 첨단기술과 혁신의 집합체에게서 눈을 뗄 수 있다면 그게 이상한 사람이리라.

“그, 드미트리?”

“너 괜찮은 거냐?”

“허, 날 버릴 때는 언제고.”

“에이. 뭘 버렸다고까지 하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드미트리가 괴물에게 잡아먹힐 거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던 동료들도 이쯤 되자, 슬금슬금 다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저게 뭐냐?”

“기계래요.”

“이, 이렇게 큰 게 기계라고? 허. 보기엔 영락없는 쇳덩어리인데.”

“요 안에 대체 뭐가 들어있는 거지?”

두려움이 사라지고, 호기심이 그 자리에 샘솟기 시작하자, 7천명에 달하는 러시아인들은 이 거대한 근대과학의 산물을 눈으로, 귀로, 또 촉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

저벅, 저벅, 저벅.

“그런 게 우리 마을에 들어오면, 말 없이도 요기저기를 죄 쏘다닐 수 있는 거 아닌가?”

“이야,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그러면 나도 하루 시간을 내면 구경을 하고 올 수 있는 건가?”

“헹. 구경은 무슨. 영주님들이 허가부터 내줘야지.”

“그건 그렇긴 한데... 내주시지 않을까? 드미트리! 넌 어떻게 생각하냐?”

“네? 아, 네 뭐. 그렇겠죠?”

“그러면 그렇다. 아니면 아니다 말해야지. 하여간에 싱거운 녀석.”

“하... 하하... 그러게요.”

저벅, 저벅, 저벅.

“쩝. 집에 가면 바로 파종을 해도 시간이 모자랄 텐데. 어쩌지?”

“아저씨 사는 곳 우리 옆 동네 아뇨? 내가 빨리 하고 가서 같이 심어줄게. 우리 집에는 무려 소가 있다고 소. 늙은 놈이긴 해도 아직 팔팔해.”

“이야아. 그러면 나야 좋지. 한시름 덜었구만!”

“······.”

저벅, 저벅, 저벅.

병사들이 두런두런 나누는 소리와 군홧발이 바닥을 내딛는 소리가 합쳐진 이곳에서.

드미트리는 말없이 생각에 잠겨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모병관은 분명 ‘조국 러시아와 차르를 위해 신앙을 모욕하고 인간이기를 포기한 프랑스인들을 단죄하자’고, ‘영광된 조국의 미래와 러시아인들의 미래를 위해서 싸우자’고 말했었다.

한참 동안 배에서 멀미를 하고서 코르시카에 도착하기까지. 그리고 코르시카에서 포로로 잡히기까지, 그 고생길에서 한 번도 그게 그릇되었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조국 러시아 제국과 차르를 위해서 싸운다면 그것이 곧 러시아인들의 미래와 영광을 열어주리라 믿었으니까.

그런데 포로로 잡히고 나서 드미트리가 겪은 일들은 자신의 세계를 점차 뒤흔들기 시작했다.

- 에이, 그러지 말고 일어서세요.

- 우리 프랑스엔 주인도 종도 없습니다.

- 자유와 평등과 박애를 위해 싸우는 우린 절대 포로를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정 못 믿겠다면 지금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프랑스인들이 신앙을 모욕하고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포기했다면. 같은 동족을, 그것도 부상당한 동료들을 버리고 자기들끼리 살아서 도망간 러시아 귀족나리들은 대체 무언가?

- 이거? 이건 괴물이 아니라 증기기관차라는 거요.

- 말이니 소니 하는 걸 넘어서, 어마무시한 진보지! 하하하!

프랑스인들을 무찌르면 영광된 조국의 미래와 러시아인들의 미래에는 무엇이 찾아오는가? 정말로? 드미트리의 생각에는 황량하기 그지없는 얼어붙은 동토에서 손과 발이 까져라 땅만 갈아대는 민초들뿐인데. 글쎄.

“저녁 배식이다! 저녁 배식! 한 명씩 나와서 받아가도록! 목적지가 멀지 않았다!”

“아이고 감사합니다요.”

“음? 거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정신 차리고 받아가라.”

“···고맙습니다.”

드미트리는 프랑스 헌병이 준 빵을 받아들었으나, 먹을 생각이 들지 않기에 그냥 나중을 기약하며 자신의 군장 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런데, 헌병 양반! 이제 어두컴컴해질 텐데 더 걸어도 괜찮소?”

“곧 파리니까 괜찮다. 계속 이동하도록.”

“저게 뭔 소리여. 파리면 뭐 밤이 아니기라도 하다는 거야?”

“······진짜 낮처럼 환한데?”

“······세상에.”

생각에 빠져있던 드미트리도 저절로 상념에서 깨어나 입을 떡하니 벌릴 수밖에 없었다.

뭐랄까. 별천지였다. 별천지.

태양처럼 환하기 그지없는 가로등이 거리 곳곳에 꽂혀있고, 사람들이 그 거리를 자유롭게 활보하는 별천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살아왔던 드미트리도, 이름 모를 촌구석에서 온 다른 병사들도, 모두가 그 마법 같은 광경에 넋을 잃고 쳐다만 볼 뿐이었다.

“자, 계속 이동한다.”

“······.”

“이보쇼. 헌병 양반.”

“왜 그러지?”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게요? 아니면 저건 마법이요?”

“아니. 이성과 합리다.”

저벅, 저벅, 저벅.

또 다시 군홧발을 옮기길 한참. 드미트리와 포로들은 거대한 광장으로 들어가 잠시 쉬게 되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요?”

“여러분의 포로협상 건에 관해 새로운 소식이 들어왔다.”

“집에? 집에 갈 수 있다고?”

“정숙, 모두 정숙해라.”

헌병은 잠시 손을 올려 흥분한 러시아인들을 진정시켰다.

- 괜찮겠습니까?

- 총감 각하께서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 알겠습니다.

헌병대는 서로 눈길을 주고받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세한 사항은 러시아 제국 대사가 직접 나와 여러분께 말할 것이다.”

그 말이 떨어지자, 프랑스 헌병대의 호위를 받으며 한 사람이 광장에 위치한 단상에 올라가 입을 열었다.

“큼. 큼.”

“대사 나리! 어서 집에 보내주십쇼! 아내와 아이들이 보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내년 농사를 지으려면···.”

“어허! 어딜 불충한 패잔병들이 입을 놀리느냐!”

“······예?”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러시아 외교관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말했다.

“수보로프 야전 원수께서는 불패의 명장이시다! 참으로 안타깝도다! 그 분께 충용무쌍한 병사만 있었더라도 제국이 이런 불명예를 가지고 가지는 않았을 터인데!”

- 제국 최고의 명장이 졌다. 다 너희 때문이다.

- 너희들이 제대로 싸우기만 했어도 우리가 이겼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었다. 무언가.

“그,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저희는 귀족 나리들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그렇습니다! 집에 보내주세요!”

“집? 허, 집은 무슨! 감히 패잔병 따위가 제국을 좀먹으려 든 단말이냐? 너희 같은 기생충들은 당장에, 억!”

그 순간, 누가 던진 빵 한 덩이가 러시아 제국 대사의 머리를 정확하게 맞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