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화 작은 거인의 빈자리 (5) (198/341)

작은 거인의 빈자리 (5)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처먹을.

일부러 이 추운 겨울에 얇디 얇은 홑옷만 입고 다니고, 며칠 동안 그렇게 십자가에 대고 ‘병에 걸리게 해주세요 주님’하고 기도를 올렸건만, 오늘 아침도 눈꺼풀이 가볍다 못해 상쾌할 정도로 떠지는 걸 보니 주님과 성모님은 나를 버린 게 분명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시간 아깝게 성당 따위 다니질 말걸 그랬어. ···아니면 가톨릭 말고 칼뱅파를 믿었어야했나?”

“여보, 일어나자마자 갑자기 무슨 소리에요?”

“···그런 게 있소. 부인.”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서둘러 잠옷 대신 얇은 외출복을 걸쳤다.

“샤를? 샤를! 아침도 안 먹고 어디가요?”

“지금 밥이 문제가 아니라니까? 이 뒤무리에의 건강에 우리 가족 전체의 운명이 달렸있단 말이오!”

“아니, 그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래요? 당연히 당신 건강이 좋아야 우리 가족이 좋죠.”

“···그러니까. 그게...”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까.

“···후우. 그러니까 재무총감이 날 식민지 총독으로 보내려 한단 말이오! 식민지 총독!”

“어머머! 그러면 승진하는 거 아니에요? 총독은 준장이 아니라 소장직이잖아요!”

“승···진이 맞긴 한데...”

“재무총감이 그 잘생긴 청년 맞지요? 얼굴도 잘생기고 키도 크던데 사람 보는 눈까지 있네! 호호!”

아내는 이제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온갖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 건데요? 생도맹그? 인도?”

“북아메리카라오. 미국 옆에.”

“다행이네 다행이야!”

“···뭐?”

“생도맹그랑 인도는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 덥다더라고요. 미국이면 딱 살기 좋은 날씨겠네요! 어머, 내 정신 좀 봐. 그쪽 사교계에 어울리려면 뭘 공부해야하지? 영어를 조금 배워놔야 하나?”

“그 뭐냐, 그...”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아니. 아니오, 부인.”

뒤무리에는 차마 눈을 빛내는 아내에게 협잡과 음모, 그리고 비정함이 감도는 파리의 어두운 면을 알려줄 수 없었다.

잘생긴 재무총감은 사실 악마의 하수인마냥 사악하기 그지없는 작자고, 지금 그 자가 뒤무리에의 약점을 잡고서 당장 아메리카로 가지 않으면 오체를 분시해 샹 드 마르스 광장에 걸어놓겠다고 협박 중이란 걸 어떻게 말하겠나.

그렇게 속으로 혼자 끙끙대니 이제는 미쳐버릴 것 같다. 당장 바람을 쐬지 않으면 정말로 정신병에 걸리고 마리라.

“···내 잠시 나갔다 오리다.”

“운동 가는 거지요? 잘 다녀오세요. 당신 승진 겸 내 오랜만에 솜씨 좀 발휘해서 맛있게 차려줄게요.”

“정말 미쳐버리겠군.”

“네? 방문 너머라 잘 안 들려요!”

“잘 다녀오겠다고!”

답답한 마음에 자택을 나온 현직 준장, 아니지. 이제 소장(진)이 되어버린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는 오늘도 일어나자마자 홑겹으로 자택 정원을 뛰기 시작했다.

“헉헉... 주님, 주님 제발 절 아프게 해주십시오. 제발! 제가 헌금도 많이 내드리지 않았습니까!”

아파야 한다. 병 때문에 아프다고, 요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갈 수가 없다고 말하면 그 악마 같은 놈도 어쩔 도리가 없을 것이다. 병자를 땅도 물도 낯선 곳에 보낸다면 세간의 시선이 곱지 않을 테니 말이다.

완벽하다. 완벽한 계획이다. 한 술 더 떠 이대로 병실로 뒤무리에가 기동방어를 해낸다면 의가사 제대도 꿈이 아니리라.

그러나 그런 주인의 계획과 달리, 수십 년의 군생활로 다져진 몸은 쌩쌩하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요즘 혈색이 좋아지고 밥맛도 늘어나는 게 아프긴 커녕 더 건강해지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해졌다.

“헉, 헉. 젠장할 내가 이 나이 먹고 이렇게 똥개훈련을 해야 한다는 게 말이나 되나?”

빌어먹을 주님 같으니. 제가 큰 거라도 바랬습니까? 경치 좋고 물 좋은 곳에 토끼 같은 아이들과 여우같은 아내와 함께 큰 저택 하나 짓고 여유자적하게 살고 싶다는 게 그리도 큰 소원이랍니까?

지쳐버린 뒤무리에가 속으로 있는 지 없는 지 의심스러운 신을 향해 한바탕 욕지거리를 쏟아내고 있자, 뒤편에서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짝, 짝, 짝.

“브라보! 브라보!”

“거기, 거기 누구요?”

뒤무리에가 돌아보자, 서른 정도 됐을 법한 젊은이가 흐뭇한 얼굴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신체를 강건하게 단련하는 그 근면성실함. 역시나 상승장군이신 뒤무리에 장군님이십니다! 정말 감명 깊게 봤습니다.”

“아니. 당신 누구냐니까?”

“죄송합니다. 소개가 늦었군요. 전 오귀스탱이라고 합니다. 장군님.”

“오귀스탱?”

젊은이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품속에서 종이쪼가리를 건네주었다.

[오귀스탱 로베스피에르. 산악파 부서기 겸 국민의회 의원.]

“···오.”

“저희 산악파 당수님이신 로베스피에르 당수께서 장군님을 꼭 한 번 당사로 모시고 싶다고 절 사절 삼아 보내셨습니다.”

“어, 어? 절, 왜?”

“왜냐니요. 장군님처럼 의기 넘치는 분을 모실 수 있는 기회가 그리 흔히 오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곧 타지로 발령이 나실 유능한 분이신데 지금 모시지 않으면 언제 기회가 날지 모르는 일이지요.”

어서 옷 입고 나오시지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장군. 산악파 당수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입니다.”

“소, 소인이야말로 반갑습니다. 의원 각하.”

“하하, 변방에서 우리 인민들을 위해 불철주야 고생하시는 분께서 소인이라니요. 말씀을 높이시지요. 아. 그렇지. 아예 편하게 막시라고 불러주십시오.”

“아닙니다. 어찌 당수님의 이름을 그렇게 부를 수···.”

뒤무리에는 갑자기 문득 서늘해진 자신의 목을 손으로 감싸 쥐며 말했다.

“알, 알겠습니다. ···막시 의원님.”

“하하하! 좋습니다, 장군. 벌써부터 친해진 것 같아 기분이 좋군요. 자, 이제 들어가시지요. 장군께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습니다!”

***

“음후헤헤. 크헤헤헤. 으히히히.”

벌써부터 구르고 있을 뒤무리에의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로베스피에르에게 수개월 동안 경제를 가르쳐준 1타 강사 기욤이 보기에 지금쯤 뒤무리에는 골수까지 빨아 먹히고 있을 거다. 로베스피에르란 사람은 자기가 모르면 그걸 알 때까지 파거든.

그런데 우리 로베스피에르 씨는 군대에 정말 관심이 많다. 정치장교니, 뭐니 하는 그 무서운 제도부터 시작해서 군사 쿠데타 걱정까지 우리 모두 같이 보지 않았나.

그렇게 군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신 우리 로베스피에르 씨께서 뒤무리에라는 장난감을 손에 쥐었다면 보나마나지. 무슈 단두대, 믿습니다. 오오.

이제 뒤무리에는 로베스피에르 손에서 영영 믹서기에 시도 때도 없이 갈려나갈지, 아니면 아메리카로 런을 쳐서 내 밑에서 적당히 갈려나갈지 선택해야 한다.

으음. 제가 보기엔 후자가 그나마 나을 듯 시프요. 관대한 나는 광산 한두 개 처먹는 거 봐줄 용의가 충분하지만 우리 로베스피에르 씨의 옆에서는 국물 한 방울도 못 먹을 테니까.

우리 뒤무리에 씨는 머리가 핑핑 도는 엘리트니, 충분히 훌륭한 선택을 하리라 믿어용. 오홍홍.

“뭘 그리 웃으십니까?”

“그런 일이 있네요. 탈레랑.”

“그래요? 전 아예 못 웃겠는데.”

“왜요, 외교부에 무슨 일 있습니까?”

“듣고 싶으십니까?”

탈레랑의 입 밖으로 나온 건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 우리 프랑스 혁명왕국 외교부는 러시아와 스페인 두 나라에 대해, 지금 당장 자신들이 저지른 죄 값에 해당하는 배상금을 지불하고 사로잡힌 귀국 포로에 관한 협상을 개시할 것을 요청한다.

- 우리 스페인도 귀국의 배상금 안과 북아메리카 할양은 인정하지만 거기에 산토 도밍고까지 할양하라는 건 너무나도 큰 대가라고 생각합ㄴ···.

- 아잇 씻팔! 피레네 산맥 뚫고 내려가 줘? 마드리드에서 대포맛 한 번 봐볼래?

- 알겠소! 알겠소! 스페인 왕국은 프랑스의 모든 요청에 응하겠소!

그럼. 당연하지. 졌으면 그만한 대가를 내놓아라, 이 말이야. 까놓고 말해서 우리가 졌으면 당신들은 나 포함해서 혁명파 죄다 모가지를 쳤을 거 아뇨.

- ···우리 러시아 제국은 프랑스의 배상금 안에는 동의하지만 포로 협상 건에 대해선 조금 말미가 필요하오.

- 말미라니? 당신네 나라 사람들 아닙니까. 러시아는 봄에 농사 안 지을 거예요?

- 그렇긴 한데.

- 뭘 그래. 그러면 빨리 데려가라니까?

- 본국의 차르께서는... 포로를 데려오길 원하지 않으시오.

- 그게 뭔 ㅆ···?

이 충격적인 말을 들은 우리 외교부는 있는 머리를 모두 짜내고 이역만리에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간첩들을 동원해 겨우 진상을 알아낼 수 있었다.

- 그것이, 그것이 정말이느냐?

-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사실이옵나이다. 수보로프 원수가 패했사옵니다.

- 그럴 리 없다! 그럴 리가! 악! 아아악! 세상에,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 하! 고정하시옵소서!

- 수보로프 원수마저 믿을 수 없다면 나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가! 곧 농부들이 낫과 망치를 들고 이 궁전에 쳐들어올 것이야!! 근위대! 근위대!!

- ···젠장, 이러다가 차르가 눈깔 뒤집히면 우리 다 뒤지는 거 아뇨?

- 이미 미친 것 같긴 한데...

- 비꼬지만 말고 뭐라도 생각해보시오.

- 그러는 상공부대신은 생각 있소?

- 하나 있긴 한데...

- 뭘 어떻게 할 셈이오?

- 패전을 수보로프 탓으로 돌리지 말고, 다른 원인을 찾아보는 건 어떻소?

혁명에 경기를 일으키는 늙은 차르의 편집증이 도를 넘어설 걸 경계한 귀족들은 샌드백을 찾기 시작했다. 아주 만만하고, 후유증이 없을 샌드백.

- 사, 사실 수보로프 원수가 패한 것은 휘하에 있는 병사들이 제대로 된 정병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폐하.

- 그렇사옵니다. 프랑스가 비문명화 되었다고는 하나, 그들의 군대는 아직까지 7년 전쟁 당시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전 원수가 명장이라곤 하지만 다루는 병사들이 빗자루만도 못하니, 그런 적을 상대로 어찌 이길 수 있겠습니까? 두 달을 버틴 것도 능했던 것입니다.

그래. 아주 만만한 게 평민들이지. 때릴 때 찰지고, 나중에 귀찮게시리 책잡힐 일도 없고.

안 그래도 사람을 밭에서 추수한다는 말이 나오는 러시아로서는 굳이 저 7천여 병사들에게 목을 맬 필요도 없고.

아주 누이 좋고 매부 좋고야? 졸지에 남의 나라가 떠맡게 된 저 포로들 빼면 말이지.

“외교부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포로 말씀이시지요?”

“그것 말고 없죠.”

“사실, 이건 아래쪽에서 내놓은 안건이긴 합니다만.”

탈레랑은 내게 몸을 기울여 말했다.

“광산이나 어업 쪽에 투입하는 게 어떨지...”

이열. 그것 참 노예제나 할 법한 상상인 걸.

“큼큼. 그렇게 보지 마십시오. 각하. 어디까지나 ‘안’입니다. 결정된 게 아닙니다.”

“다른 방안은 없습니까?”

“아직까지는.”

아 이거 좀 골치 아픈데.

그냥 두면 식량과 세금만 축낼 거고. 그렇다고 땅을 떼어 주면 농민들이 아까운 땅 러시아 놈들 준다고 뭐라고 할 거고. 중노동에 투입하면 그건 혁명정신에 어긋나고.

나는 한참 동안 턱을 쓸어내리다가 말했다.

“혹시 북아메리카 개척단 쪽에 보내는 건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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