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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화 작은 거인의 빈자리 (4) (197/341)

작은 거인의 빈자리 (4)

“혹시 지금 처우에 불만이 있으신가요? 진급이라던가, 받고 싶은 훈장이라던가. 아니면 원하시는 보직이라던가.”

“각하! 이 뒤무리에가 그렇게 땡깡이나 부리는 삿된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어, 음.

솔직히 그렇게 보이는데요 -라고 말하고 싶지만, 가정교육을 착실하게 이수한 사회인이자 문명인으로서 서른 넘게 차이나는 사람에게 그런 짓을 했다간 내 평판이 작살난다. 당장 이 사무실에 있는 사람이 몇인가.

나는 친절한 은행원의 얼굴로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하하,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뒤무리에 장군님이 속앓이를 많이 하셨군요. 일단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부터 천천히 얘기해보시겠습니까?”

“전역! 결단코 전역!”

흠. 내가 혹시 사람이랑 대화하는 게 아니라, 반복재생 틀어놓은 카세트테이프랑 대화를 하고 있는 거였나? 이거 도저히 말이 안 통하는구만.

아무리 ‘고객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내가 외친들, 저쪽이 배 깔고 누워서 ‘에베벱 난 아무것도 안 들려!’를 시전 한다면 딱히 수를 쓸 수 있는 것도 없다.

애초에 서로 대화부터 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거 아니겠나. 상대가 침팬지면 이쪽이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에 나오는 오은영 박사님이라 해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러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 뒤무리에 씨의 대뇌피질 속에 뭐가 들어있을지 한 번 생각해보자.

내 눈앞에서 지금 고래고래 소래를 지르는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 씨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7년 전쟁에서 야전으로 뒹굴던 참전용사. 그 다음에는 전직 국가방첩대, 한국으로 따지면 정보사령부 참모장교 코스를 거쳐서 보급사령부 부사령관까지 해먹은 엘리트 장교.

코스 따라 쭉 승진하고 승진해서 별을 달고 난 뒤엔 낭트 지역사령부 사령관으로 영전.

그러다가 혁명이 터지고 오를레앙 옆에 붙어 왕당파와 혁명군 사이를 요리조리 재다가 끝내 우리 혁명군 쪽에 가담한 철새.

마지막으로 91년과 93년에 터진 두 번의 전쟁에서 프로이센과 스페인을 상대로 방어전 승리. 특히나 마지막 전투에서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오는 스페인군의 턱을 엽병연대로 으깨버리며 대승.

흠.

비록 이 인간의 서류철에 철새라는 오점이 있긴 하지만, 두 번이나 구체제 국가들의 침략을 자의든 타의든 격퇴한 이상. 이제는 혁명군과 아예 한 배를 탄 거나 마찬가지다.

능력 때문이냐고?

아니. 능력이야 특출 난 게 이미 확인되지 않았나. RPG게임에서야 도적이 표창던지기 대신에 성기사의 방패던지기나 사제의 힐링 스킬을 배우면 스탯 배분 잘못한 쓰레기 망캐가 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단 말이지.

21세기 기업채용공고만 보더라도 문과 계열 사무직은 ‘이과적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 좋겠음’, 이과 계열 연구직은 ‘문과적 마인드를 탑재했으면 좋겠음’이라는 아수라 백작 뺨칠 인재를 구하지 않나. 문돌이인 내가 그런 거 때문에 대학을 상경계로 진학했었고.

그런데 뒤무리에 이 인간. 내가 다 감사할 정도로 아아아주 착실하게 엘리트 장교코스를 거쳤다.

방첩대 출신이라 간첩 잡아내는 것도 잘하고, 보급사령부 출신이라 대가리 핑핑 잘 돌아가고, 야전에서 굴러도 봐서 전쟁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고.

이야! 신난다! 훌륭한 노예를 얻었다!

똥별 천지인 대한민국 육군에서 병장따리로 제대하며 볼 꼴 못 볼 꼴 다 본 내가 보기에 이 인간은 심성이 올곧지 않다 뿐이지 결코 똥별 축에 끼울 수 없는 인재다.

합법적으로 이 인간을 부릴 수 있는 내 입장과 라파예트 사령관의 입장에서는 매우매우 흡족하기 그지없다.

그러니 이 인간이 우리와 한 배를 탈 수밖에 없는 건 능력 때문이 아니라. 정치와 협잡, 배신이라는 더러운 영역 때문이다.

세 번이나 구체제의 배때지에 사시미를 찌른 인간을 대체 어떤 1신분 나리가 품고 싶어 할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내가 친절하게 탕플탑의 정신병동을 열어줄 용의가 있다.

삼국지의 여포도 애비를 세 번 갈아치우고 마지막으로 조조에게 사로잡혀서는 조조를 네 번째 애비로 삼겠다고 발광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러니 당장에 이 인간이 다른 나라로 망명하는 순간 뒤무리에의 목을 따고 싶어 하는 귀족 나리들이 많을까, 아니면 어화둥둥 해주는 귀족들이 많을까. 저는 아무래도 전자가 아닐까 시프요.

그러니 일단 이 인간이 뒤로 무슨 꼼수를 부리던 다 내 손바닥 위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

심지어 내가 명목상 상관이니 나도 지금 친절한 은행원의 얼굴 대신 진상이 되어 바닥에 배 깔고 ‘에베벱 나도 안 들려’를 시전하면 저쪽도 딱히 자기의 의지를 관철할 수단이 없다.

“각하, 제발 전역시켜주십쇼!!”

“씁. 기다려보세요. 생각 중이잖습니까.”

오를레앙을 팔아넘기고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떡고물에 꽤 관심을 보이던 인간이었다. 지금 가만있으면 이제 소장이 뭐야, 중장 진급까지 할 텐데. 대체 왜?

어디보자. 오를레앙을 팔아넘긴 건, 당장 자기 목숨이 경각에 달해서 그랬다고 치고. 낭시 지역사령관 시절에 자기 가산까지 몽땅 처분하면서 도시를 지킨 것도 자기 목숨 때문이었고.

잠깐만. 이 인간이 그러고 보니까 왜 최후방인 툴루즈에 가 있지? 시민들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타인을 단물까지 빨아먹으려하는 라파예트 성격에 당신 같은 사람이라면 최전선에 박아놨을 텐데 말이야.

스페인은 프랑스의 오랜 우호국이다. 이번에 스페인이 우릴 공격한 건, 저 새끼들 대가리가 무슨 연유인지 갑자기 회까닥 돌아버려서 그런 거지 결코 정상적이거나 이성적인 이유가 아니었단 말이다.

그러면··· 라파예트가 부임시킨 게 아니라, 뒤무리에 자기의 의지로 강력하게 툴루즈 행을 원했다는 건데.

치적을 쌓기 쉬운 전방이 아니라 따분한 최후방에 가고 싶어 하는 장군이라. 이거 귀하네요.

음...

으음...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 부패했지만 다치기 싫어하는 소심한 자아의 소유자... 오호라. 그렇군요.

“뒤무리에 장군님.”

“예?”

“잠깐 걸으시겠습니까? 여기 보는 눈이 좀 많으니.”

“아, 예.”

“이보게, 기욤. 그게 무슨 소린가! 지금 도망가는 게야?”

“무슨 소리십니까, 콩도르세 총감님. 엄연히 이것도 나랏일이라구요.”

우리 두 사람은 사무실 나서서 파리의 거리로 나아갔다. 밤이었지만 가스등이 군데군데 켜져 있어,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장군님.”

“예. 각하.”

“거, 알만하신 사람끼리 왜 그렇게 말을 배배 꼬십니까?”

“······예?”

“예-는 무슨. 본인이 가늘고 길게 살고 싶으시다고 그렇게 국가의 부름을 외면하면 쓰겠습니까?”

“가, 가늘고 길게 살고 싶다니요. 하, 하하, 명예를 좇는 군인에게, 농이, 심하십니다. 각하.”

이거 봐라. 긴가민가해서 한 번 툭 찔렀는데 아주 더 찔러달라고 발작을 하네?

***

시발.

좆됐다. 아무래도 나는 좆 된 것 같다. 그것이 내 결론이다.

아마 지옥의 문지기 케르베로스도 이 악독한 놈보다는 자비가 있으리라.

나는 소매를 올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는 땀방울을 닦아냈다.

“뭘 그렇게 땀을 삐질삐질 흘리십니까? 12월이라 그리 덥지도 않은데.”

“땀, 땀이라니요. 각하. 하, 하하. ···그 뭐냐, 전장에서 하도 오래 생활했더니 흙먼지를 털어내는 습관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흐음, 그래요?”

괴물새끼. 미친 괴물새끼. 다 알고 있다는 듯 이죽거리는 걸 보라지.

아니다. 다 알고 있는 게 맞겠구나.

팔레 르와얄에 얼굴을 내비칠 때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이런 놈이 정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스물 초반이 맞는가? 속에 진짜 죽은 리슐리외라도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거 아닌가?

“뭐, 그렇다고 치고. 친애하는 뒤무리에 장군님.”

“예, 예?”

“야전이 싫으시면, 파리로 오셔도 되는데. 장군님 같은 인재야 어디에서나 꼭 필요하니 말입니다. 하하.”

삐-용 삐-용. 머릿속 정치력 센서가 경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내뱉는 말 한마디로 나의 은퇴 후 삶이 어떻게 될지 결정되리라.

최대한 신중하게. 뒤무리에는 입을 열었다.

“···말씀은 감사하오나, 이미 국민들께 죄를 지은 몸으로 어찌 또 공직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파리는 우리 프랑스의 심장 아닙니까.”

“그래요? 파리는 못 오시겠다?”

소악마는 품에서 궐련을 하나 뽑더니 그대로 입에 물며 말했다.

“그거 아십니까, 뒤무리에 장군님?”

“예?”

“장군님 덕택에 우리가 이번에 스페인에게서 뜯은 북아메리카 땅이 꽤나 크답니다.”

스페인? 북아메리카?

“그, 그건, 조금 먼 곳 아닌가 싶습니다만...”

“에헤이. 왜 또 말이 바뀌실까?”

악마 놈은 자신의 팔을 잡더니, 어깨동무를 태우며 이어 말했다.

“파리에서도 일을 못하겠다! 야전에서도 일을 못하겠다! 그래서 제가 좋은 근무지를 추천해드리지 않습니까.”

“그, 전, 전역으로 속죄를 한다면...”

“무슨 소리? 죄를 지었으면 일을 해서 갚으셔야지. 어딜 무책임하게 내빼려하십니까?”

***

어딜 혼자 도망가시려고.

본래 연예인들은 죄를 지으면 영화와 드라마를 찍어서 보답하고, 야구선수와 축구선수는 운동으로 보답하며, 정치인들은 사죄하는 마음을 가지고 더 정치를 잘해보겠다.- 라는 개소리를 뉴스로 들으며 자란 한국인은 ‘내가 다 책임지고 물러나겠다’ 수준의 궤변에 절대 넘어가지 않아요?

“북아메리카가 어때서요? 어마무시하게 큰 미시시피라는 강도 흐르고, 막 그 뭐시냐. 자연 그 자체! 내츄럴 힐링캠프!”

“소장은 이미 나이가 많이 차, 무리한 대외 활동은 불가능하여···.”

- 여유로운 전원주택 생활하게 해준다니까? 겸사겸사 업무도 같이 좀 보면 되겠네. 치안도 좀 잡고. 정착민들도 관리하고. 이야 말만 들어도 참 좋다. 그렇지?

- 응, 안 가. 개소리 하지 마. 절대 안 갈 거야.

쯧. 여기까지는 손을 쓰지 않으려 했건만.

“거, 제가 저번에 우연찮게 뒤무리에 장군님의 가산을 확인해볼 일이 있었지요?”

“예?”

“가산을 홀라당 털어서 적을 막으셔서 그걸 저와 재무부가 보상해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랬지요.”

“사실 전 좀 놀랐습니다. 뒤무리에 장군님이 그렇게 재테크 실력이 높으신 줄은 몰랐거든요.”

“재··· 테크 말씀이십니까?”

“어우, 군바리 월급으로 그렇게 많은 재산을 쌓으시다니. 참 대단하시더라구요. 아, 혹시 은퇴하시면 제가 운영하는 투자회사에 한 번 입사 해보시겠습니까?”

- 아저씨, 이러면 재미없어. 내가 이미 한 번 해쳐먹은 거 묵인 해줬잖아? 진짜 재무부가 한 번 털어줄까? 계정원장이랑 대차대조표 까면 안 나오는 거 없거든?

“어, 어, 어.”

“뒤무리에 장군님. 저 기욤은 도리를 아는 사람입니다. 북아메리카가 얼마나 넓은데, 그 중에서 쏠쏠한 광산 같은 거 하나 없겠습니까.”

- ···시발.

- 아저씨, 북미 가면 먹을 거 많을 텐데 그 중 한두 개 먹어도 모른 척해줄게. 마, 이거 디진다 아이가. 츄라이 츄라이!

“···고민을, 고민을 할 시간을 주십시오. 가족들과 상의를 할 시간을...”

“어유, 당연하죠.”

나는 털레털레 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뒤무리에의 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길 가던 마차를 잡았다.

“어서옵쇼!”

“마부, 자코뱅 수도원으로 갑시다.”

“예이!”

“아니, 총감. 여기는 어쩐 일입니까?”

“아유, 우리 로베스피에르 당수님을 위한 선물을 주러 왔습니다.”

“선물이요?”

“지금 전쟁영웅 뒤무리에 장군이 파리에 와 있는데, 군사 쪽에 궁금한 게 있으면 한 번 불러서 여러 가지를 질문해보는 건 어떨까 싶어서 말입니다.”

“오호라. 마침 군사 쪽 관련해서 당원들과 궁금한 게 많았는데... 내일 한 번 개인적으로 만나봐야겠군요. 감사합니다, 총감.”

허허. 뭘요.

제가 다 고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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