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거인의 빈자리 (3)
1793년 11월 17일.
평소처럼 사람들이 깨어나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건만. 파리 시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5구 거리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어느 정도로 사람이 몰려 있었냐면. 너무 많은 인파 때문에 인도에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거리는 고요했다.
분명히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5구의 거리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마치 한바탕 거센 폭풍이 지나가기 전의 세상처럼.
그리고 그 고요함은, 베르사유에서 출발한 사람들이 거리에 들어온 순간 깨지기 시작했다.
- 다그닥. 다그닥.
검은 수술을 달고 선두에 서서 호위를 맡은 흉갑기병들이 지나가고.
- 저벅. 저벅. 저벅.
푸른 색 군복을 입은 보병들이 지나가고.
- 덜컹. 덜컹.
위에 실은 석관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코너를 돌아 나온 운구용 마차가 자신들의 앞에 이르자. 여태껏 숨을 죽이고 있던 사람들은 저마다 입 밖으로 무언가를 토해냈다.
“흑! 흐흑!”
그것이 슬픔이든.
“선생님! 선생님! 뭐가 그리 급하셔서 먼저 가셨습니까! 주님은 왜 하필 지금 선생님을 데려가신단 말입니까!”
안타까움이든.
“미라보 만세! 프랑스 만세! 혁명 만세!”
고인이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고자 하는 마음이든.
조국 프랑스를 위해 희생한 모든 이가 묻히는 곳. 파리 5구의 팡테온 국립묘지 앞에 모인 사람들의 눈에는 한 줄기 물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그래도 의장님 가는 길이 외롭지는 않아보여서 다행이군요.”
“키는 작으셔도 기운이 넘쳐 이리저리 펄펄 뛰어다니시던 분이니, 천국에서 이 광경을 보신다면 분명 ‘내가 헛짓을 한 거 아니었구나’라며 좋아하실 겁니다.”
“그랬으면 정말 좋겠군요.”
나는 궐련 한 대를 입에 물며, 임시 국민의회 의장으로 선출된 자크 피에르 브릿소(Jacques Pierre Brissot)에게 말했다.
쓰읍.
후우.
저 멀리 지중해까지 갔다 온 사람이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죽어버리다니. 미라보. 이 고약한 늙은이. 얼굴 좀 보다 가면 어디 덧나나?
나한테는 분명히 별 거 아니라면서. 과로였다면서. 조금 쉬면 괜찮다면서 너는 빨리 코르시카나 갔다 오라면서 등 떠밀 때는 언제고.
‘아. 사실 내가 말한 건 다 개뻥이었고, 진짜 병은 심장병이었지롱. 속았지? 으헤헤!’이러는 게 말이 되나? 그래놓고는 유서까지 남겨서 죽어서까지도 내 단물을 막 빨아먹으려고 하다니.
이 기욤의 뇌 안 50퍼센트는 유교-탈레반이라 연장자, 그것도 죽은 사람이 편지까지 써가면서 부탁하면 안 듣고 싶어도 가슴 한 편이 찝찝해서 안 들을 수가 없다고요.
···젠장.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었던가. 미라보 이 사람은 살아서는 명령으로 일을 시키고, 죽어서는 죽은 자의 유언으로 일을 시키려들고 있다.
정녕 자본가인 내가 이 프랑스 땅에 내 손으로 근로시간제한법을 정착시켜야 하는가?
세상에, 생각만 해도 참으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미래에 내 이름 다섯 글자를 배신자라는 단어와 함께 씹어 돌리고 싶어 할 자본가들이 한바가지는 되겠구만.
“정말 짜증나는 양반이야.”
“예?”
“별 거 아닙니다. 혼잣말이 헛나왔습니다.”
어느새 미라보의 관을 실은 마차가 팡테온의 광장에 멈춰서고, 병사들과 신부들이 관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조국이 위대한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거룩한 문구가 새겨진 팡테온의 앞에서 병사들이 가로로 나란히 섰다.
“전체. 차렷! 받들어, 총!”
철커덕-하는 소리와 함께 7명의 병사들이 총을 들어올렸다.
“준비, 조준, 발사!”
타타탕!
나는 어느새 다 태운 궐련을 버리고 새 궐련을 입에 물었다.
- 일단 내가 염려했던 분란에 대해서는 잘 처리해놓았네. 이제 프랑스가 화기애애하게 나아갈지, 아니면 연옥을 방불케 하는 지옥이 될 지는 앞으로 자네의 손에 달렸어.
연옥, 지옥. 하여간 누가 ‘봉기! 민중! 공화!’ 외치는 혁명가 출신 아니랄까봐 단어 선정 센스가 아주 공격적이다. 게다가 정치인 특유의 ‘잘되면 내 탓, 못되면 네 탓’ 정신까지.
여윽시 국민의회 의장이다. 이 앞에서 툭 떨어지는 싱-카볼, 아니 정치적 수사 보세요. 죽이지 않습니까? 이게 다 테니스코트가 돔 형태라서 그런 거다. 이 말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그 돔 구장, 아니. 국민의회는 주인을 잃었다. 좌익과 우익의 대립을 막아주던 방파제가 사라졌다는 말이다.
당장은 괜찮을 거다. 전국적으로 미라보의 죽음을 추모하는 분위기에, 미라보가 유서로 전 프랑스인의 단결까지 외쳤고. 로베스피에르, 시이예스, 그리고 나까지. 이 사람들이 다들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한은 그 누가 감히 이 프랑스에 분란을 일으키겠나.
“준비, 조준, 발사!”
타타탕!
하지만 아무리 굳건한 건물이라도 세월이 지나면 조그마한 구멍이 뚫리고, 그 조그마한 구멍이 커지기 시작하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법.
과연 내 옆에 있는 차기 국민의회 의장이란 사람이 그 댐의 구멍을 막을 위인일까, 아니면 그 구멍을 넓힐 인간일까.
“준비, 조준, 발사!”
타타탕!
마지막 예포가 발사되고, 미라보의 관이 팡테온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줄기차게 담배를 태울 수밖에 없었다.
작은 거인이 떠난 빈자리, 그리고 그 빈자리에 들어찬 불확실함은 너무나도 컸다.
***
1793년 12월 1일.
파리.
“···여러분.”
“““예, 총감님.”””
“저는 전쟁이 싫습니다.”
“그러십니까?”
“예. 저는 전쟁이 존나게 싫단 말입니다. 아주 그냥 도륙을 내버리고 싶은···.”
“커피 리필 해드릴까요?”
“네.”
호로록.
직원이 가져다준 커피를 한 모금 삼키니 몸이 따듯해지고 머리가 다시 핑핑 돌기 시작한다.
역시 나의 저주받은 삶에는 커피가 있어야 해. 어쩌면 이 커피가 있다는 게 바로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 아닐까?
뭐? 내 환생이 바로 신 같은 영적인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뜻이라고? 헛소리. 신이 날 환생시켰다면 이런 쓰레기 같은 시대가 아니라 특이점이 도달한 2500년 즈음에 환생시켜줘야 하는 것 아닌가.
여기는 말이지, 텔레비전도 없고, 컴퓨터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는 야만 그 자체라고. 내가 여기 태어난 건 신이 아니라 오히려 악마가 존재한다는 증거 아닐까?
“총감님, 손이 노시네요? 설마 멍 때리는 건 아니시죠?”
“무슨 소리십니까. 지금 막, 응? 이렇게 막, 하고 있잖습니까.”
“펜을 거꾸로 쥐셨는데요.”
“···하하. 아아아니, 이게 왜 거꾸로 되어있담.”
“5분 뒤까지 결재 다 해주셔야 합니다?”
“물, 물론입죠 헤헤.”
미라보가 떠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빈자리는 입법부.
행정부 소속인 우리 재무부로서는 그냥 평소처럼 묵묵히 맡은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좆같은 전쟁의 마무리, 그것도 무려 두 개나 되는 나라를 상대로 나날이 청구서에 들어갈 목록을 갱신하는 재무부로서는 손이 딸려 발마저 동원해야 할 지경이었다.
- 그아아아악! 살려주세요! 총감님!
- 저는 엄연히 현재 재무총감이 아니며, 일반인인 야인의 신분입니다. 제가 일에 관여하는 것은 범법이며···.
- 그아아아악!
- 그··· 하아. 알겠습니다. 조금만 도와드리겠습니다.
안돼... 그 길을 가서는 안돼.... stay.... 기욤 이 병신아. 대체 어쩌자고 그런 짓을 한 게냐! 상대는 재무부야! 네 청춘을 죽인 재무부!
“기욤 군. 왜 그렇게 죽상인가?”
“전 분명 ‘조금만’ 도와드린다고 했는데. 제 책상을 보니 ‘조금만’이 아닌 것 같아서요.”
“허허, 걱정하지 말게. 이 콩도르세가 모두 다 처리를 해놓았으니.”
오오! 콩도르세 그는 신이야! 콩신! 콩신!
···콩신? 뭔가 두 번 말해야 할 것 같은 그런 기분인데. 아무렴 뭐 어떤가! 드디어 퇴근하고 욕조에 몸 좀 뉘일 수 있다는데!
“자네가 꼭 이 일을 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 내가 미리 보고서를 다 써서 올렸다네. 더 이상 일반인이 기밀문서를 본다는 점에 얽매일 이유가 없단 말이야. 하하!”
“···예?”
콩도르세는 내게 한 장의 서류를 내밀었다.
“이건...”
“<코르시카 전역(戰域)에 대한 재정 보고서 및 손망실한 보급품 보고. 그 외 추가적인 예상 배상안>. 기욤 드 툴롱 작성.”
“이게 왜요?”
이건 내가 미리 얼개를 짜놓은 코르시카 전투 보고서 아닌가. 이게 왜?
영문도 모르겠다는 듯 묻는 내게, 콩도르세는 이죽거리며 말했다.
“음, 기욤 군. 안타깝지만 이 콩도르세는 이 보고서를 아무리 봐도 이해를 못하겠더군. 때문에 내 옆에서 이 보고서를 직접 해설해줄 원작자가 꼭, 꼬오옥 필요하다고 내가 다른 쪽에 모두 연락을 돌려놨다네.”
“아니! 내가 당신들 편하라고 써놓은 거 가지고 이렇게 날 잡아먹겠다고!?”
와. 와. 콩도르세 이 아저씨 살이 찌더니 심보도 아주 놀부가 돼버렸잖아. 분명 착하디 착한 호구 같은 아저씨였는데.
“음, 역시 야근할 때 먹는 감자튀김은 맛있구만. 사장 양반, 자네도 한 입 할 텐가?”
“하. 됐습니다.”
···사실 토마토에는 독이 들어있는 거 아닐까? 심보가 고약해지는 그런 독 말이지. 아니면 죽은 미라보가 저승에서 마법을 써서 콩도르세 국장님의 머리를 조종하는 거일 수도...?
“거, 이상한 상상하지 말고 어서 일이나 하게. 어차피 자네는 오늘 도망 못가.”
“젠장할. 그러면 빨리 다음 서류나 주십쇼.”
“그럼. 그래야지.”
콩도르세는 내게 두툼한 서류를 툭-하고 던져주었다.
“어디보자. <스페인에 대한 배상금>이라. 이거 탈레랑 의원한테서 본 거 같은데.”
“아, 초본은 아니야. 루이지애나를 포함한 북아메리카 스페인령을 뜯어오자는 자네의 말을 적용해서 다시 찍어낸 보고서라네.”
“아칸사스, 미시시피 강 유역에, 루이지애나, 그 외 북위 49도 선까지를 뜯어온다라...”
나는 잠시 머릿속으로 지도를 굴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거··· 몇 제곱킬로미터인지는 아십니까?”
“모르지? 미시시피 강 너머로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렇다면 이 땅을 다 개간하기위해선 현지답사가 필요하겠군요.”
- 장, 장군님!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 어허! 나랏일에 경중이 어디 있는가! 각하는? 각하는 어디계신가?
- 저, 저기에 계신데.
벌컥!
문이 열리고 커피냄새 그윽한 재무부 야근지옥을 가로질러 내게 걸어온 한 군인은 다짜고짜 큰 소리로 외쳤다.
“각하, 전역시켜주십시오!”
“···뒤무리에 장군?”
아저씨가 왜 여기 있음?
“전역이라니, 갑자기요?”
툴루즈에 계셔야하지 않나? 아니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그, 저번에 만났을 때는 진급시켜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 뒤무리에. 본래 그런 사특한 마음을 품었지만, 이제는 명예로운 군인으로서 그런 부끄러운 과거를 반추하고 실망한 나머지 전역을 신청하고자 합니다.”
“혹시 어디 아프십니까? 머리라던가...”
“아닙니, 아! 맞습니다! 아픕니다! 어서 절 전역시켜주십쇼! 각하!”
이 인간 진짜 왜 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