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거인의 빈자리 (2)
베르사유 궁전.
국민의회 의장실.
“의장 각하라니, 더 듣다간 내가 오그라들어 죽어버리겠구만. 그냥 의장님이라고만 부르게.”
“의원이라는 칭호도 오그라들긴 마찬가지입니다만.”
“알겠네. 내친김에 우리 둘 말고는 아무도 없는데 편하게 부르자고. 어떤가, 조르주.”
“좋습니다. 미라보 의장님.”
두 사람은 구면이었다.
조르주 당통.
미라보가 오랫동안 후원해준 정치잡지 <자유 프랑스>의 일원으로 일한 적 있으며.
민중을 이끌어 바스티유 감옥을 함락시킨 자이자, 좌익인 산악파 내에서 보수파를 이끄는 자이며 산악파 당수인 로베스피에르의 정치적 동반자.
···거기에 조금 더 자세히 얘기한다면. 적당히 먹고 적당히 깨끗한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정교한 기계더라도 중간에 윤활유가 없다면 돌아가지 않듯, 이 뻑뻑한 프랑스라는 톱니바퀴가 돌아가려면 당통 같은 자가 있어야 한다.
로베스피에르처럼 대쪽 같은 사람도 이 땅에 필요하지만, 대나무가 부러지지 않게 거름이 돼 줄 사람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이번에 아내가 셋째 아이를 낳았는데, 산파와 의사가 빨리 도착해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지 뭡니까.”
“허, 그것 참 다행이구만.”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도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 이제는 아이와 아내 모두 건강하니 한 시름 놓았습니다.”
그렇게 구면인 두 사람이 본론을 꺼내 한바탕하기에 앞서 각종 신변잡기로 시간을 보내고. 한참이 지났을 무렵.
마침내 당통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그러나. 말해보게.”
“절 왜 부르셨는지 슬슬 말씀해주실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의장님.”
“···일단 한 잔 받지.”
미라보는 자리에서 일어나 국민의회 의장의 특권인 ‘책들이 즐비한 서재에서 남 눈치 안보고 코냑 꺼내기’를 시전 하는 동시에, 유리잔 두 개를 꺼내 자신과 당통 앞에 놓았다.
쪼르르.
20년 간 숙성된 호박색 알코올 액체가 잔을 채우자, 바깥에서 들어오는 석양빛과 더불어 온 의장실이 주홍빛으로 색색이 물들었다.
“예쁘군요.”
“그래. 예쁘지. 이제 건배하세.”
유리잔이 짠-하고 맞부딪히고 두 사람은 나란히 잔을 깔끔히 비웠다.
“크. 술 맛이 참 좋습니다. 이런 좋은 걸 대체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의장이란 자리에 앉으면 한사코 사양해도 여기저기서 찔러주는 게 좀 많아서 말이지.”
“그거 부정 아닙니까?”
“받고 안 해주면 부정이 아닐세.”
“허, 그게 그렇게 됩니까?”
미라보는 텅 빈 유리잔을 탁자위에 올리며, 눈앞의 이 짜리몽땅하고 살벌하게 생긴 위인에게 말했다.
“조르주.”
“예, 의장님.”
“자네는 지금 이 프랑스에 만족하는가?”
“만족··· 말이십니까.”
“그래. 만족.”
당통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천천히 올리며 말했다.
“아니요.”
“그래? 그렇다면 어떤 점이 불만인가?”
“아직도 우리의 머리 위로 군주를 섬겨야한다는 게 불만입니다.”
“그렇군.”
이번에는 미라보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당통. 자네가 생각하는 이상은 무엇인가?”
“공화국입니다.”
“입헌 군주국보다도 공화국이 옳은가?”
“공화국이 제일 옳다 생각합니다.”
“그런가.”
미라보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잠깐 나가서 같이 걷겠나? 석양이 예쁜데.”
“물론입니다.”
두 사람은 의장실에서 나와, 드넓은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을 거닐기 시작했다.
점점 추워지는 날씨 따라, 이미 많은 꽃이 진지 오래였지만 분수에 석양이 비쳐 주홍빛이 만만(滿滿)하니 나름 봐줄 만은 했다.
“기욤 그 친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대단한 젊은이지요.”
“그런 거 말고 구체적으로.”
“으음, 영특하고 모범적이고, 그리고···.”
“과감한 친구지.”
“그래요. 과감하죠.”
미라보는 천천히 발을 내딛으며 말했다.
“그 친구는 우리와 달라. 미래에 대한 믿음이 있지. 모든 일이 끝내는 잘 풀리리라는 믿음. 여태까지는 젊은이 특유의 혈기 때문이리라 생각했지만, 요즘에는 그 믿음의 원천이 불가사의하다고 느낄 때도 있네.”
“그렇··· 습니까?”
“뭔가, 자신이 선택하는 선택지에 대한 무한한 확신이라고 해야 하나.”
“그만큼 머리가 비상하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아무튼 간에. 미라보는 덧붙였다.
“자네도 알지는 모르겠지만, 난 이제 얼마 남지 않았네.”
“의, 의장님! 지금 무슨 불경한 소리를!”
“자네도 내가 쓰러진 건 알지?”
“···예. 그렇습니다만. 단순한 과로 아니었습니까?”
“밖에는 그렇게 둘러댔나보구만. ···의사들이 말하길 심장에 문제가 생겼다고 하네.”
“심··· 장 말씀이십니까.”
“그래. 심장.”
미라보는 저 멀리 하늘과 땅이 맞닿은 지평선을 바라보며 이어 말했다.
“조르주, 아까 공화국이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나도 공화국이 틀리다고 생각하지는 않네. 하지만 지금 공화국을 선포하면 우린 온 유럽의 군주들과 맞서 싸워야해.”
“하! 유럽의 군주들이 우리에게 덤비겠다면, 그 놈들의 손을 으깨버리면 될 것 아닙니까!”
“그 군주들의 손은 누가 으깨는데? 자네가 말을 타고 나가서 목을 베어올 텐가?”
“그건...”
“조르주. 정치인이란 자리를 두려워하게. 필부일 때 한 마디와 정치인으로서의 한 마디는 다르니.”
미라보는 주머니에서 은색 금속물건을 꺼내 당통에게 건네주었다.
삼색기가 달린 은제 메달.
“그게 뭔지 알아보겠나?”
“이건··· 4년 전에 파리 시민들이 오를레앙 그 놈에게 준 메달 아닙니까? 이걸 의장님이 어떻게 가지고 계십니까?”
“며칠 전에 태자를 만났네. 오를레앙이 버린 걸 그 자가 가지고 있더군. 입헌군주제와 혁명에 아주 호의적이야.”
“···그렇, 군요.”
“당통, 인정하게. 공화국은 일러. 아직까지 군주가 나라를 통치하는 것에 대해 의아함을 가지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자네 말대로 됐다가는 나라가 두 쪽이 날 걸세.”
피가 피를 씻어 내리는 혈전.
“내가 죽고 나면 그런 일이 일어날지 몰라.”
“너무 과언이 아니신지...”
“과언일수도 있지. 만약 내 말이 과언이었다면 나중에 치매 걸린 노인이 개소리를 했다고 생각하게. 다만 과언이 아니라면···.”
미라보는 당통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자네가 중간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막아야지.”
“중간이라 말씀하심은, 평원파와 산악파 말씀이십니까?”
“그래. 적당히 치고받으라고. 적당히. 게다가 말하는 요술램프 기욤이 있는데 왜 둘이 치고 받으려고 하나? 문제가 생기면 램프를 닦아서 지니를 불러내란 말일세.”
“알겠, 습니다.”
“그래. 서로 간에 총부리를 겨누는 일은 없어야지. ···그래. 이제 가보게. 공짜 술 얻어 마신 값은 이걸로 충분 치른 것 같으니.”
“예, 의장님. 편히 쉬십시오.”
당통을 보낸 미라보는 다시 의장실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깃펜에 잉크를 먹이고 편지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큼지막한 편지지를 한 가득 순식간에 채운 그는, 이제 다음 편지지를 꺼내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썩 느린 속도였다.
[재무총감. 아니, 여기서까지 직함으로 쓰는 건 조금 차갑구만. ‘기욤 드 툴롱에게’라고 고치려면 또 시간이 걸리니 그냥 자네가 알아서 그러려니 하고 읽어주게.
내가 생각하기에 자네는 정말 특출 난 인물이야. 미래를 보고 온 건지, 아니면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건지 참.
각설하고, 아마 이 프랑스에서 가장 미래를 넓게 보고 행동하는 건 자네일걸세.
그러니까 자네머리로 생각하기에 영 좆같은 일이 생기면 그냥 당통과 시에예스를 불러서 따끔하게 일갈하게. 자네도 알다시피 로베스피에르는 조금··· 무섭지 않나. 가끔씩은 오십인 나보다 더 꼰대 같으니 말 다했지.
마지막으로. 내가 염려했던 분란이 일어나지 않게 일단 내가 막아는 놨네. 이만하면 나도 팡테온에 들어갈 자격은 있는 듯 싶네. 뭐 아님 말고.
아무튼 앞으로 이 프랑스가 화기애애하게 나아갈지, 아니면 연옥을 방불케 할지, 그 갈림길은 자네 손에 달려있어. 늙은이가 젊은이한테 짐을 떠넘기는 것 같아서 마음이 조금 안 좋긴 하다만, 꼬우면 더 일찍 태어나지 그랬나.
그런데 기욤. 졸리구만. 피곤해. 아주.
기욤, 꼭, 자네의 그 선한 마음을 잃지 말게. 이 프랑스, 를, ㅈ ᅟᅡᆯ 부탁ㅎ···]
주인 잃은 펜이 도르르-하고 책상 밑으로 툭, 떨어졌다.
미라보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
[친애하는 프랑스의 시민 여러분, 그리고 국민 여러분께.
공직자로서, 신민(臣民)이 아닌 시민을 위해 일하는 영광과 보람 있는 삶을 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사람, 오노레 가브리엘 리케 미라보는 이 땅에 사는 모든 자유인들을 위해 명예롭게 일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제가 한 치의 실수도 없이 국정을 맡았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재무총감이 거짓말 하는 걸 꽤 싫어해서. 이 점은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여러분들을 위해 일할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미라보라는 사람은 10번의 생을 살아도 충분할 만큼의 경험과 모험을 했습니다. 국왕에게 쫓기고, 귀족에게 쫓기고, 타국의 비밀경찰에게 쫓기고, 밀항과 월경은 밥 먹듯이 했지요. 참 파란만장하고 힘든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전 그런 제 삶에 만족합니다. 육신이 오십 년 고달픈 대가로 현 프랑스의 헌법에 자유, 평등, 그리고 박애를 제 손으로 직접 써넣었다는 영예를 얻었으니 이 미라보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이 미라보가 안식을 찾기 전 염려하는 점이 있습니다.
우리의 조국 프랑스는 폭정이라는 악에 맞서 일어난 이상이자, 온 세상 사람에게 부러움을 사는 나라입니다.
스스로 국가를 지키기 위해 떨쳐 일어난 수많은 애국자들이 존재하는 나라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촛불을 켜고 나라를 위해 애쓰는 애국자들이 존재하는 나라가 바로 우리의 나라입니다.
우리 3000만 프랑스인에게는 이제 의회가 있고, 의원이 있으며,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총명한 정치인들과 칠흑 같은 암흑에도 눈을 부릅뜨고 국경을 주시하는 국민방위대가 있습니다.
제가 염려하는 것은. 모종의 이유로 우리가 애국심을 버리고, 그 대신 적대감과 증오, 폭력을 추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의견의 대립, 입장의 차이라는 벽을 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숨어 남을 해할 때. 그 때 우리가 성취한 자유와 평등과 박애는 더 이상 힘을 가지지 못하고 공허한 메아리가 될 뿐입니다.
논쟁하고, 경쟁하고, 서로를 비판하되, 단결하십시오.
조금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우리는 모두 애국자입니다. 서로가 국가를, 이 프랑스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믿어준다면 우리는 앞으로 어떤 고난이 오던 이겨낼 수 있습니다.
조금 돌아가고, 조금 불편할지언정 우리는 결국 어려움을 이겨내고 더 강해질 것이며 우리의 아이들은 지금 우리의 모습을 기꺼이 본받고자 할 것입니다.
친애하는 시민, 국민 여러분. 잘 지내시길.
저 미라보는 음울한 억압과 복종이 지배하는 프랑스에서 태어났으나, 마지막 숨은 자랑스러운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여신인 마리안이 따스하게 안아주는 프랑스에서 거둡니다.
마지막으로 나와 함께 싸워 준 우리의 동지들, 모두 감사합니다.
은혜를 아는 미라보는 미리 천당에서 여러분의 자리를 따듯하게 데워놓을 테지만, 모쪼록 늦게, 아주 늦게 오십시오.
프랑스와 여러분에게 주님의 은총이 있길 바라나이다.]
1793년 11월 16일.
삼색기를 휘두르던 작은 거인이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