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거인의 빈자리 (1)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다. 마치 빙빙 돌아가는 회전목마처럼 이 세상은 정말 조금, 아니. 꽤 많이 돌아버린 것만 같다.
“대체 우리를 왜 쳤답니까? 전 당최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질 않는데.”
프랑스도 부르봉 왕가, 스페인도 부르봉 왕가.
‘우리 땅에 혁명 전파하지 마셈.’이라는 [틸지트 선언]을 무시하고 남의 나라에 우리가 혁명을 전파한 것도 아니다. 애초에 우리가 지금 너희들 상관할 팔자도 아니란 말이다. 우리끼리 먹고 살기도 바쁘다고!
그런데 대체 마드리드에서는 어떤 논리가 전개되었길래 우릴 이렇게 못살게 군단 말인가.
“뭐, 뻔합니다. 절대왕정을 추구하는 구체제들 입장에선 꼴보기가 싫었겠지요.”
먼 파리에서 중간역인 이곳, 디종까지 한 걸음에 내려온 탈레랑 의원은 뭘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겠냐는 듯, 굉장히 나이브하게 말했다.
“그렇게 쉽게 결론이 나오나요, 탈레랑 의원님?”
“뜬소문 중에는 스페인의 현 국왕 카를로스 4세가 지능장애는 물론 성불구자라는 말도 있던데 이 정도야 상당히 상식적인 답변이지 않습니까. 각하.”
재상 고도이는 사실상 현 왕비의 기둥서방, 국왕은 고도이가 의견을 내면 자동으로 도장만 찍어주는 거수기. 온갖 더러운 파벌싸움으로 점철된 스페인의 귀족들.
들어보면 ‘이딴 게··· 나라?’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지만, 차기 외무부장관으로 손꼽히는 탈레랑 의원의 말이라면 프랑스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레퍼런스겠지.
“조금 과장해서 말씀드리자면, 파리 매음굴 창녀들이 마드리드 상류 귀족들보다 깨끗할 겁니다.”
“정리해보면 구 절대왕정 체제의 더러운 인사들이 느낀 불쾌감 때문에 전쟁이 난 거다?”
“물론 대장장이 길드나 상인들의 뒷공작도 있을 테지만, 그런 걸 추상적인 원인을 제외하고 근본적인 원인만 정리한다면 그렇게 되겠지요.”
“그 치들에게는 전쟁이 어디 장난이랍니까?!!”
89년 바스티유 이후, 국적을 불문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가.
프랑스인, 독일인, 이제는 러시아인, 스페인, 영국인까지.
바스티유에서 수백, 아미앵에서 수천, 발미에서 일 만. 이번 코르시카에서 또 일 만. 게다가 스페인이 침공했다니, 생도맹그와 피레네에서 또 다시 몇몇이 목숨을 잃었겠지.
그런데 그 원인이 겨우 불쾌감이라는. 같잖은 기분에서 나온 위정자 몇의 의지라고? 시발 이게 그 기분상해죄인가 뭔가 하는 그거냐?
어이가 없다. 한 거라곤 플래티넘 다이아 수저 하나 물고 태어나는 운빨 원툴 새끼들이 남 목숨을 파리 목숨으로 알고 버림 패처럼 던지다니.
하느님이니 예수님이니 교황이니 믿는 새끼들이 지옥이 두렵지도 않은 건가.
흥분 때문일까. 눈이 파르르-하고 떨려오고,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탈레랑 의원, 그렇게 저놈들이 전쟁을 하고 싶다면 어울려줍시다! 보나파르트 장군에게 병력을 주고 마드리드까지 진격하라고-.”
“각하.”
“이 새끼들이 어딜 사람 목숨을 개돼지만도 못한 무언가로 보고 있어!”
“각하.”
탈레랑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을 떠는 내게 다가와, 어깨를 톡톡 두드리면서 말했다.
“각하, 왜 그러시는 지 이해하지만 일단은 고정하시지요. 듣는 호위병들이 놀랍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 탈레랑의 조언에 따라 자리에 천천히 앉았다.
“전 스페인의 왕좌에 앉아계신 분이 역겨워서 견딜 수가 없는데. 탈레랑 의원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각하. ···다만.”
“다만?”
탈레랑은 몸을 기울여 나와의 거리를 좁히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프랑스인 탈레랑으로서 품은 마음과 외교관 탈레랑으로서 품는 마음은 다릅니다.”
“다르다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제 외교적 견해로 보았을 때, 우리 프랑스는 이번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했어야 했습니다.”
“예?”
탈레랑은 품 속에서 지도를 하나 꺼내 내게 내밀었다.
“이건··· 유럽지도잖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검지를 내밀어 우리 프랑스를 톡톡 건드렸다.
“우리 프랑스는 유럽의 중앙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입니다. 발칸이나 이베리아 같은 곳이라면 몰라도, 프랑스에서 한 번 변혁의 물길이 시작되면 언젠가는 온 유럽에 그 물길이 닿게 되지요.”
“그렇겠지요.”
나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원 역사에서 내가 살아간 21세기 세상에 있는 나라는 대부분이 민주공화정을 채택했었다. 대한민국도, 미국도, 프랑스도, 독일도.
···물론 38선 너머 돼지를 숭상하는 놈들도 있긴 하지만, 그 놈들도 제 놈들 헌법에는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써놓았을 만큼 이 프랑스에서 시작된 혁명의 파도는 전 세상을 휩쓸어버렸다.
미래를 보고 온 입장에서 탈레랑의 말은 지극히 옳았다.
“언젠가 저 물길이 해일이 되어 온 유럽을 쓸어낸다면, 우리 프랑스는 선구자가 되어 그들 모두를 이끄는 맏형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그 물길이 해일이 되기까지 우리가 버틸 수 있을까요?”
“음.”
탈레랑은 손가락 세 개를 펴며 말했다.
“이번 전쟁으로 우리가 얻은 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프랑스의 힘이 여전히 강력하다는 것. 원정군이긴 하지만 두 나라의 군대를 동시에 격퇴했으니 우리 군사력에 대한 타국의 평가 또한 상당히 올라갈 테지요.”
“두 번째는요?”
“두 번째는 경제적 이득입니다. 러시아와 스페인에게 전쟁배상금을 물리고, 추가로 포로협상을 통해 더 많은 이익을 얻어낼 수 있겠지요.”
“음. 그렇다면 세 번째는 무엇입니까?”
“타국의 불안감입니다.”
타국의 불안감이라...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이 유럽은, 역사적으로 잘난 놈 하나가 나오면 몰매를 때리는 국가 아닙니까. 프로이센이 발흥할 때는 전 유럽이 둘로 나누어져 싸웠고, 네덜란드가 잘 나갈 때는 영국과 프랑스가 손잡고 네덜란드를 담가버렸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만약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졌다면, 온 유럽의 나라들이 쾌재를 부르며 프랑스를 내버려두었을 겁니다. 아, 프랑스가 약해졌구나! 참 다행이다! 저 혁명이란 게 물리력을 타고 번지지 않겠어! -라면서요.”
그런데 이런. 우리가 이겼군요. 탈레랑은 그렇게 덧붙였다.
그는 이제 검지를 움직여 지도를 톡톡 건드렸다.
“스페인, 러시아, 프로이센, 신성로마제국,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까지. 가뜩이나 먹물 먹은 지식인들이 자유주의니 뭐니 외치는데, 러시아와 스페인이 대차게 깨졌으니 이 군주들께서는 심사가 많이 꼬이겠지요.
사람의 불안감이라는 것이, 본디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지는지라. 이 분들께서는 결국 프랑스라는 유럽의 종양을 절제하고자 군대를 일으킬 겁니다.”
혁명을 전복시키고 구체제를 다시 이식한다. 궁궐 터줏대감들이 기뻐 날뛸만한 얘기다.
“하지만 영국이 있잖습니까.”
“그러니 지금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어 말했다.
“각하는 민주주의에 조예가 깊으시지요.”
“···그렇지요.”
“각하. 과연 우리에게 우호적인 토리당이 과연 앞으로 몇 년이나 집권할 수 있겠습니까.”
“글쎄요. 꽤 오래 집권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습니다. ‘꽤 오래’ 집권하겠지요. ‘영원히’ 집권하는 게 아니라.
언젠가는 수상이 바뀔 테고. 휘그당이 토리당 대신 집권한다면 우리에게 적개심이 높은 에드먼드 버크가 수상이 될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사실 그들이 이번에 우리에게 내밀어 준 호의도, 섬뜩한 외교적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자신들의 지중해 패권 유지를 위한 수단이기도 하지요.
게다가 영국인들은 오랜 기간 우리와 반목해 왔습니다. 영국인들 중 평민들도 프랑스라고 하면 적개심을 띠는 경우가 많은데, 앞으로 우리 프랑스가 강성해지면 강성해질수록 저 치들도 우리 프랑스에 대한 공포가 커질 겁니다.
정권이 바뀌면 우리 프랑스는 이제 온 유럽과 싸울 준비를 갖춰야 합니다.”
결국 정치논리구나.
나는 잠시 숨을 들이쉬고 입을 열었다.
“우리가 발전할수록 범세계적인 전쟁이 다가온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지요.”
“그 때가 언제가 될 지는 우리 손에 달렸구요.”
“예.”
“속이 갑갑하군요.”
“하하, 그러십니까.”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나와 달리, 내게 폭탄을 던져준 탈레랑은 허허 웃으면서 답했다.
“속으로 너무 앓지는 마십시오, 각하. 어디까지나 이 탈레랑 한 사람의 예측입니다. 게다가 원래 예측이란 건 틀리는 게 다반사 아닙니까. 하하.”
“탈레랑 의원님.”
“예, 각하.”
“의원님이 생각하시기에 그 때는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탈레랑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빠졌다.
“···빠르면 10년. 느리면 20년.”
“빠르면 10년, 느리면 20년이라.”
1803년. 아니면 1813년 즈음.
사람의 인생으로는 멀지만, 국가의 입장에서는 또 가깝다고 볼 수도 있는 세월이다.
“일단 그때까지 우리 프랑스가 발전하긴 하나보군요.”
“재무총감 각하 같은 분이 기꺼이 국민의 짊을 짊어지고 나아가시는데 당연히 저 썩어빠진 절대왕정국가보다 발전하겠지요. 하하.”
“···전 지금 재무총감이 아닙니다만.”
“뭐, 정 그러신다면 차기 재무총감이라고 해드리지요.”
하여간에 능글맞은 양반이야.
내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지, 탈레랑은 다시 웃음을 띤 채 품속에서 새 지도를 하나 꺼냈다.
“이번에는 또 뭡니까?”
“여태까지 암울한 미래 이야기를 했으니 이제 재미있는 현재 이야기를 해야지요.”
재미있는 이야기라니?
“보스턴, 생도맹그. 이건 서인도제도와 아메리카 대륙 지도 아닙니까?”
“하하, 그렇지요. 저와 르브렁 외무장관, 그리고 외교부가 정리한 지도입니다.”
탈레랑은 다시 한 번 손가락으로 지도를 짚으며 말했다.
“스페인에게서 배상금은 물론이고 노다지를 뜯어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루이지애나 남부인 아칸사스(Arkansas). 산토 도밍고 일부라.”
“대강 우리 외교부가 얼개는 짜놨습니다만. 아무래도 재무부가 돈 관련해서는 또 전문가이시지 않습니까.”
“하! 기왕 뜯을 거 통 크게 뜯어야죠.”
나는 깃펜에 잉크를 묻히고 지도에 슥- 원을 그렸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건 남의 거 뺏어먹는 거다. 본래 라면도 제일 맛있는 건 동생이 야식으로 먹으려고 끓인 라면 아닌가.
본초강목과 동의보감에도 남의 음식을 많이 먹으면 무병장수한다고 쓰여 있다.
“스페인은 이제 북아메리카에서 손 떼고 포르투갈이랑 둘이 남아메리카에서 놀라고 합시다.”
“흐음. 외교부에 남는 자리가 많은데, 혹시 관심 있으십니까?”
아, 그건 좀.
난 이제 댁이 건넨 폭탄 해체하기도 바빠.
***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국민의회 의장실.
“의장 각하께서 절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어서 오시오. 당통 의원. 기다리고 있었소.”
두 사람이 손을 맞잡은 국민의회 의장실 창문 너머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