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2화 대육군의 일원들 (5) (192/341)

대육군의 일원들 (5)

산간벽지 코르시카 출신으로 당당하게 별을 달고 따까리로 2만 프랑스인을 거느리는 전설의 포켓몬이 하나.

베르사유와 파리에 서식하며 수많은 서류를 해치우는 전설의 포켓몬... 아니. 나는 사람이니까 대장 프랑스인이라고 하자.

전설의 포켓몬과 그 포켓몬을 부리는 대장 프랑스인이 직접 행차해, 코르시카 인들 앞에서 당신들의 권리를 존중하겠노라 맹세한 일은 삽시간에 이 섬을 휩쓸었다.

물론 아직 라디오나 텔레비전도 없는 세상에 드라마틱한 효과를 보려면 가는 곳 마다 이렇게 쇼를 해야 하긴 했지만 말이다.

“코르시카 만세! 프랑스 만세! 해방군 만세!”

“하하, 감사합니다. 메르시 보꾸.”

베치오를 시작으로, 바스티아, 보니파치오, 그리고 전설의 포켓몬의 고향인 아작시오까지 돌고 돌며 쇼를 한 끝에 우리 프랑스군은 꽃다발을 하나씩 제몫으로 받아낼 수 있었다.

“부오나파르테 도련님 만세! 만세! 만세!”

으음. 누구는 꽃다발을 넘어 더 큰 걸 받는 것 같기도 하네.

“코르시카의 적법한 상속자이시며 주군이시고 프랑스의 장군이며 명문가 보나파르트 가문을 이끄는 가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씨.”

“왜 그러십니까. 대프랑스의 재무총감이자 어마어마한 부를 거머쥐었으며 툴롱을 쥐락펴락하는 항만장 가문의 차기 가주로 손꼽히는 기욤 드 툴롱 각하.”

“저 소리가 들리십니까?”

“무슨 소리 말씀이신지.”

“보나파르트~ 보나파르트~ 아주 귀가 떨어지겠는데.”

“그냥 평범한 환호인걸요.”

“그래? 난 어떤 군인이 은퇴하더라도 국민의원직은 죽을 때까지 해먹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걸.”

“그것 참 운 좋은 사람인데?”

참나. 다 알면서 뺀질거리긴.

“그나저나.”

“왜?”

“형은 설마 자기 목숨이 두 개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말씀대로 제 목숨이 두 개라면 정말 좋으련만 불행히도 하나랍니다. 그러나 사람은 축생과 달리 목숨 하나로도 충분히 많은 일을 할 수 있지요. 각하.”

“그러다 뒈지면?”

“뒷일을 생각할 정도로 이 나폴레옹이 여유롭게 살아오지는 않아서.”

“정말 돌아버리겠네.”

세상에 아무리 빈총이라고 해도 자기한테 총부리를 겨눴던 반란군에게 권총을 던져주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나야 저 인간이 혹시나 정말 총을 맞을까 싶어 미친 짓에 어울려주긴 했지만 범인(凡人)인 내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뭐··· 내가 왕도 두 번 들이받고, 의원도 들이받고, 사법부도 들이받기는 했지만은... 나는 어디까지나 상식선에서 들이받는 거다.

왕을 들이받은 것도 내가 알기로 원래 역사에서 루이 오귀스트 씨는 단두대에서 목이 뎅강뎅강 날아가 하늘나라에서 예수님이랑 악수할 테니 내가 들이받아도 문제가 없겠다 싶었던 거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상식선에서 들이받는 거다. 기왕 혁명코인까지 제대로 탔는데 나라가 이 인외마경 18세기에서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면 별로 재미없지.

사실 토마토는 독초가 아니라 먹을 수 있는 식재료라던가, 손을 씻으면 병이 잘 안 걸린다던가, 그런 상식을 주입해주는 거쯤이야 할 만 하지 않나.

그런데 저 미치광이 나보는 나처럼 미래를 어렴풋이나마 보고 온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저런단 말인가.

아. 그러니까 역사에 이름이 남은 건가?

“워, 워.”

“무슨 일인가 마부?”

“포로들이 많아서 말입니다. 길이 조금 막히는 듯 합니다.”

“하기야 우리 코르시카 산길이 꽤 험하긴 하지.”

고개를 끄덕이는 나폴레옹의 말에 마차 밖을 바라보자, 녹색 군복을 입은 러시아인들이 프랑스군 헌병대의 인도를 따라 2열종대로 줄을 지어 나아가고 있었다.

“···저 사람은 꽤 어려 보이는데.”

“누구? 러시아인?”

“어.”

딱 봐도 나랑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데···.

호기심이 동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길이 막혀서 심심풀이 겸으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나는 마차 창문을 내려 헌병을 불러 세웠다.

“헌병.”

“추우웅서어엉!”

“그래요. 혹시 저기 가는 러시아인 좀 불러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통역도 준비시키겠습니다.”

잠시 후, 내 또래의 병사가 헌병들에게 이끌려 내게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예에, 혹시 누구신지?”

“임시 재무총감, 기욤 드 툴롱이라고 합니다.”

“초, 초, 총감이요?! 소, 소인이 크나큰 무례를 범했나이다!”

아. 제발. 절 같은 거 하지 말라고.

“괜찮습니다. 일어서세요.”

“아닙니다! 소인이!”

“일어서라고 했습니다.”

“옙!”

군기가 아주 바짝 들어있네. 내 이병시절을 보는 것 같아서 측은하다.

“성함이?”

“드, 드미트리입니다.”

“좋아요. 드미트리. 담배 피우십니까?”

“아, 예. 피웁니다만...?”

“자. 한 까치 피우십쇼. 여기 불도 있습니다.”

나는 담뱃갑을 꺼내, 성냥과 담배 한 개비를 드미트리에게 건네주었다.

러시아인은 황공하다는 얼굴로 담배를 받아들더니 담배를 두 손으로 공손하게 입으로 가져다댔다.

“···올해 나이가 몇입니까?”

“예? 아! 열여덟입니다, 각하.”

“열여덟.”

갓 성인이 된 애를 전쟁터에 보내다니. 물론 나도 나이가 스물 둘이긴 하지만, 전생까지 합치면 마흔이 아닌가. 가슴 한 편으로 이 앳된 병사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습니까? 부상이라던가.”

“아, 괜찮습니다. 다른 병사들하고 달리 전 운이 좋게 사로잡혀서요. 다만···.”

“다만?”

“집에 갈 수 있을지... 조금...”

집. 집.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만민에 대한 자유와 평등과 박애를 맹세한 우리 프랑스는 전쟁포로들을 박대하지 않습니다. 포로협상이 끝나는 대로 집으로 돌려보내드리지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헌병.”

“예, 각하.”

“말을 한 필 가져다 줄 수 있겠습니까?”

“당연합니다. 각하.”

“말은 왜? 먼저 가게?”

“어. 내가 아작시오에 늦게 갈수록 우리 병사들이 집에 가는 시간이 늦어지잖아. 할 일도 많은데.”

군인들이 할 몫인 전쟁은 끝났다. 이제 남은 건 서류, 서류 또 서류 뿐.

내가 하루 일찍 일을 마칠수록 우리 병사들이 집에 더 빨리 간다는데, 내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늦장을 부릴 만큼 철면피는 아니라.

“···너도 참. 그래. 조심히 가라.”

“며칠 뒤에 보자고.”

나는 손에 쥔 말고삐를 세차게 휘둘렀다.

“···존나 멋있다.”

“드미트리. 뭘 그렇게 보나?”

“아, 아니에요. 어서 가요. 아저씨들.”

자유, 평등, 박애.

드미트리는 그 세 단어를 곱씹으며 천천히 나아갔다.

***

베르사유 궁전.

[보나파르트 준장이 승리하였으며 본인은 포로와 민심을 수습하고 곧 파리로 출발하겠음. 포로들의 처우에 관한 이야기는 파리에 도착한 이후 하겠음.

추신. 훈장을 많이, 엄청 많이 준비해주길 바람. - 기욤 -]

“허허.”

“무슨 내용입니까, 미라보 의장.”

미라보는 서류를 고이 접어 탁자 위에 올려놓은 후, 이제 막 자리에 앉은 젊은이를 보며 말했다.

“남쪽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태자 전하.”

“그렇군요. 승전인 게지요? 나폴레옹이란 장수와 총감이 실로 큰 활약을 했습니다 그려.

아···! 그보다 몸은 괜찮아지신 겁니까? 이렇게 베르사유까지 오다니요. 차라리 짐(朕)을 부르지 그랬습니까.”

“···허허.”

“아니, 왜 웃고 그러십니까.”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전하.”

미라보는 쓰게 웃으며 태자 루이필리프에게 고개를 숙였다.

죽은 오를레앙(사실 죽지는 않았지만) 대신 이 여리고 착한 태자가 먼저 혁명 왕국의 왕이 되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그러나 현실을 바꿀 수는 없는 일.

안타까움은 속으로 삼키고, 미라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하.”

“예. 의장.”

“오늘 이 미라보가 전하를 찾아온 이유를 아시는 지요?”

“글쎄요. 짐은 비록 태자지만 배운 것이 일천하여 모르겠습니다.”

“태자께서 선왕이신 고(故) 루이 17세를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 여쭙고자 왔습니다.”

“아.”

젊은 태자는 잠시 말이 없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아버지, 아니. 아바마마는... 2700만 프랑스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으심이 틀림없습니다. 비록 짐이 아바마마의 자식이더라도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해야만 했던 일이라 생각합니다. 의장.”

“···감사합니다, 전하.”

“그런데 그 일은 왜 말씀하는지요? 이미 짐은 의회와 양 당수들에게 제 생각을 여러 번 피력했습니다만.”

“더 이상 국본(國本)의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즉위···를 말씀하시는 겝니까?”

태자, 루이필리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싫습니다. 의장.”

“전하.”

“이제 정치싸움 따위 지긋지긋합니다.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도 않고, 큰아버지처럼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애초에 필부인 제가 국본의 자리에 앉는다 해도 이 프랑스를 말아먹을 게 분명합니다. ···큰아버지에게 자식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본래 이 자리를 맡았을 그 아이가 장성할 때까지, 전 그저 이 자리를 맡을 뿐입니다.”

미라보는 그 얘기를 가만히 듣다가 말했다.

“이건 우리 프랑스의 생존이 달린 문제입니다. 전하.”

“···의장, 생존이라니요?”

“국본의 자리를 더 비워놓을수록 유럽의 군주국(君主國)들은 우리 프랑스의 혁명정부를 의심하겠지요. 우리 프랑스가 저 멀리 아메리카 대륙의 미국처럼 공화제를 채택하는 것 아니냐고.”

“···전 공화제나 대통령제가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유럽의 군주들은 나쁘다고 생각하지요. 신대륙의 공화정과 유럽의 공화정은 다릅니다. 전하.”

“······.”

“하루, 이틀, 나흘. 우리 프랑스에 왕이란 존재가 없는 기간이 늘어날수록 저 군주들은 두려워하고 또 우릴 사탄의 하수인처럼 볼 것입니다. 당장 러시아와 스페인이 우리에게 저지른 일을 보십시오. 전쟁입니다, 전하. 전쟁.”

“러시아는 야만적이고, 피레네 이남은 아프리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프로이센과 신성로마제국처럼 문명화된 나라라면-.”

“우릴 더 효율적으로 공격할 수 있겠군요.”

태자는 말을 잃었다가, 천천히 말했다.

“그럼. 그러면 제가 왕이 되면 모든 위협이 끝나는 겁니까?”

“두려우십니까.”

“두렵다마다요.”

“그래서 전하가 그 자리에 오르실 수 있는 겁니다.”

“예?”

“국민 한 명 한 명을 중히 여기시고 혁명의 붉은 기를 같이 들으셨던 전하라면 이 프랑스를 극좌던 극우던 양 극단을 향해 끌어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금이나마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의장.”

“당연합니다. 전 이 의장실에 계속 있을 테니, 마음이 정리되면 찾아와주십시오.”

“그래요... 짐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몸 조리 잘하세요.”

젊은 태자에게 한가득 짐을 안겨 준 미라보는, 서랍을 열어 프로파일 하나를 꺼낸 뒤 나지막히 입으로 읊었다.

“나이나 먹어서 젊은이들에게 못된 짓만 하는구만. 다음은, 조르주 당통. 이 자인가.”

프랑스의 비극을 막을 안전장치를 위해.

미라보는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환하게 불사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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