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1화 대육군의 일원들 (4) (191/341)

대육군의 일원들 (4)

“병사, 아픈 곳은 없나?”

“없습니다.”

“소속은?”

“72보병연대 상병 파블로비치입니다.”

“나이는?”

“올해 마흔 둘입니다.”

“출신?”

“시즈란입니다.”

“시즈란? 처음 듣는 곳이군.”

“카잔 근처에 있는 조그마한 시골마을입니다.”

“흐음. 카잔이라. 일단 저기 가서 대기하게.”

장교가 턱으로 다른 병사들이 모여 있는 곳을 가리키자, 파블로비치는 털레털레 걸어가 군화로 땅을 몇 번 다지고 자리에 앉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거나 고개를 땅에 처박고 있다. 전날 일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리라.

“저 배에 못 타면 어떻게 되는 거지?”

“뭐긴 뭐야. 프랑스 놈들이 우릴 헥토르마냥 질질 끌고 다닐 게 틀림없어.”

“흑흑, 엄마... 할머니... 보고싶어...”

개 중에도 나이 좀 있다 싶은 병사들은 듣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이야기를, 이제 스물이나 먹었을 법한 젊은 병사는 손에 얼굴을 묻고 훌쩍였다.

그렇게 모두가 어두운 얼굴로 시간을 보내고 또 보내자, 마침내 한 장교가 펜과 서류를 들고 다가왔다.

“자! 주목!”

“““주목.”””

“지금부터 호명한 병사들은 배에 오른다. 60보병연대 소속 블라디미르···.”

한 명씩, 한 명씩.

장교가 이름을 호명할 때마다 파블로비치의 옆에 있는 사람들이 일어나 배에 오르자, 옆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수도 같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면. 여태까지 붕대를 두른 병사는 단 한 명도 배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은 72보병연대 소속 파블로ㅂ···.”

“저, 저기 장교님?”

“질문 있나 병사?”

그런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는지, 왼쪽 눈에 붕대를 두른 병사 하나가 손을 들고 장교에게 말했다.

“아, 아직 부상자들은 한 명도 타지 못했습니다만.”

“아. 그거 말인가?”

“예, 예! 헤헤. 혹시 몰라서...”

장교는 손에 쥔 깃펜을 잠시 검지손가락으로 굴리더니 물었다.

“이름.”

“70보병연대 니콜라이입니다.”

“···미안하지만 자네는 명단에 없군.”

“예, 예? 그게 무슨···?”

“장, 장교님! 지금 저희를 버리시는 겁니까!?”

팔에 붕대를 두른 병사가 벌떡 일어나 외치자, 장교의 미간이 조금 일그러졌다.

“버리다니. 조국 러시아는 자네들을 버리지 않아.”

“그러면! 그러면! 지금 우리도 데려가줘야 되는 거 아닙니까!”

“걱정하지 말게. 포로 협상 이후 무조건 데려갈 테니.”

“그게 버린다는 말이잖아!!”

“우리도 데려가라!!”

“죽더라도 여기가 아니라 고향에서 죽을 겁니다!”

“쯧. 나 원 참. 병사들 중 부상병은 두고 간다. 사지가 멀쩡한 병사들만 배에 오르도록.”

이제 부상병들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일어서서 목에 핏대를 세웠다.

“우릴 태워! 태우란 말이다!”

“여기서 죽고 싶지 않단 말이야!”

“이 새끼들이! 모두 안 닥쳐!? 어딜 감히 귀족에게 대드느냐!”

귀족.

그 마법과도 같은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오자, 부상병들의 눈이 두려움으로 요동쳤다.

“그, 그게 아니라...”

“지금부터 항명하는 모든 자는 신분제를 무시하는 걸로 간주하겠다!”

태어날 때부터 머릿속에 끝없이 주입된 봉건사상은, 삶에 대한 욕망마저 뛰어넘을 정도였다.

***

5천.

고향에 있는 비루한 통나무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 5천.

차갑게 식어 전장에 널부러진 7천명과 어디로 갔는지 모를 실종자 1천명을 제외하면 이 프랑스 땅에 7천명은 남아야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출신 병사들을 선별해서 배에 태웠습니다.”

“내년에 농사를 지으려면 몸이 성한 친구들이 필요합니다. 최대한 양보해도 경상자까지. 중상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데려가서는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억지로 데려가 봤자, 라스푸티차 시기에 시름시름 앓다 죽을 게 뻔 한 친구들입니다.”

전쟁은 끝났으니, 그 다음을 생각해야 한다.

배상금도 물어줘야 하는 형편에 상이용사가 낙후된 러시아에 떨어지는 순간 얼마나 많은 식량과 물자가 그 자들의 입속으로 사라지겠는가.

결국 불행히 유탄이나 창칼 따위에 다쳐, 머리나 팔다리에 붕대를 칭칭 두른 병사들은 안 그래도 서러운데 고향에 갈 기회마저 박탈당하고 말았다.

“개새끼들! 가는 길에 폭풍이나 만나라!”

“더러운 지주새끼들!”

그렇게 베치오 시에 남겨진 7천 여 러시아군이 저 멀리 수평선을 향해 사라지는 프리깃 다섯 척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을 무렵.

“돌겨어어억!!”

“항, 항복! 쏘지 마시오! 우린 다 부상병이요! 총도 없소!”

“적들이 항복했습니다. 무장도 이미 배가 다 싣고 가버려서 죄 맨손이랍니다.”

“그래? 어디 한 번 정복지에 발을 내딛으러 가볼까.”

말발굽이 다그닥 다그닥하는 소리와 함께 나폴레옹이 베치오에 입성했다.

“······우린 다 좆됐어.”

“왜.”

“부오나파르테가 파올리 그 인간하고 붙어먹은 우릴 살려줄 거 같나? 제 집을 홀라당 태워버린 우릴?”

“삐익! 삐익! 거기 코르시카 인! 광장으로 모이시오! 사령관님의 명령입니다!”

“저것 봐. 우릴 왜 광장으로 모으겠나? 이제 우릴 다 총살하려는 거겠지! 탕! 탕!”

아작시오나 다른 지역에서 이 베치오까지 온 사람들은 모두 과격한 코르시카 독립파. 이 코르시카를 프랑스에게 먹기 좋게 바치려면 지금만큼 좋은 기회가 없었다.

아마도 부오나파르테는 오늘 코르시카 독립파를 쓸어버리려는 목적일 테지.

“가자. 가서 프랑스 인이 아니라, 코르시카 인으로 죽자.”

수많은 코르시카 인들은 입술을 꽉 씹으며 결연한 표정으로 광장에 모였다.

***

부상병을 버리고 팔팔한 사람만 싣고 가다니, 저딴 게 군대라고? 현대라면 국가수반이 질질 끌려나와 욕과 계란을 뒤지게 쳐맞고 탄핵당할 일 아닌가.

천방지축 빙글빙글 돌아가는 18세기 전근대 답다고 해야 하나.

그나저나 다음에는 꼭, 그 증기자동차를 배에 싣고 다녀야겠다. 아작시오에서 베치오까지 오는 길이 거의 수십 킬로미터인데 그 거리를 말 위에 앉아 하루 꼬박 새워 달리니 꼬리뼈가 부서질 것 같아.

내 나이 스물 둘인데 벌써 치질을 달고 살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내친 김에 가운데가 뻥 뚫린 도넛방석을 만들어서 팔아먹으면···.

“오셨군요. 각하. 사령관께서 기다리십니다.”

나는 한 장교의 안내를 받으며 나폴레옹이 임시로 사용하는 전(前) 베치오 시장 사무실로 들어갔다.

“왔나?”

“에잉. 먼 길 달려왔는데 이거이거, 준장 주제에 말이 짧구만.”

“자, 이제 일하러 가자.”

“허 참. 나 하루 조오옹일 말 위에 앉아 있다가 이제 막 안장에서 일어났거든? 여독도 풀 겸 조금 쉴 시간을 주는 건 어때?”

“시간은 금이다. 금.”

이런 냉혈한 같으니. 내가 애초에 포근한 후방에서 여기까지 왜 달려왔는데!

나폴레옹이 인의예지가 몸에 익은 유교-탈레반인 나, 기욤 드 툴롱을 향해 자기가 짜는 그 ‘쇼’에 내가 꼭 필요하다고 한사코 내게 빌고 또 비니. 공맹의 도리를 알고 마음씨 좋은 내가 어쩔 수 없이 승락해준 거 아닌가!

어찌하여 이런 드넓은 아량을 배우지는 못할망정 동생을 황희 정승 댁 누런 소 마냥 부려먹느냐 나폴레옹 이놈!

“내 욕 다 끝났나?”

“어. 이 정도면 된 듯?”

“좋아. 서포트 잘 해줘라. 알겠지?”

“매일 마르스 광장에서 이빨 털던 내 걱정보다는 말이나 잘 해보셔요.”

우리 둘은 무수한 사람이 가득한 광장을 향해 나아갔다.

***

“코르시카 인들이여!”

스물 네 살의 꼬마 장군, 나폴레옹은 뒷짐을 진 채 광장에 자리한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대들은 나를 알아보는가!”

대답 없이 적기 어린 시선만이 자신을 보고 있음에도, 나폴레옹은 태연한 얼굴로 이어 말했다.

“그렇다. 그대들이 익히 알고 있듯이, 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다.

지금 귀하들의 머릿속에 맴돌고 있을 생각을 본인 알고 있다. 배신자 보나파르트라던가. 프랑스의 딸랑이 보나파르트라던가. 그것도 아니면 귀하들을 저승길로 보내줄 저승사자 보나파르트라던가.”

뭐. 어느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그 모든 게 저주받아 마땅할 보나파르트-로 귀결되지 않은가?

나폴레옹은 그렇게 덧붙였다.

그러나 여전히 광장은 고요했다.

“배신자, 딸랑이, 저승사자, 그런 보나파르트로서 여러분에게 내가 해주고 싶은 게 있다.”

···올 것이 왔구나.

코르시카 인들은 마른 침을 삼켰다. 이제 곧 보나파르트의 총탄이 우리의 가슴을 뚫으리라.

그러나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인들을 향해 총탄 대신.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을 뽑아, 바닥에 놓은 뒤 청중들을 향해 밀어주었다.

“““······?!?!”””

모두가 멍청한 얼굴로 멀뚱멀뚱 바닥에 놓인 권총을 바라보고 있자, 뒤이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들 중에 저주받아 마땅할 보나파르트를 쏘고 싶은 자가 있다면, 여기 나의 가슴이 있다.”

젊은 코르시카 인 장군은 씨익 웃으면서 뒷짐을 지고, 자신의 가슴을 모두가 볼 수 있게 내놓았다.

“쏴라. 여기 그대들이 증오하는 보나파르트가 있다.”

“어, 어...!”

모두의 얼굴이 시시각각 경악으로 물들고 있음에도 젊은 장군은 싱긋 웃고 있었다.

“어, 어쩌지. 어쩌지?”

“몰라. 몰라. 낸들 아냐?!”

“코르시카 인들이여! 왜 쏘지 않는가!”

“···저 인간은 또 누구야?”

가슴을 활짝 벌리고 있는 장군 옆으로 한 젊은이가 나와, 똑같이 가슴을 활짝 내밀며 말했다.

“나는 그대들이 가장 증오해 마지않는 프랑스 혁명왕국 재무총감 기욤 드 툴롱이다. 나의 가슴도 여기 있다. 쏘고 싶다면 쏘라!”

“기, 기, 기욤?”

“거짓말! 기욤 같은 사람이 왜 여기 있어!”

“그러면 믿지 말고 방아쇠 당기시던가.”

“그, 그건...”

청중들은 이제 혼란에 빠져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10초, 20초, 그리고 30초.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젊은이는 말했다.

“코르시카 인들이여. 우린 왜 독립을 바랬는가. 그것은 바로 압제자 제노바의 차별과 가혹한 탄압 때문이었다.

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또한 여러분과 같은 코르시카 인이다. 여러분들과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땅에서 자란 코르시카 인. 우리 코르시카의 안녕을 바라는 코르시카 인 말이다.”

“그렇다면 왜, 왜 우릴 배신했나!”

“배신? 난 코르시카를 배신한 적이 없다. 그대들이 날 배신했지.

부오나파르테의 집을 불태우고, 오직 파올리만이 옳다며 광신적으로 그를 따른 결과가 무엇이었나? 우리 가족을 내쫓고 오직 자신들만이 옳다고 주장한 끝에 이 코르시카의 지금은 어떻게 변하였나?

영국을 끌어들여 영국의 왕을 섬기려하고, 그조차 불가능하자 저 멀리 러시아를 섬기려한 게 과연 독립인가?

모르겠다면. 저 밖을 보라, 저 밖에는 1만 구의 생기 잃은 시신이 널려있다. 프랑스인, 러시아인, 코르시카인 할 것 없이. 모두가 시신이 되어 이 땅을 구르고 있단 말이다.

그대들에게 묻겠다. 지금도 당신들이 옳은가?”

“······.”

“영국인들의 밑에서, 러시아인들의 밑에서 살겠다는 게 옳은가?”

“······.”

“프랑스인들은 혁명 이후 저 멀리 서인도제도의 흑인들마저 형제로 받아들이고 국가를 잃은 망명자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내가 약속하겠습니다. 코르시카 인들이여. 우리 프랑스는 결코 여러분을 차별하지 않고, 그대들의 의지를 존중하겠노라고.”

“······그걸 우리가 어떻게 믿소?”

나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우리가 외친 자유와 평등과 박애는 모두의 것이니까요.”

그러니 이제 그대들이 결정하라.

우리를 쏘고 영국인들과 러시아인들의 개로 살 건지, 아니면 우리와 얼싸안고 형제가 될 건지.

감사하게도, 코르시카 인들은 똑똑한 사람들이었다.

“형 미쳤어? 권총은 대체 왜 던진 거야. 뒈질 뻔 했잖아!”

“쫄기는. 그거 약실 빈 거다. 임마.”

시발...시발... 미리 얘기를 해주던가!

나 이러다간 제 명에 못 살 것 같애. 진짜 나 같이 평범한 사람은 이러다가 죽어버린다고 이 인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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