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0화 대육군의 일원들 (3) (190/341)

대육군의 일원들 (3)

“프랑스의 신사 분들! 여러분들이 먼저 쏘시오!”

“아니아니, 감사하지만 사양하리다! 먼 길을 찾아온 러시아 신사 분들이 먼저 쏴주시오!”

“하하하!”

“하하하!”

후대의 사람들이 듣는다면 ‘대체 무슨 염병을 떠는 거지?’라며 고개를 갸웃하겠지만, 1793년 10월의 베치오 시 북쪽 7km 지점에서는 양 측의 장교가 서로 모자를 벗어 흔들며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이 전열전술이라는 건, 사실 총의 명중률이 개판인 탓에 먼저 쏘는 쪽이 불리한지라. 전쟁이 시작되면 양 측의 장교들은 서로에게 선공을 양보하게 되어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또 흐르는 동안.

러시아군 총사령관 알렉상드르 수보로프의 속은 타들어갔다.

“항구가 막히면 끝장이야.”

초조했다.

바다는 이미 프랑스인들의 것이 아닌가. 우샤코프 제독이 프랑스 해군에 타격을 주었다 해도, 프랑스인들의 군항인 툴롱은 이곳에서 지척이었다.

그 툴롱에서 10여척의 군함들이 수리를 마치고 코르시카로 잽싸게 달려와 베치오를 봉쇄하는 순간, 이 빌어먹을 섬에 있는 러시아군은 후퇴도 하지 못한 채 말라죽을 게 뻔했다.

그때 가서는 무슨 수를 써도 늦었을 터. 어떻게 해서든 수보로프로서는 지금 적을 본토로 밀어내야했다.

안 좋은 생각으로 시름하는 동안, 전열에서 한 장교가 말을 타고 달려와 수보로프에게 말했다.

“야전 원수 각하.”

“어떻게 됐나.”

“프랑스인들이 먼저 쏘겠답니다.”

“음. 알겠네.”

적이 선공을 해준다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수보로프가 그렇게 생각했을 무렵, 하늘에서 이상한 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렸다.

쒜에에엑!

“이건···.”

“유탄이다! 포격이다!!”

“엎드려어어억!!”

“원수님 피하십쇼!!”

쾅! 콰쾅!

하늘에서 떨어지는 쇳덩어리가 러시아군의 진형을 가르고, 불운한 몇몇 병사를 적록색 곤죽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런! 이런 기사도도 없는 비겁한 놈들 같으니! 총탄이 아니라 포탄을 쏴!!”

“기사도는 무슨. 더러운 군홧발로 남의 나라 땅을 밟으셨으면 감내하셔야지. 그리고 애초에 콕 찝어 뭘 쏘라고는 안했잖나?”

수보로프가 어이가 없다는 듯 분통을 터트릴 때, 맞은편에서는 보나파르트가 웃고 있었지만. 그걸 알 리 없는 수보로프로서는 자기의 눈에 보이는 휘하 장병들을 닦달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날아온 건가!”

“능선입니다! 족히 30문 가량 되는 것 같습니다!”

“30문!!”

적의 포병전력 대부분이라 할 수 있는 30문!

시작부터 자기들의 패를 공개해주다니, 이게 웬 떡인가! 혹여 적장의 경험 부족에서 나온 실수인가?

그게 아니라면 적장이 파놓은 함정인가.

수보로프는 고민했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하더라도, 적의 포병을 완전히 무릎 꿇릴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기엔 러시아군이 처한 상황이 너무나 급박했다.

언제 바다에 등장할지 모르는 프랑스 해군.

하루가 다르게 쌓여가는 점령지 주민들의 적개심.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수보로프는 마음을 굳게 먹고 명령을 내렸다.

“기병대 준비시켜! 엽병도 모두 차출해서 능선으로 보내!”

“우라!”

저 망할 포대만 먹으면. 포대만 먹으면 이 전투는 이길 수 있다.

“엽병대 사격 개시!”

“뒈진 표트르 씨 옆으로 보내드려!”

탕! 탕! 타탕!

“아악!!”

“이바노프가 쓰러졌다!”

“진격! 진격! 포대를 제압하라! 우라!!”

산비탈을 올라오는 러시아군을 향해, 포대를 지키는 프랑스군 엽병대는 단골 고객을 대접하는 음식점 사장님의 마음처럼 총알을 푸짐하게 퍼주고 또 퍼주었다.

“적 기병대 하마! 이제 수적으로 너무 불리합니다!”

“우라아!!!”

그러나 적의 기병대마저 하마하여 공격에 가담하기 시작하자, 프랑스군은 어쩔 수 없이 조금씩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좋아. 이정도 끌어들였으면 됐겠지. 포병 주목! 이제 포를 망실처리하고 퇴각한다!”

“““예!”””

엽병이 시간을 끌어주는 동안.

포대의 프랑스군 포병들은 적이 노획한 아군 대포를 쓰지 못하게 나무못을 대포의 화약구멍에 대고 망치로 두들겨 막아버린 뒤, 서둘러 본대를 향해 도망쳤다.

“적 포대에 우리 깃발이 올라왔습니다! 포대는 이제 러시아의 것입니다!”

“비록 적이 도망치면서 포를 못 쓰게 만들긴 했지만 이걸로 적의 포병전력은 완전히 꺾인 거나 다름없습니다. 각하.”

“좋아. 전군. 총공격을 실시한다.”

뿌우우우! 빰! 빠라빰!

“우라! 러시아! 우라! 차르!”

러시아군 군악병들이 나팔을 불자, 기다렸다는 듯 녹색 물결이 푸른 프랑스군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딱딱한 표정으로 적들이 다가오는 걸 지켜보던 장 란 대위는 손을 올려 병사들을 준비시켰다.

“1열 조준.”

“조주우우운!!”

철컥. 철커덕.

부사관이 큰 소리로 외치자, 병사들이 세웠던 총을 내려 수평으로 꼬나 쥐고 다가오는 러시아군을 가늠자 위에 올렸다.

잠시 후.

“발사.”

“발사아아!!”

타타탕!!

“어억!”

“컥!”

장 란 대위의 손이 내려가자마자, 수백 개의 총알이 다가오던 러시아 군의 1열 대다수를 거꾸러뜨렸다.

“러시아 우라!”

타타탕!!

러시아군 또한 총을 한 차례 사격한 뒤, 번뜩거리는 총검을 앞세워 프랑스군의 전열로 달리기 시작했다.

“루카스 소령님.”

“후우. 후우. 왜 그러시오. 란 대위.”

“침착하게 하시지요. 우리 보병들이 지켜드리지 않습니까.”

“제길, 말이 쉽지. 우린 바다에서만 쏴봤단 말이오.”

“음. 여기서 뚫리면 강에 빠지긴 할 텐데. 우리 육군은 수영을 할 줄 몰라서 말입니다. 혹시 수영 할 줄 안다고 태업하시는 건 아니지요?”

“알겠소! 하면 될 거 아니오!”

기욤 텔의 부함장, 장 에티엔 루카스 소령은 입술을 깨물며 검을 들어 올렸다.

“전 수병! 발사 준비! 란 대위! 이제 앞을 열어주시오!”

“보병대 열어!!”

“란! 지금! 열어!”

최전선에 선 루카스 소령과 장 란 대위. 그리고 망원경 너머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폴레옹은 모두 동시에 외쳤다.

“와아아!!!”

“발포!”

보병들이 열어준 틈 사이로, 기욤 텔에서 나폴레옹이 빌려 온 함포들이 동시에 불을 뿜기 시작했다.

쾅! 콰쾅! 쾅!

포도탄.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왕구슬 크기의 무수한 수의 쇠구슬들이 어마어마한 소리와 함께 프랑스군의 전열 앞을 향해 뿜어져 나갔다.

“켁!”

“악! 으아악!!!”

“그륵... 끄르륵.”

단 10초.

방금 전까지 총검을 들고 달려들던 러시아군의 대부분은 그대로 ‘사람이었던’ 무언가로 화하기까지 단 10초.

“어, 어?”

“2열 포격 개시!”

당황한 러시아군의 뒤를 향해 다시 한 번 수병들이 함포를 쏘기 시작했다.

“아, 아...!”

“도망쳐! 으아아!!”

“멈춰! 멈춰! 탈영은 총살이다!”

사람이 곤죽이 되는 끔찍한 장면. 두 번이나 자기 바로 앞 대대 사람들이 고기덩어리가 돼버리는 걸 지켜 본 러시아군들은 모두들 자기도 모르게 뒤를 바라보고 뛰기 시작했다.

“포니아토프스키 중령!”

“예, 보나파르트 사령관님.”

“폴란드인들은 준비되었소?”

“사령관님. 우리 폴란드인들은 바르샤바를 빼앗긴 그 날부터, 준비되지 않았던 날이 없습니다.”

“좋소.”

결연한 표정의 폴란드인 대장을 바라보던 나폴레옹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다 밀어버리시오.”

“명령대로.”

유제프 포니아토프스키는 허리춤에 있는 기병도를 뽑아 들고 외쳤다.

“폴란드인들이여! 일어나라!”

그의 말을 따라, 야트막한 언덕 뒤에서 말을 꿇어앉히고 대기하고 있던 무수한 폴란드인들이 일어섰다.

“폴란드인들이여! 창을 들어라! 돌격하라!”

“은혜도 모르는 러시아 놈들을 찢어버려!”

“얀 소비에스키 대왕이시여! 우리 윙드 후사르를 보우하소서!”

허리춤에는 기병권총을, 오른손에는 장창을 쥔 기병대가 언덕을 넘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족히 천 마리가 넘어가는 군마가 땅을 울리고, 기수들이 악에 받혀 커다랗게 외쳤다.

“윙드 후사르가 도착했다!!”

“윙드 후사르가 여기 있다!!”

“폴란드 기병이 여기에 왔다!!”

“정면에 기병대다! 적 기병대! 모두 기병 방진으로!”

“피해가 너무 큽니다! 도저히 방진을 짤 수가 없습니다!”

“으아아악!! 도망쳐!!”

이미 수차례의 포격으로 러시아군 전열은 완전히 망가진 상태.

맡은 자리에 설 병사들이 바닥에 널부러진 고기덩어리가 된 이상, 방진을 짜서 적을 막을 수 있는 가능성은 없었다.

순식간에 러시아군 보병과 기병대와의 거리가 좁혀지고, 기병대의 창날이 햇빛에 반사되어 번뜩였다.

“죽어! 죽어! 이 침략자 새끼들아!”

“아악!!”

“살, 살려줘! 으아아!!”

한 병사가 장창에 꼬챙이가 되어 하늘을 날자, 러시아군은 이제 정말 총까지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우드득!

“끄아아악!!”

운이 좋게도 창이나 권총에 맞는 대신 육중한 전쟁마에 치인 러시아군 장병들은, 온몸의 뼈가 잘게 부러지는 선에서 바닥을 뒹굴었다.

“마세나와 란에게 보병대 전진시키라고 해.”

“예, 보나파르트 사령관님!”

“전진! 군가는 라 마르세예즈!”

프랑스군의 군악병이 나팔을 불고, 병사들이 한 음절 씩 노래하며 군홧발을 내딛었다.

일어나라 조국의 아이들아, 영광의 날이 왔도다!

우리에 대항하여, 압제자의 피 묻은 깃발이 일어났도다.

무기를 들라, 시민들이여!

전진하라! 전진하라!

전진하자! 전진하자!

무엇을 원하는가, 이 노예의 무리는! 배신자와 모략하는 왕의 무리는?

그 더러운 족쇄를 누구에게 씌우려고!

프랑스인들이여, 우리에게로다!

아! 저들이 감히 우리를 꾐하여, 옛 노예의 꼴로 만드려 한다!

자유여, 사랑하는 자유여,

그대의 수호자와 함께 싸우라!

떨어라, 독재자와 너희 비겁자야

우리 모두가 너희와 싸울 전사이니. 만일 우리가 쓰러지면,

우리의 젊은 영웅이 땅 위에 새로이 자라나 기꺼이 너희와 싸우리라!

“보병대! 돌격! 다 밀어버려!”

“““와아아!!!”””

푹!

“커, 커어...”

기병대에게 휩쓸려 낙오된 적에게는 가차없이 총검이.

탕!

“억!”

뒤로 돌아 도주하는 적에게는 가차없는 총탄이.

프랑스군의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며 러시아군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막아! 무조건 막아! 아군 보병들을 무조건 도시까지 퇴각시켜줘야 한다!”

“러시아 기병은 오늘 여기서 죽는다!”

“포, 포도탄이다!! 아아악!!”

곡사포 포대를 제압하고 돌아온 러시아군의 마지막 예비대마저 산산이 분쇄시키며, 나폴레옹은 적을 완전히 도시에 밀어 넣는데 성공했다.

“이대로 베치오 앞까지 밀고 들어간다.”

“하지만 사령관님. 시가전이 되면 아군도 피해가 상당할 텐데요. 게다가 러시아군의 서쪽을 방어하던 병력이 시내에 예비대로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앞’까지만 밀고 들어간다. ‘안’이 아니라고. 우리 러시아 늙은이가 심장마비라도 걸리면 안 되잖아?”

적당히. 도망갈 구멍은 열어줘야지.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하면 별로 재미없다.

***

“······아군의 피해가 다대합니다. 사상자 8천에 실종자 1천입니다.”

“포도 대부분 노획당했습니다. 더 이상 화력을 투사할 수 있는 수단이 없습니다.”

끔찍한 패배. 완벽한 패배.

모두가 ‘패배’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원정군은 끝났다. 더 이상 재기할 수 없다. 반이나 되는 기간병을 모두 날려먹었는데 더 무얼 할 수 있겠는가.

도시에 갇혀버린 러시아군에게 남은 건 이곳에서 말라 죽느냐, 아니면 빼낼 수 있는 사람이라도 빼내고 도망가든가. 두 가지 선택지뿐이었다.

결국 수보로프는 무거운 입을 움직여 얘기했다.

“철수하지.”

“야전 원수 각하.”

“그만. 이건 전부 내 책임일세. 내가 적장보다 못났고, 내가 적장에게 말려들어간 거야. 쿠투조프 자네에게는 아무런 잘못 없네.”

수보로프는 이어서 말했다.

“항구에 있는 배를 모두 모으면 몇 척인가.”

“제국 해군 소속 프리깃 다섯 척입니다.”

“한 척당 몇 명까지 탈 수 있지?”

“꽉꽉 들어찬다면··· 천 명 정도입니다.”

“5천.”

2만 중 5천. 사분지 일 밖에 고향으로 돌려보내주지 못하는구나.

“차르께··· 면목이 없군.”

***

"나 이제 슬슬 나와도 돼?"

"아니. 하루만 더 있다가 나와라."

"제기랄."

기욤 드 툴롱. 혼자 남은 배에서 하루 더 숙박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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