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육군의 일원들 (2)
스산하다.
분명 고향 러시아의 공기가 더 차디차건만, 스산하기로는 이 지중해의 공기가 으뜸이었다.
뭐랄까. 분명 아무도 없을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는 듯 한 느낌이랄까.
러시아 제국 육군 이병, 드미트리는 문득 고향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토끼를 잡던 일이 생각났다.
유목민인 코사크인과 친했던 할아버지는, 항상 손수 잡은 토끼를 모닥불에 지글지글 구워주시면서 여러 재미난 이야기를 해주셨다. 유목민들의 전설이라던지, 무서운 타타르인들의 이야기라던지.
개 중에서 지금 가장 많이 생각나는 건 바로 사냥꾼과 사냥감의 이야기였다.
‘사냥감은 항상 긴장을 놓지 않는단다, 드미트리. 그건 사냥감의 본능이야. 언제 공격당할지 모르니 자기도 모르게 온 신경이 바짝바짝 쓰이는 게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드미트리가 자신의 녹색 군복 소매를 살짝 올려보니, 어느 새인가 살갗에 소름이 돋아 닭살이 울룩불룩 올라와 있었다.
젠장, 주둔지에서 벗어나 새벽에 외곽 초소를 지키고 있으려니 별 시덥잖은 이야기가 다 떠오르는구만. 할아버지는 왜 그런 이야기를 하셔가지곤-.
“야, 드미트리.”
“이병! 드! 미! 트! 리!”
선임들이 부르는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 드미트리는 군기가 바짝 든 목소리로 우렁차게 외쳤다.
“너 이 새끼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이라며?”
“예! 그렇습니다!”
“저번에 들었는데 글도 쓸 줄 안다더라고.”
“이열, 드미트리 이 자식 완전 엘리트네. 엘리트야.”
“야, 드미트리.”
“이병! 드! 미! 트! 리!”
“상트페테르부르크 여자들한테서는 장미향이 난다던데. 진짜냐?”
“그, 그런 사실 없습니다!”
“새애끼, 재미없게시리.”
러시아 각지 시골에서 징집된 이 농노 출신 선임들은 도시 출신 드미트리를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 다루듯 다뤘다.
한참 장난감을 재미있게 가지고 논 선임들은 그러고도 재미가 동했는지, 주머니나 손가방에서 자기들이 낮 동안 모은 온갖 진귀한 물건을 꺼내 서로 재보기 시작했다.
“와, 이거 그 뭐냐. 시뻘건 게, 루비인지 뭔지 하는 보석 아니냐? 완전 노났네!”
“헤헤. 나는 회중시계를 얻었단 말씀.”
“시간은 볼 줄 알고?”
“어차피 시장에 내다팔 건데 그게 뭔 상관이야. 똑딱똑딱 잘 가기만 하면 됐지.”
분명 아침까지는 없었던 물건이건만, 선임들이 저런 물건을 서로 키 재듯 재본다는 건 딱 한 가지뿐이었다.
“그으...”
“왜 그러냐, 드미트리? 아. 너도 뭐 꽁쳐놓은 거 있어? 한 번 보여줘 봐!”
“그, 그건 약탈품 아닙니까? 야전 원수께서 분명히 약탈은 금지라고...”
“뭐?”
선임들은 드미트리의 말에, 자기들끼리 눈길을 몇 번 주고받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하여간에 수도 출신 새끼들은 머리가 아주 꽃밭이야. 네놈들이야 등 따시고 배부르게 살아가는 게 일상일지 몰라도, 우리 같은 시골짝 출신 농부들은 라스푸티차 때마다 굶어죽은 마을 사람 시체 몇 구씩은 땅에 파묻는 게 일상이거든?”
“그래, 드미트리. 우리를 너무 매몰차게 보지 말라고. 이럴 때 뽀찌 좀 얻어가야 영주님들 세금에도 버틸 수 있단 말이야.”
“예에...”
이딴 게 군인들이라니. 이게 마적 떼지. 무슨 군인인가.
분명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모병을 할 때는 ‘러시아 제국의 영광과 차르를 위해!’라며 모병관들이 외치고 다녔건만, 드미트리의 앞에 있는 건 영광이 아니라 재물에 심취한 야만인들이었다.
그런 끔찍한 마음에 드미트리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순간.
“······어?”
어, 어? 어어어?
방금 전까지 램프를 키고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선임병들은 모두 움찔거리며 바닥에 누워있었다. 마치 할아버지의 화살을 맞았던 토끼들 마냥.
“상, 상병님! 왜 그러십···.”
드미트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어두운 밤, 유일한 광원인 드미트리의 램프 불빛을 반사하는 수십 개의 눈동자 앞에 몸은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Cet ami est-il le dernier(저 친구가 마지막인가)?”
“Oui(예).”
그 눈동자들 사이에서 한 남자가 저벅저벅 걸어나오며 말했다.
남자는 완전히··· 거지꼴이었다. 옷은 어디다가 뒀는지 속옷을 빼면 완전히 나체나 다름없는 이 사람은, 손에 쥔 단검을 까닥이며 말했다.
“봉쥬르.”
“히이이엑! 읍읍!”
“어허. 자네가 시끄럽게 굴면 우리가 좀 섭해. 이 친구야.”
우악스런 손으로 드미트리의 입을 막은 프랑스군은, 행동과 대비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 어떻게 러시아어를···.”
“내가 예전에 무역 쪽 일을 좀 해서 배워놓은 말이 좀 많거든.”
남자는 계속 이어서 말했다.
“보아하니 젊은 친구 같은데, 이역만리 프랑스 땅에서 삶을 마감하고 싶은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겠지?”
드미트리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이 앙드레 마세나가 자네한테 살 길을 하나 알려주지.”
아는 거 싹 다 불어.
“예, 예?”
“못 들었나? 러시아군이 어디에 어떻게 초소를 깔아놨는지 아는 만큼 다 말해보게.”
아, 그건 좀...
드미트리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하자, 남자는 손에 쥔 단검을 조용히 드미트리의 배에 가져다 댔다.
“아닙니다! 다 말하겠습니다! 사실 말하고 싶었습니다!”
“아주 좋아. 자네, 이름이 뭔가?”
“드, 드미트리입니다.”
“좋아, 드미트리. 우리 어디 한 번 좋은 시간 가져보자고.”
앙드레 마세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자신의 단검을 허리춤에 다시 꽂아 넣었다.
“마세나 대령이 이끄는 선발대가 적 감제초소를 제압했습니다. 사령관님.”
“빠르군. 현재 시간은?”
“새벽 3시 정각입니다. 동이 틀 때까지는 아직 4시간 정도 남았습니다.”
“좋아. 아주 좋아.”
나폴레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여태까지 모든 건 지금을 위해서였다.
자신이 원하는 곳, 자신이 원하는 때에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 적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를 모두 없애고 없앤 끝에 러시아군을 여기까지 몰아넣었다.
“빠르게 뗏목을 띄워 강을 도하한다.”
“예. 사령관님.”
미리 적의 시선이 닿지 않는 산 속에서 건조해놨던 뗏목들이 하나 둘 비탈길을 내려와 강 위에 떠오르고, 병사들과 군마, 그리고 포가 그 뗏목 위에 자리 잡았다.
“어디 한 번 붙어보자고. 늙은이.”
고향 코르시카의 새벽공기는 산뜻하기 그지없었다.
***
“부관.”
“예, 원수 각하.”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그것이...”
부관이 차마 대답하지 못하자, 수보로프는 손을 몇 번 저어 물렸다.
“······과감하군. 아주 과감해.”
젊은 군인다운 과감함이라 해야 하나.
적장은 하룻밤사이에 빠른 속도로 강을 도하한 뒤, 새벽 동안 북쪽에서 베치오 시를 향해 내려오는 진형을 짜냈다.
저 정도 수면 약 2만정도 되려나. 적이 이쪽으로 주력을 돌렸으니, 더 이상은 양쪽에 방어선을 펼 이유가 없다.
“쿠투조프에게 서쪽 방어선에서 물러난 후, 만약을 대비해 베치오 시를 중심으로 새 방어선을 짜라고 말해주게.”
“예, 원수 각하.”
전령을 보낸 후, 수보로프는 휘하 장교들을 모두 모아놓고 입을 열었다.
“제군들. 비록 적이 강을 건넜지만 변한 건 없다. 놈들은 배수진을 치고 있고, 우리는 병법대로 놈들을 강 밑으로 밀어 넣어 수장시켜주면 된다!”
적이 가장 약한 타이밍인 도하시기를 노릴 기회는 놓쳤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 건 아니다.
적은 여전히 강을 뒤에 끼고 있으며 그 뜻은 곧, 수보로프가 한 번만 밀어내면 프랑스인들을 강에 밀어 넣어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적이 우리보다 우월한 건 단 하나! 포병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적 포대의 위치를 제일 우선적으로 파악해야한다. 질문 있나?”
““없습니다, 원수 각하.””
저번에 프랑스군의 포격을 맞으며 알게 된 건, 프랑스군의 대포가 약 20문에서 30문 정도라는 것. 어떻게 알았냐고? 사십 년 동안 전쟁터에서 살았는데 몇 번 맞아보면 대강 얼개가 잡히지.
그리고 30문의 포가 어디에 똬리를 틀고 있는 지만 알아낸다면 적의 가장 큰 장점인 화력을 꺾을 수 있을 터.
“그러니 적의 포 위치를 모두 확인하는 대로 기병대가 선두에 서서 적 포대를 제압한다. 포대만 제압하면 이 전투는 우리의 승리다!”
““우라!!””
러시아 제국 육군, 1만 8천이 베치오에서 북진해 나폴레옹의 군대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사령관님. 적이 다가옵니다.”
“나도 보고 있네.”
주변보다 높은 감제고지에 올라가 전황을 살피던 나폴레옹은 망원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란 대위에게 단단히 일러두게. 이기면 중령까지 진급시켜준다고.”
“특진이 한 번에 두 단계까지나 되는 거였습니까?”
“글쎄. 항구에 계신 총감님께 빌어보면 되지 않을까.”
기욤이 보우하사 텅텅 빈 견장 위에 은색 실이 샘솟고, 줄무늬 오바로크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쳐지니. 그것이 바로 대프랑스 국민방위대 중령 계급이라.
2년 전에는 나폴레옹 자신에게 선불로 별까지 달아준 친구 아닌가. 밑에 있는 좋은 장교 한둘 챙기는 거쯤이야 어떻게 싸바싸바 자신이 입을 털면 가능할지 모른다. 그걸 냉담하게 거절할 만큼 나쁜 녀석도 아니니.
“친구 좋다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이군요.”
“어허. 그렇게 말하면 내가 무슨 정치군인 같잖나.”
···별까지 달고 재무총감과 사적으로 만나 ‘형님, 아우.’하면 정치군인이 맞지 않나?
그러나 공관병 페탱은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그리고 머리가 아무리 총명하더라도 옆에서 자신의 시중을 들어주는 사람의 마음까지 알 리가 없는 나폴레옹은, 인쇄기에서 갓 찍어낸 자신의 명령문을 페탱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걸 산에 있는 곡사포 포대에 가져다주게.”
“예, 사령관님.”
페탱은 한 기병의 뒤에 매달린 채로, 비탈길을 넘어 포대를 향해 서둘러 달려갔다.
처음 적이 만든 축선에 포격을 가하려 만든 곡사포 포대는, 적이 이동함에 따라 당연히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새 진지를 꾸린 상태였다.
그리고 그 포대를 맡던 포병장교는 명령문을 보자마자 얼굴을 찌푸렸다.
“사령관님은 이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왜 그러십니까?”
“이건··· 대놓고 우리가 관심을 끌라는 말 아닌가.”
[적 대형 거리 1km부터 사격개시. 호위를 위해 엽병을 모두 보내주겠음.]
와일드카드인 포대를 이렇게 노출시켜서 좋을 게 있나...? 바로 적 보병들이 거품을 물고 뛰어올 텐데?
그러나 명령은 명령인 법. 더군다나 호위도 붙여준다고 했는데도 징징거리는 건 프랑스의 포병장교라 할 수 없었다.
“알겠네. 사령관님 말씀대로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주게.”
“예!”
“뭐라고 하데?”
“명령대로 따르겠답니다.”
“아주 좋아.”
나폴레옹은 흐뭇하게 웃었다.
이 18세기 전열전술이란 건 막말로 모든 나라의 군대가 대동소이, 비슷비슷했다.
보병들끼리의 전투가 주. 후퇴하는 적을 추격해 전과를 확대하는 기병과 적의 위에 적당히 포격을 뿌려주는 포병이 조공(助攻).
사관학교 시절부터 나폴레옹은 이 전술에 대해 굉장히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왜 보병이 아니라, 포병이 주가 되면 안 되는 거지?
포병이 적절하고 알맞은 사격으로 적을 초토화하고, 기병이 달려들어 적을 혼란하게 만들면, 보병이 들어가 완전히 쓸어담는. 나폴레옹은 그런 그림을 그렸다.
“란에게 추가로 전령을 보내. 우리 루카스 소령님과 수병 나리들이 떨지 않게 잘 지켜달라고.”
“예! 사령관님!”
이번 코르시카 전역은, 나폴레옹이 그리는 그림의 충실한 밑거름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