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8화 대육군의 일원들 (1) (188/341)

대육군의 일원들 (1)

반 쯤 박살이 난 몸동아리를 건사하려는 러시아 해군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포도탄을 우리 함대 돛을 향해 쏘질 않나, 포탄에 줄을 연결해 돛을 찢지 않나.

덕분에 우리 측 함선 중 돛대가 성한 함선은 이제 별로 남지 않았다.

우리의 속도가 느려지자 러시아 군은 바람아 날 살려라하며 돛을 모두 펴고 남동쪽으로 도망갔으니, 비록 적을 격침시키지는 못했더라도 앞으로 해군력을 지중해에 투사할 생각은 못 하리라.

“젠장, 장사 공쳤구만. 적어도 한 척은 나포해야 집에서 기다리는 우리 자식 놈 입에 까까 하나 넣어주는데.”

“나는 이번에 아내한테 떵떵 거리고 왔는데... 에휴.”

“시발, 대출금 이제 어떻게 갚지?”

그렇게 적이 완전히 물러가고, 영국 해군 수병들은 다들 언짢은 표정으로 구시렁댔으나.

“만세! 만세! 승리다!”

“비바 라 네이숑! 비바 라 레볼루숑!”

“프랑스 해군 만세! 프랑스 해군 만만세!”

기욤 텔에 탑승한 모든 장병들은 우리의 승리가 확정되자 너, 나 할 것 없이 서로 얼싸안고 춤을 췄다. 수병, 갑판 사관, 조타수까지 모두가 기쁨에 입 꼬리가 귀에 걸리고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이게 대체 얼마 만에 맛보는 승리의 달콤함인가!

미국독립전쟁에서 영국군을 혼쭐내준 이후로 장장 10년 동안 단 한 번의 영광과 명예조차 얻어 본 적 없는 해군이었다.

혁명 이후에도 육군은 프로이센의 정강이를 걷어 차줄 기회라도 있었건만, 해군은 그저 제 처지를 슬퍼하며 술이나 홀짝이고 배 밑에 달라붙은 따개비나 청소하지 않았던가.

타의로 금연 30일 차에 다다른 논산훈련소 훈련병이 수료를 마치고 담배 한 대를 태울 때의 그 간절한 마음처럼 프랑스 해군 장병들은 기뻐했다.

물론 나도 기뻐했고.

“이야, 이거 아드레날린이 빵빵 터지는데요.”

“예? 아드··· 뭐라구요?”

“···그런 게 있습니다.”

루카스 소령은 고개를 잠깐 갸웃하더니 다시금 진지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각하의 결단이 있어 승리했습니다. 해군을 대표해 감사합니다.”

“무슨 소리이십니까? 루카스 소령과 다른 수병들 덕이지요.”

“아닙니다. 각하께서 있으셨기에···.”

그만해. 부끄러워! 부끄럽다고!!!

아니. 내가 솔직히 한 게 뭐가 있냐? 그냥 ‘한 번 해보세요.’하고 등 한 번 떠밀어 준 것 뿐인데 왜 이렇게 띄워줘?

이래서 이 감투가 싫다. 다들 날 같은 사람으로 보는 게 아니라 무슨 신, 아니. 데미갓 보듯 바라보니 원.

그러나 <의좋은 형제>도 아니고 이러다가는 루카스 소령과의 대화에 끝이 없겠다는 마음에, 나는 결국 알겠다-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부함장님, 각하. 영국 함장들이 곧 우리 배에 올라올 예정입니다.”

“사후 감평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지 의논하려는 것 같군요.”

한 사관이 말해준대로, 잠시 후 몇몇 영국군 장교들이 우리 배로 올라와 내게 모자를 벗고 예를 취했다.

“승리 감축드립니다, 각하.”

“귀관들도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비록 적을 격침시키지는 못했지만 막말로 반병신을 만들어줬으니 아마 반 년 이상은 도크 신세를 질 겁니다.”

“그렇습니다, 각하. 앞으로 러시아 제국은 이 지중해에 강력한 해군력을 투사할 수 없을 겁니다.”

“그것 참 다행이군요.”

“각하. 그러나 우리 함들도 조금씩은 타격을 입어 어느 정도는 수리가 필요합니다.”

“흐음.”

여러 배의 함장들과 얘기를 하노라니, 마침내 엉망이 된 HMS 아가멤논의 긴급복구를 마친 넬슨마저 기욤 텔에 올랐다.

“배를 처음 타셨음에도 불구하고 각하께서 보여주신 그 결단! 과감함! 가히 알렉산더 대왕과 샤를마뉴에 버금간다 말할 수 있는 그 군재! 게다게 제 목숨마저 구해주셨으니, 이 넬슨! 감사함에 눈물이 흐르고, 사나이의 가슴이 경천동지하여···!”

“······그래요. 넬슨 함대장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 넬슨 함대장이 떨칠 용맹함이 대단했다고 피트 수상에게 잘 일러놓겠습니다.”

“크흡! 감사합니다, 각하!”

나는 절대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속으로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이 바다의 뒤무리에에게 말을 건넸다.

“넬슨 함대장은 이제 어떻게 하시렵니까?”

“일단 몇몇 함은 툴롱으로 귀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각하.”

선두에 섰던 트로우브리지라던가, 아가멤논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니 당연하지. 넬슨의 말이 일리가 있다.

“그렇다면 일단 코르시카로 가는 건 우리 기욤 텔 뿐이로군요.”

“걱정하지 마시지요. 트로우브리지와 아가멤논을 뺀 나머지는 일주일 내에 수리를 끝내고 지중해에 다시 투입할 수 있습니다.”

“그래요. 툴롱으로 안전히 귀항하시길 바랍니다.”

나와 넬슨은 손을 맞잡고 기쁜 마음으로 흔들었다.

***

하루 후.

코르시카 아작시오 항.

“이야 굉장히 오랜만에 와보는군요.”

“코르시카에 오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는 형이 사는 곳이라 몇 년 전에 휴가 삼아 와봤지요.”

그때는 내가 일개 사업가였는데 말이지. 참 감회가 새롭네.

쯧. 이번 전쟁이 끝나면 이제는 정말 따땃한 사장실에 앉아 돈이나 벌란다.

영국 지사도 제대로 지사장 임명을 해야 하고, 인수인계도 해줘야 하고, 또 라부아지에가 증기자동차를 만들었으니 머독 씨와 트레비식 씨가 만드는 증기기관차는 언제쯤 상용화를 할 수 있을지 물어도 봐야하고.

할 게 산더미구만 아주.

“입항이오! 입항이오!”

이크. 이제 내릴 준비를 해야겠다. 이제 바다는 지겨워서 죽을 것 같애.

덜커덩!

항구와 배를 잇는 교두보가 내려가고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그 교두보에 발을 디뎠다.

그러나 내가 발을 내딛기가 무섭게 한 익숙한 얼굴이 날 가로막았으니.

“······나폴레옹?”

“어, 기욤. 반갑다.”

“와 동생을 위해 여기까지 마중 나와 준 거야?”

아니. 파리사관학교의 새침때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맞냐? 이건 좀 감동인데.

내 눈물샘이 감동에 겨워 H2O와 나트륨이 섞인 액체를 또르르-하고 내보내려 하는 순간.

“미안한데. 내려오지 말고 한 일주일만 거기 타고 있어라.”

“······응?”

나폴레옹 형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날 다시 배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아니, 왜 이러는데?”

“왜긴. 쇼 한 번 해야 하니까 그러지.”

“대관절 쇼는 무슨 쇼야, 이 인간아!”

임마 너 뒤에 뭐 숨겼어! 빨리 안 말해?

그러나 나폴레옹은 날 선장실까지 데리고 가서 문까지 잠근 후 조용히 속삭였다.

“코르시카의 마음을 사로잡을 쇼인데. 네가 배우 한 번만 서 줘라!”

“···어디 한 번 들어나 보자.”

오... 오...

···이거, 관객 꽤나 모으겠는데?

"아, 한 가지 더. 사람이랑 물건도 좀 빌리자."

"사람? 물건?"

"이 배 수병들."

***

“자네 그거 들었나?”

“뭘?”

“글쎄. 러시아 놈들이 얼마 전에 요 앞바다에서 개박살이 났다더라고.”

“개박살? 누구한테?”

“누구긴 누구야 프랑스 해군이지.”

“······정말로? 그러면 곧 프랑스군이 오는 건가?”

“그거까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러시아 놈들이라면 지금 똥줄이 타들어가서 엉덩이가 따끔따끔 할 것 같은데.”

“삐익! 삐익! 블럇! 거기 두 사람! 지금 당장 해산하라!!!”

“이크, 잘못되면 두들겨 맞을라. 나중에 시간나면 그때 얘기하지. 몸조리 잘하게.”

“그래, 그래. 자네도 몸조심하게.”

허리춤에 곤봉을 찬 러시아인 헌병대가 사람들을 향해 호루라기를 삑-! 삑-! 부는 이곳은 코르시카 동남부의 항구도시인 베치오 시(Vecchio).

베치오 시를 러시아군이 점거하고 거점으로 삼은 지 약 4달, 수상할 정도로 배를 잘 모는 프랑스 해군이 러시아 제국해군을 박살낸 지 약 일주일이 지난 1793년의 10월이었다.

똑. 똑.

- 들어오게.

“예, 원수 각하.”

젊은 장교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최근 들어 얼굴이 초췌해진 노장군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이 지중해에 발을 들이기 전만해도 빈말 좀 섞으면 오십 대로 보이던 장군이었건만, 지금의 노장군은 제 나이인 환갑을 넘어 칠순처럼 보일 정도로 삭아가고 있었다.

“왜 멀뚱멀뚱 서 있나.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아, 아닙니다. 야전원수께 보고 드립니다. 오늘 낮에 북쪽 진지 근처로 산발적인 교전이 있었지만, 모두 적의 본대가 아닌 정찰분대였으며. 아군은 훌륭한 자세로 적을 격퇴하는데 성공-.”

“주민들은?”

“······예?”

노장군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뜨며 말했다.

“주민들의 동태는 어떤가.”

“동태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별도의 특이사항은 없습니다, 각하. 현재 헌병대가 투입되어 치안을 유지하고 있고, 각종 물자의 공출 또한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알았네. 가서 일 보게.”

“우라!!”

“우라.”

보고를 끝마친 장교가 나가고, 사령관실로 삼은 베치오 시장실에 홀로 남게 된 수보로프는 손을 올려 얼굴을 쓸어내렸다.

“사십 년 간의 군생활 동안 이런 전쟁은 처음 겪어 보는구만.”

러시아군은. 수보로프는 결코 이 프랑스 땅에서 정상적으로 사람들을 통제하지 못한다.

별도의 특이사항이 없어? 상념을 잠시만이라도 접어놓으면 수보로프의 귓바퀴에 저 멀리서 들려오는 호루라기 소리가 맴도는데 특이사항이 없다니.

그렇지만 가장 특이한 사항은 바로 저 장교의 얼굴이다. 마치 ‘대수로울 게 있음?’이라며 수보로프의 말에 별다른 낌새도 못 느끼는 것 같지 않나.

감히 차르의 황위를 위협했던 푸가초프의 반란.

야만적인 전쟁.

낙후된 러시아의 환경.

가히 연옥을 방불케 하는 광경 삼박자에서 자라난 러시아인들은 어느 새인가 같은 문명인이라 할 수 없을 정도까지 도덕성과 인식이 박살나고 말았다.

수보로프 자신만 하더라도 저번 튀르크와의 전쟁에서 이스마일 요새를 함락시킨 이후, 튀르크인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쏴죽이지 않았나.

이제는. 이제는 적장의 머릿속을 알 것 같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는 놈은 애초에 수보로프와 싸워줄 생각이 없었다. 그냥··· 그냥 수보로프가 제풀에 지쳐 쓰러지면 그 때가 돼서야 얼굴을 이죽거리며 다가와 멱을 딸 테지.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희망은 남아있다.

동쪽 축선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이동한 러시아군은 군을 수보로프가 지휘하는 북쪽 방어군과 쿠투조프가 지휘하는 서쪽 방어군, 두 개로 쪼개서 항구인 베치오 시를 보호하고 있었다.

쿠투조프가 맡은 서쪽은 고저가 낮은 탓에 감제가 쉬우니 적이 나타나도 빠르게 알 수 있는 요충지이며, 수보로프가 맡은 북쪽은 포시(Possi)라는 작은 마을을 중심으로 강을 낀 요충지.

무엇보다도 포시는 적이 치려면 강을 건너와야 했으니 적이 도하하는 순간 수보로프로서는 케이크 먹는 것보다 쉽게 적을 도륙 낼 수 있었다.

어디 한 번 와봐라. 강에 수장시켜 줄 테니.

***

1793년 10월 20일.

새벽.

스르륵.

야음을 틈타 한 무리의 병사들이 입에 검을, 정수리에는 권총과 화약을 매단 채 강을 건너고 있었다.

“모두들 목표 명심하게. 놈들의 보고체계를 뒤엎는 거야. 쓸데없는 소란은 일으키지 말도록. 알겠나?”

“““예, 마세나 대령님!”””

나폴레옹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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