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바다 (3)
정상적으로 초등학교, 중학교 필수교육을 이수하고 별도의 정신질환을 앓지 않는 한국인이라면 과학 교과서에서 ‘풍화’와 ‘침식’이라는 단어를 익히 들어보았을 것이다.
아무리 단단하고 굳센 바위라 해도 수십 년간 부드러운 바람과 물이 두드리면, 결국 부서지고 깨진다는 매우매우 상식적인 이야기 말이다.
그런데.
맞는 게 바위도 아니고 하물며 나무라면? 게다가 때리는 게 부드러운 바람과 물이 아니라 거대한 대포에서 어마어마한 속도로 튀어나오는 쇳덩어리 포탄이라면?
촤아아악!!
“나무판, 망치 가져와!! 무조건 틀어막아!!”
“이 배가 침몰하면 너도 죽고 나도 죽고 이 배에 탄 사람 모두 죽는다!”
“못! 못 어디 있어!!!”
깨진 나무 선체 사이로 바닷물이 들어오고, 기술 사관들이 우르르 달라붙어 참나무를 새로 덧대길 여러 차례.
아무리 스칸디나비아산 나무가 억세고, 강하고, 품질이 좋다한들 어디까지나 나무는 나무. 커다란 쇳덩어리의 포격을 몇 분여간 받다보면 나무에 금칠을 하든 옻칠을 하든 부서지는 게 당연했다.
졸지에 세 방향에서 공격을 받게 된 HMS 아가멤논의 갑판은, 아래 위 상관없이 시간이 지날수록 아수라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앨리슨! 신호기를 올린다! HMS 젤러스에게 당장 본 함에 붙으라고 해!”
“아이 아이 써!”
당연히 아가멤논을 이끄는 함장은 그런 아수라장을 보고서도 손가락만 쪽쪽 빨 정도로 그리 멍청한 위인이 아니었지만.
“조타수!! 우현 전타! 우현 전타! 우리 젤러스가 아가멤논을 구해야 한다!!”
“자칫 잘못 침로를 변경하다간 뒤쪽 아군 함선이 우리를 들이박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게다가 전열을 이탈하시면 나중에 군법회의에 소환되실 지도 모릅니다!”
“젠장, 젠장! 후위에 전달할 신호기 빨리 바꿔!”
범선 특유의 느리고 답답한 조작성, 무전기도 없어 깃발로 모든 의사표현을 해야 하는 시대의 한계 때문에.
“1번, 2번 함은 상대 좌익을 끌고 먼저 전장을 이탈한다. 꼬리를 치든 물어뜯든 어떻게든 좌익 다수를 끌어내봐!
나머지 함대는 상대 우익에 총공격!! 후속함이 상대 기함으로 붙는 건 무조건 막아라! 희생이 얼마나 나든 상관없다! 기함만 침몰시키고 신속히 전장을 이탈하면 돼!”
“우라!!”
러시아 제국해군의 지휘관도 그 꼴을 보고 있을 멍청한 위인은 아니었기 때문에.
뚫으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 둘 만이 존재해도 어지러운 전장에 양쪽 모두 한 쪽으로는 뚫고, 한 쪽으로는 막아야하는 꼴이 되어버리니 코르시카 북쪽 바다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양측 모두 명확히 알 수 있었다.
- HMS 아가멤논이 위험하다.
“의무실에 사상자가 벌써 스물입니다! 더 이상 남은 마취용 럼주가 없답니다!”
“선장실에 있는 내 프랑스산 코냑들 모두 갑판 밑으로 보내!”
“함대장님! 피해복구용 목재가 이제 반 남았습니다! 떨어져가는 속도를 본다면 앞으로 5분 정도 후에는 피해복구가 어렵습니다!”
“선장실, 장교사관실 상관없이 여유 될 만한 목재는 다 뜯어내게! 어차피 배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으면 쓸모없어질 구역이야.”
“아이 아이 써!”
“버텨라! 버티면 우리가 이긴다!!”
“““아이 아이 써!!!”””
넬슨은 아까 삭구에 맞아 떨어뜨린 자신의 검을 다시 주워 모두가 볼 수 있게 휘두르며 말했다.
“버텨라! 버티면 우리가 이긴다!!”
“““아이 아이 써!!!”””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국가를 위해 적의 대함대를 무찌르고 장렬하고 명예롭게 산화하면 모를까, 밴댕이 소갈딱지마냥 멀리서 포격전만 하는 저 찌질이 러시아 제독에게 죽는 건 이 호레이쇼 넬슨의 최후로 알맞지 않았다.
그 때.
“함대장님! 뒤쪽에서 아군 전열함이 다가옵니다!”
“암!! 당연히 그래야지!! 여기서 이 호레이쇼 넬슨이 죽을 듯 싶더냐! 그래, HMS 캡틴? HMS 젤러스? 누가 오고 있나?!”
“더 거대합니다! 기욤 텔입니다!”
“···뭐?! 우리 VIP께서?!”
이건, 이건 예상 못했는데... 혹시나, 만에 하나 외국의 수상 각하의 털끝하나라도 변이 생긴다면...?
- 넬슨. 귀관에게 본관이 너무 큰··· 임무를 준 건가? 타국 수상의 안전을 지키라는 게 그리 큰 임무였나?
- 해군경 각하, 아닙니다! 아닙니다!
- 자네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 간의 신뢰가 땅에 처박혔네. 꼴도 보기 싫으니 노퍽에 있는 자네 집에서 늙어 죽을 때까지 두문불출 해주었으면 좋겠군.
- 아닙니다!!
눈을 이리저리 데굴데굴 굴리던 넬슨은 잠시 말을 잃었다가 상상하기도 싫다는 듯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젠장, 젠장, 저 분이 다치기라고 하면 난 모가지란 말이야!”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다시 예비군으로 돌아가 집에서 애들이나 볼 수는 없는데.
“하느님, 아버지. 그 분의 대리인이신 국왕폐하. 아서 왕이시여. 마법사 왕 멀린이시여. 부디 제발 모두 이 넬슨을 가엾이 여기사···.”
넬슨이 평소에 외우지도 않는 주기도문에 여러 천지신명까지 합쳐 기도를 하던 말던, 저 멀리서 믿음직스러운 기욤 텔은 거친 파도를 헤치며 쾌속 전진하고 있었다.
***
내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루카스 소령과 <기욤 텔> 호의 수병들은 싱글벙글 웃으며 대포를 포문에 밀어 넣고 닻을 올렸다.
이제 내가 탄 <기욤 텔>은 이제 왕립 해군의 중열을 지나 전열에 다다르고 있었다.
왕립 해군은 전열과 대형을 형성해 조직력 있게 잘 맞서고 있었지만 적의 십자포화 때문에 전진에 상당히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영국인들로서는 전열과 대형이라는 게, 한 번 흐트러지는 순간 다시 바로잡기 어렵기에 악을 쓰고 있을 테니 말이다.
다행히도 내가 탄 기욤 텔은 맨 후위 멀리에 짱 박혀 있었기에, 전열이고 대형이고 상관없이 돛을 올리고 아가멤논에게 빠른 속도로 전진할 수 있었다.
애초에 전열 형성? 대형? 응 난 땅개라 그런 거 몰라. 그냥 가져다 박아. 일단 박아보면 이기겠지. 뭐.
물론 내가 탄 게 1급 전열함이 아니라 3급 전열함이라면 미친 소리겠지만, 공3업 방3업 영웅 배틀크루져를 탔는데 거리낄 게 뭐가 있겠나. 내가 짐 레이너다, 이 말이야.
“조타수! 이제 좌현으로 5도 꺾어! 우현 포문은 미리 개방한다!”
“소령님이 우현 포문 개방하랍신다!”
얼마나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으면 간부들과 수병들이 저렇게 손발이 척척 맞아가는 지 원.
“전투 준비 완료했습니다! 부함장님!”
“좋아! 우리는 이제 아가멤논의 우측을 끼고 돌아 우리가 대신 포화를 맞아준다! 피해를 입는 순간 바로 복구할 수 있게 목재를 미리 분배하도록!”
“예!”
갑판 사관이 내려가자, 루카스 소령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각하. 이제 곧 유탄이 오갈 텐데 미리 선장실에 들어가 계시는 건 어떻습니까?”
“선장실에 들어가 있으면 무조건 살 수 있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보통 높으신 분들은 안에 들어가 계십니다.”
“어차피 눈 먼 포탄 맞으면 가는 거 아닙니까. 어차피 살고 죽는 게 운빨이라면 그냥 소령과 수병들 옆에 있겠습니다. 기욤 드 툴롱이 옆에서 함께한다면 수병들도 용기를 얻지 않겠습니까.”
“···무조건 승리해보이겠습니다, 각하.”
루카스 소령은 내 말에 감정이 북받쳐오는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일을 보러 갑판 밑으로 내려갔다.
그래. 가오도 세워주고, 고관 나리가 떡하니 버티고 앉아서 ‘난 너희와 운명공동체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를 외치는데 의지를 불태우지 않는 군인은 없겠지.
나는 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이번에는 바람에 불씨가 날아가지 않게끔 외투 안에서 불을 붙여 입에 물었다.
쓰읍. 후우.
니코틴을 한 모금 내 혈관으로 태워 보내고, 크게 숨을 들이마시자 매캐한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니. 화약 냄새가 아니라 죽음의 냄새라는 게 더 알맞은 표현이겠구나.
“전쟁이 뭐라고.”
나는 담배를 한 모금 더 크게 들이마신 뒤, 바다 위에 톡 던져버렸다.
1분 후, 기욤 텔이 전장에 돌입했으니 딱 적당한 때 잘 버린 듯 싶었다.
***
“발포!”
부사관의 명령이 떨어지고 수병들이 포에 화승을 가져다 대자.
치이이익!
콰쾅!!
우렁찬 소리와 함께 대포들이 후퇴했다.
기욤 텔의 우현에 위치한 50여문의 포탄은 그대로 50여 개의 쇳덩어리를 아가멤논에게 포화를 쏟아내던 적의 8번 함 측면을 정확히 타격했다.
“으아아악!!! 군의관! 군의과아안!!”
“1층에 누수 발생! 누수 발생!”
“희생이야 날 수 있는 거다! 모두 침착하게 적의 기함에 계속 포격해!”
“한 번 더 옵니다!!”
“뭐, 뭐?”
70여 문을 장비한 러시아의 8번 함은 자기가 가진 대포의 7할에 맞먹는 포화를 삽시간에 얻어맞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군이다!! 프랑스 군이 왔다!!”
“이야! 존나게 큰 거봐! 포탄도 존나게 많이 쏘겠지!”
“아군이 시간을 벌어주는 지금이다! 잠시 교전을 멈추고 부상병 구호와 피해복구에 집중한다!”
“예! 함대장님!”
아가멤논의 선원들과 넬슨은 이 황금 같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만신창이가 된 배를 빠르게 수리했다.
“8번 함에서 입전! 피해가 너무 큽니다!”
“우샤코프 제독님! 적의 1급 전열함이 합류했습니다!”
“블럇! 조금만 더 하면 기함을 완전히 박살낼 수 있었는데!”
분한 마음에 우샤코프는 자기가 손을 짚고 있던 탁자를 쾅! 소리가 날 만큼 세게 두들겼다.
안 그래도 열세인데 1급 전열함까지 합류했다면 더 이상 러시아군에게 승산은 없었다. 기함을 격침시켜봤자, 바람이 강해져 저 괴물 전열함이 순풍을 받는 순간 모든 러시아군 함대는 바다 속에 가라앉을 테니.
“남동쪽으로 40도 틀고 완전히 이탈한다. 포대에 철탄을 빼고 포도탄 준비해서 적의 돛을 노리도록. 놈들의 추격속도만 늦춰.”
“목적지는 어디로 하시겠습니까?”
“제노바로 가는 북쪽 길은 이미 적에게 막혔다. 동쪽 이오니아로 가자.”
“우라!!”
“후우.”
우샤코프는 길게 장탄식을 한 뒤, 한 장교를 불러 말했다.
“수보로프 원수에게... 연락선을 보내게.”
“뭐라고 보내면 되겠습니까?”
잠시 침묵이 있은 후.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다를 빼앗겼다고.”
***
코르시카.
“그래서? 더 말해보게.”
“······우샤코프 제독께서는 당분간 탄약과 포탄의 보급이 힘들 것이고-.”
“음. 당분간이라는 게, 얼마나 되나?”
“이오니아에서 파손된 선체를 모두 수리하기까지는 프리깃을 운용하는 게 전부입니다. 원수 각하.”
그 때. 침묵이 내려앉은 러시아군 참모부 안으로 한 병사가 달려왔다.
“장군님! 프랑스군 포대가 우리 측 축선에 포격을 시작했습니다!”
“······쿠투조프.”
“예, 수보로프.”
“축선을 포기하지. 적은 절대 우리 방어선에 꼬라박아줄 위인이 아니니.”
“······알겠습니다. 수보로프.”
수보로프는 방금까지 스테이크를 썰던 포크와 나이프를 가지런히 접시 위에 내려놓고 신음을 내쉬었다.
입맛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