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6화 우리들의 바다 (2) (186/341)

우리들의 바다 (2)

콰쾅!! 쾅!!

듣기만 해도 영영 고막이 나가버릴 것 같은 폭음이 한 스푼.

“2층 3번 포가 고장 났습니다!! 줄을 당겨도 포가 안 나갑니다!!”

“젠장, 포 안 심지가 망가졌다! 안에 있는 포탄 빼고 비상용 화승 가져와!!!”

쉴 새 없이 들리는 부사관들의 목소리가 한 스푼.

콰직!! 쩌저적!!!

수병들의 가슴을 섬짓섬짓하게 만들고 있는 적의 포탄이, 두터운 스칸디나비아산 목재 함선 곳곳을 두들기는 소리가 한 스푼.

“흐아아악!! 아아아악!!! 내 팔!! 내 팔이!!”

“에릭이 맞았다!! 군의관! 군의과아안!!”

“환자는 어디 있소! ···제기랄. 이 친구 당장 의무실로 옮겨!”

“왜, 왜. 많이 나쁜 거요!?”

“튀어 오른 나무조각이 빼내기에는 너무 깊게 박혔소. 당장 팔 안 자르면 이 친구는 폐병으로 죽어. 위생병! 지금 당장 마취용 럼주 가져와! 이 친구 입에 강제로 들이부어!”

“뭐, 뭐? 팔?! 안돼! 안돼! 외팔이는 싫어! 차라리 죽이란 말이야!”

“···이보시오. 다들 이 친구가 침대에 얌전히 누울 수 있게 도와주시오.”

“알겠습니다. 에릭, 미안하네.”

“톱과 재갈 가져왔습니다, 군의관님!”

“톱은 이리 주고 재갈은 저 친구 입에 물리게.”

“이런 씨바아알!! 개새끼들아! 당장 저리 꺼져!! 읍! 읍!! 으으으으으!!!”

불운한 수병과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수병들의 목소리가 한 스푼.

그렇게 모든 소리를 더하면 비로소 HMS 아가멤논의 갑판 아래 모습이 생생히 머릿속에 그려졌다.

“부관, 아래쪽 상황은?”

“난리입니다.”

“그렇겠지. 이렇게 아가멤논에게 포화를 쏟아내는 걸 보니, 아마도 러시아인 제독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낸 모양이로군.”

“···위험한데 전열을 포기하고 후열로 이동하시겠습니까?”

“헛소리. 말단 수병들이 죽어나가는데 제독이 돼서 겁쟁이마냥 꼬리를 내뺄 수는 없지. 이대로 항로 유지하면서 적의 대형을 가르는 거에만 집중하게.”

펑!! 촤아악!!

그 순간, 바다를 때린 적의 포탄이 만들어낸 물기둥이 넬슨의 위를 덮쳤다.

“함대장님 괜찮으십니까!”

“블러디 헬! 이거 비싼 옷인데!!”

좆같은 러시아 놈들 같으니. 높으신 분들과 어울리려고 얼마나 많은 거금을 들여 산 옷인데 이걸 비린내 나는 바닷물로 세탁해?

“4번 함에 신호해서 백병전과 해병대 준비시켜!! 내 옷값은 저 새끼들 배를 나포해서 벌어가야겠다!”

“예! 함대장님!”

다시 색색깔의 신호기가 아가멤논의 마스트 위로 올라갔다.

***

러시아 제국해군 기함.

상트 파울.

“확실합니다. 적 2번 함 신호기가 제일 먼저 바뀌었습니다.”

“음.”

“우샤코프 제독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상대의 1급 전열함은 어디에 있지?”

“가장 후열에서 선두함들과 거리를 두고 접근 중입니다.”

“···왜지?”

왜 가장 크고, 가장 무장이 좋은 전열함을 후방에 짱박아 놓는단 말인가.

아무리 러시아 군함이 수적으로 열세라 해도 지금 전투에 나선 함선들의 차이는 겨우 한 척에 불과하다.

1급 전열함이라는 카드를 투입하지 않고 굳이 손에 쥐고 있는 이유로 수적 우세를 꼽기에는 그 차이가··· 너무 작지 않나?

“적장에게 뭔가 속셈이 있는 거 아닐까요?”

“그렇다기에는 제 목숨이 달려있는 일인데 그런 식으로 도박수를 던지겠습니까?”

“적 선두함! 우리 측과 이제 140야드(130미터) 거리입니다!”

“제독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우샤코프 제독님!”

“제독!”

주변에서 채근하는 목소리에도 우샤코프는 머릿속의 1급 전열함과 망원경 렌즈 너머로 다가오는 적함들의 모습에 집중, 또 집중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아. 영국 놈들의 속셈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1급 전열함이 전투에 아직 합류하지 않은 건 우리에게 이득이 되었으면 되었지 결코 손해는 아니다.”

““그렇습니다, 제독님.””

대열 끝에 있는 전열함이 전투에 참여하려면 적어도 순풍을 타고 15분은 걸릴 터. 그 전에 상대의 손아귀에서 서둘러 빠져나가야 한다.

“뱃머리 방향으로 동쪽을 타고 돈다. 동남쪽 방향으로 20도 틀고 그대로 바람을 받으며 전장을 이탈하도록.”

이번 해전은 적이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라고 상정하고 범한 실수일 뿐.

제노바나 이오니아로 귀항한다면 작계를 뜯어고치고 최대한 교전을 피하는 식으로 해군을 운용하면 된다.

“모든 함에 전하게. 가는 길에 좌현으로 적 2번함에 조준사격하라고. 갈 때는 가더라도 짱돌 하나는 머리에 박아주자.”

““예, 제독!!””

가히 치열한 수 싸움이었지만 이미 전술상으로 우샤코프는 패배한 상태였다. 다만 병력을 온존하고 후퇴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그 패배가 크지 않은 것 뿐.

“적함들이 동남쪽으로 움직입니다, 넬슨 함대장님!”

“컬로든에게 무조건 가로막으라고 해! 내 옷까지 버렸는데 전공마저 놓칠 수는 없다!”

단 한 척이라도. 단 한 척이라도 격침시키거나 나포하면 안 그래도 우군보다 함대 규모가 후달리는 러시아로서는 두 번 다시 지중해로 그 얼굴을 내밀 수 없다.

“후열은 단종진 깨고 2열 종대로 선두 따라오도록! 컬로든이 좌익 함대 선봉을 맡고 내가 우익 함대 선봉을 맡는다!”

“아이 아이 써!”

넬슨이 명령을 내릴 때마다 신호기들이 펄럭거리며 위치를 바꾸고, 뒤를 따르던 함들이 갈라져 나와 새 대형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샤코프는 적이 대열을 새로 형성하느라 생긴 틈을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상대 기함이 우익 선두를 맡았다! 적 후열이 도착하기까지 딱 5분! 5분 동안 수적우세는 우리에게 있다! 전 함대 좌현으로 적 우익 선두에 포격 개시!”

““우라!!””

콰콰쾅!!

쩌저적! 으지지직!!

동남쪽을 향해 이동하는 러시아군의 4번에서 10번 함에 이르기까지 6대의 함선이 좌현에서 쏟아내는 포격에 HMS 아가멤논의 선체는 시시각각 불쾌한 소리를 내며 포탄을 맞아내고 있었다.

“적의 포격이 너무 거셉니다! 후열이 도착할 때까지 배를 물리시지요!”

“이 러시아 놈들아! 이 호레이쇼 넬슨이 대영제국의 군인이 돼서 죽음을 겁낼 듯 싶더나?! 제 2의 제임스 울프(캐나다를 정복하고 전사한 해군 영웅)가 여기 있다!”

“함대장님!”

“아옳옳옳!!!”

티-잉!!

넬슨이 검을 뽑아들고 광전사마냥 뭐라뭐라 소리지르는 순간, 러시아군의 눈먼 포탄에 끊어진 삭구 한 가닥이 넬슨의 옆을 후려쳤다.

“으억!!”

“함대장님! 괜찮으십니까!”

“이런 씨부랄! 존나게 아프구만! 부축 좀, 부축 좀 해주겠나?”

부관 앨리슨 중위의 팔을 지지대 삼아 다시 일어난 넬슨은, 화끈화끈해진 왼팔을 부여잡고 조타수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밀러! 좌현 전타! 횡대로 세우고 우현 포문으로 저 새끼들 아가리에 포탄 좀 넣어줘야겠어!”

“아이 아이 써! 좌현 전타! 횡대! 우현 포문 개방!!”

우현 포문이 열리고 포문에 그르릉-하는 대포 밀어 넣는 소리가 들리길 잠시, HMS 아가멤논 또한 불을 뿜기 시작했다.

빠가각!! 콰직!!

“으아악!! 으악!”

“블랴아앗! 누가 좀 살려줘!!”

영국처럼 스칸디나비아산 최고급 원목을 배의 재료로 쓰기에는 쪼들리는 살림인 러시아였기에 아가멤논의 포에 불운하게도 관통당한 배에서는 러시아 제국해군의 수병들이 비명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나 우샤코프는 비명소리가 들리든 말든 손에 불끈 쥐며 말했다.

“상대 기함이 횡으로 섰다!”

감투 정신도 감투 정신 나름이지. 제가 무슨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8번, 9번 함에 전파해! 침로를 바꿔 상대 기함을 여러 각도에서 두들겨 패라!”

“우라!!”

이 놈. 용기는 가상하다만 그 용기를 내가 만용으로 만들어주마.

러시아 제국 해군의 후열에 해당하는 두 척의 전열함이 대열에서 멀리 떨어진 아가멤논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

“···대단하군요.”

빈 말이 아니다. 정말, 정말 대단하긴 하다.

강철을 두르고 엔진이라는 심장을 달기 전, 전열함이란 국가의 모든 과학력과 예산을 집합해 만든 전략병기나 다름없는 물건.

국가의 자존심들이 실시간으로 내 눈앞에서 그 거대한 몸집을 부딪치고 있는 걸 보노라면 나도 절로 손에 식은땀이 났다.

이 멀리서도 나무가 튀고, 불길이 올라오고, 물기둥이 수 미터 씩 치솟는 게 보이니 원.

그 뭐시냐, 남자의 그 로망을 간질이는 무언가가 있긴 하네.

여태까지 왜 해군들이 그렇게 배에 박아대는 지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이제는 좀 이해가 갈락말락한다.

“빌뇌브 함장이 보기에 전황은 어떻습니까?”

나는 내 옆에서 망원경을 들고 전황을 관찰하는 빌뇌브 함장에게 물었다.

전투가 시작되었는데도 부관이랑만 짝짜꿍하면 수병들이 보기에 그림이 상당히··· 이상해지지 않나. 수병들을 관리하는 상급자에 대한 일종의 배려다. 배려.

“우리 측이 유리합니다만. 러시아군도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겠군요.”

“그렇습니까?”

“아마도 아직 퇴로가 남아있으니 순풍을 받고 퇴각할 생각일 겁니다.”

“흐음.”

“망원경을 건네 드릴 테니 직접 보시겠습니까?”

“고맙습니다.”

나는 빌뇌브 함장이 건네준 망원경을 들고 저 멀리 넬슨이 탄 아가멤논을 렌즈 가득히 담았다.

“아니. 원래 제독이 탄 기함이 저렇게 앞장섭니까?”

“그게··· 영국군은 원체 공격적이니 말입니다. 제독들이 선두에 서는 경우도 많은 걸로 압니다.”

빌뇌브는 머쓱한 듯 얼굴을 긁으며 말했다.

자기도 저 멀리서 영국군이 싸우는 걸 보면 조금 쪽팔린 건 아나보지.

나는 다시 망원경을 들어 아가멤논을 쳐다보았다.

잠깐만...

저거 지금 위험한 거 아닌가?

잠시 눈을 떼었을 뿐인데. 어느 샌가 아가멤논에는 두 척의 러시아 군함이 달라붙어 근거리에서 포격을 주고받고 있었다.

“빌뇌브 함장! 저거 보십시오!”

“무슨 일이십니까 각하? ···이런 세상에.”

넬슨이 위험한 것 같다는 내 생각이 맞았는지, 빌뇌브는 자기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입 밖으로 토해내고 있었다.

“후속함들이 어서 붙어줘야 넬슨 함대장이 한 시름 덜 텐데...”

당연하게도 후속함들이 빌뇌브 함장의 말처럼 전속력으로 돌진했지만 계속된 적의 포격에 아가멤논으로 가는 속도가 조금씩 늦어지고 있었다.

육군 출신인 내가 봐도 이건··· 위태롭다.

나는 잠시 고개를 돌려 내가 탄 <기욤 텔> 호를 살폈다.

100문을 장비한 3층 중갑 전열함. 아마 지금 지중해에 나온 배 중 이거보다 강한 배는 없겠지. 우리가 저기 있는 러시아군 전열함 속으로 들어간다면, 넬슨을 단숨에 구해낼 수 있으리라.

“빌뇌브 함장. 전속력으로 전진해서 아가멤논을 구합시다.”

“예, 예?”

“못 들었습니까? 후열 대기를 풀고 넬슨 제독을 살립시다.”

“그, 그게... 지금 전선에 들어가면 아군 오사의 위험도 있고, 또 각하께서 위험하시기 때문에···”

“···뭐요? 내 위험? 좋습니다! 내가 허가할 테니 당장 아군을 구원하러 갑시다! 내가 뒈져도 당신 책임 아니라고 여기서 공언하지요.”

“어, 어...”

그러나 빌뇌브는 무어라 말을 할락말락하더니 입술을 물 뿐이었다.

결국 나는 폭발하고 말았다.

“동맹군 장군이 저렇게 위험한데 지금 몸을 사릴 때입니까?! 야 이 개새끼야! 넌 자존심도 없냐?! 빌뇌브 당신은 파면이야!! 파면!!!”

나는 고개를 돌려 우리 뒤에서 눈을 이리저리 데굴데굴 굴리던 루카스 소령을 바라보았다.

“루카스 소령!”

“예, 예?!”

“내가 직접 명령을 내린 겁니다. 내가 죽어도 내 책임이니 당장 이 배를 아가멤논에 가져다 대세요!”

“예! 각하! 돛을 올려라! 정면 전타! 목표는 아군 아가멤논의 구원!”

프랑스 해군의 마지막 자존심.

거대한 100문 전열함, 기욤 텔이 그 육중한 크기를 자랑하며 돛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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