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바다 (1)
“프랑스는 귀관 전원이 각자의 의무를 다할 것을 기대한다? 하, 악취미군 넬슨.”
저것 봐라. 개버릇 남 못 준다고 허구한 날 저러니 전직 해군경한테 밉보여서 예비역으로 쫓겨나지.
선두함, HMS 트로우브리지의 함장 컬로든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휘휘 저으며 말했다.
“하여간 진급 욕심에 날라리 왕자 옆에서 이빨 털어먹던 솜씨 어디 안 가는군요.”
“어허, 부관. 말조심하게. 그래도 우리 함대장이야.”
“진급 욕심 때문에 날라리 왕자 옆에서 이빨 털어먹었다는 건 부정을 안 하시나봅니다.”
“어허.”
“함장님. 그러면서 웃으시면 설득력이 없습니다만.”
“큼큼. 이 친구가 정말.”
컬로든은 부관의 말에 저도 모르게 올라갔던 입꼬리를 억지로 내려 다시 근엄한 함장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함대장께서 참으로 용기 나는 독려를 해주셨으니 이쪽에서도 답변을 해야겠지.”
“문구는 뭘로 하시겠습니까?”
“비바 라 레볼루숑.”
“으음.”
방금 전에 본인이 넬슨 함대장에게 악취미라고 투덜댔던 거 같은데.
그러나 함장이 까라면 까야하는 법. 부관은 고개를 끄덕이고 마스트 위로 수병을 보내 신호기를 내걸었다.
선두함의 마스트에서 알록달록한 깃발이 올라가자, 이내 12척의 군함에서 모두 웃음소리가 들려왔으니 컬로든과 넬슨 두 사람의 웃음코드가 모두의 통했다는 증거렷다.
***
높으신 외국의 수상. ···아닌가? 뭐, 총감이나 수상이나 하는 일은 거기서 거기니 뭐 다를 건 없겠다.
아무튼 평시라면 옆에서 알랑방귀를 뀔 고관대작이지만 전투 시에는 짐이 될 게 분명한 분을 멍청해 보이는 프랑스 해군 함장에게 짬처리한 넬슨은 선장실에 홀로 남아 위스키를 홀짝이고 있었다.
거친 바닷바람과 물살에 좌우로 배가 이따금씩 기울어질 때마다 램프가 덩달아 흔들리고, 불꽃이 술잔에 일렁거렸다.
호박색 위스키와 금빛 불꽃이 한데 어우러져 피어내는 어여쁜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던 넬슨은 몸을 기울여 제 앞에 놓인 해도(海圖)를 곰곰이 들여다보았다.
“호레이쇼, 호레이쇼. 적은 어디에 있을까.”
넬슨은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말하면서 검지손가락을 움직여 드넓은 지중해를 지그시 눌렀다.
적은 제노바에서 출발했다.
그렇다면 이 지중해 어딘가에 놈들의 함대가 둥둥 떠다니고 있을 텐데.
과연 풍상(風上,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잡으려할까, 아니면 풍하(風下, 바람이 불어오지 않는 쪽)를 잡으려할까.
바람에 의지해 이동하는 범선의 특성상, 바람을 한가득 안고 자기 마음 가는 대로 배를 움직일 수 있는 풍상은 공격하기 능한 자리였고.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는 없지만, 유사시에 바람을 받고 후퇴하기 적합한 풍하는 방어하기 적합한 곳이었다.
사실 말이 방어하기 적합한 곳이지, 범선 지휘관 백 명 중 풍상과 풍하 중 어디를 선택하고 싶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모두 풍상을 선택했다.
아직 엔진이 없는 범선시대에 바람을 받고 기동성을 극대활 할 수 있다는 이점은 그 어떤 이점보다 강력했으니.
“그렇다면. 내가 지금 러시아인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넬슨은 호박색 위스키를 제 위장을 향해 다 털어 넣고는 그렇게 읊조렸다.
일단 고맙게도 러시아 제국해군이 가진 정보는 한정적이다.
제 놈들이 상대하는 적이 프랑스 해군이라고 생각할 테니 말이다.
프랑스 해군은 전통적으로 수비적인 전술을 택했다.
유럽 한 가운데 있다는 프랑스의 지리적 특성상 마음 놓고 해군을 중점적으로 양성하기에는 육군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일 수 없었다.
당연히 영국 같은 나라에 해군력이 밀릴 수밖에 없었고 프랑스군의 교리는 자연스럽게 현대 대한민국 국군의 ‘고슴도치 전략’처럼 ‘네가 쎈 건 알겠는데, 네가 우릴 때리면 너도 반신불구는 될 걸?’같은 수비적인 모습이 되었다.
즉, 풍하를 잡는 게 프랑스 군의 교리.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넬슨은 작게 혼잣말을 했다.
“그렇다면 적은 풍상을 잡으려하겠군.”
- 풍하를 잡는 프랑스군을 상대로 풍상을 잡고 밀어붙인다.
대강 러시아 제국해군 머리에 떠오를 생각 아닌가.
넬슨은 눈을 이리저리 움직여 해도 곳곳을 살폈다.
프랑스군이라면, 수비적인 프랑스군이라면 어디에 자리 잡을까.
아마도 육지에 가깝게 붙어 움직임을 최소화 하고 화력을 극대화하려 하겠지.
그 프랑스군을 요격한다면 어느 풍상 쪽에서 내려가는 게 제일 좋을까.
제노바에서 바로 직선거리로 달린다면 밤사이 북쪽 풍상 자리를 잡고 육지 가까이 댄 프랑스 해군을 두들겨 줄 수 있다.
그리고 프랑스 해군을 박살낸 뒤 코르시카에 대한 제해권까지 가지려면.
“코르시카를 향해 바람이 부는 북쪽.”
적은 코르시카 북쪽 풍상자리를 잡겠구나.
그렇다면 넬슨이 해야 할 건, 단 한 가지.
“앨리슨 중위!! 밖에 있나?!”
“예, 함대장님. 부르셨습니까?”
“아침이 되면 모든 함대에 전하게. 서북쪽을 향해 급속 전진하라고. 적보다 북쪽 풍상 자리를 잡아야한다.”
“예. 함대장님.”
부관이 연 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다냄새.
십년 만에 맡아보는 전장의 밤바다 냄새는 여전히 넬슨 자신의 손에 담긴 위스키처럼 향긋하고, 사랑하는 아내의 품처럼 따듯했다.
마치 여태까지 넬슨 자신을 기다려왔다는 것처럼.
***
프랑스 지중해함대 기함.
기욤 텔.
내가 아가멤논에서 기욤 텔로 옮겨 탄 다음날.
“저게 무슨 뜻입니까?”
“서북쪽, 최대 속도, 전진입니다.”
“아하.”
날이 밝자마자 아가멤논에서 떨어진 기동명령에, 나와 다른 프랑스인들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바다를 순항하고 있었다.
이것 참 씁쓸하구만.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다니.
“각하? 무슨 생각하십니까?”
“좆같다는 생각이요.”
“예에...”
빌뇌브 함장의 부관인 장 에티엔 루카스(Jean Jacques Étienne Lucas) 소령은 내 말에 말꼬리를 흐렸다.
루카스 소령. 이 불쌍한 사람 같으니.
나였다면 자기 직장이 실시간으로 불타오르는 광경을 보자마자 ‘이 길은 제 길이 아니오. 때려치우고 나가서 장사나 하렵니다.’하고 내뺐을 텐데, 루카스 소령은 집에 있는 토끼 같은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의 무게 때문에 직장이 무너져내려가는 걸 보면서도 아직도 때려치우지 못했다.
아, 빌뇌브 함장은 어쩌고 소령짜리 부관이랑 노닥거리냐고?
걸핏하면 ‘전장 이탈’이라던가 ‘전략적인 후퇴’ 등등 헛소리를 주워섬기는 바람에 짜증나서 자리를 피했다. 에휴.
나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려했지만 거센 바닷바람이 소중한 성냥불을 마구마구 꺼트리는 바람에 결국 다시 주머니에 쑤셔 박았다. 에이씨.
“후우. 소령은 좆같지 않으십니까?”
“예, 예?”
“이 상황 말입니다.”
“어···.”
“그냥 허심탄회하게 말하시죠. 제가 어디 가서 떠벌릴 위인은 아니니까.”
“직장 말이십니까, 아니면 지금 영국군의 지휘를 받는 거 말씀이십니까?”
“앗. 아아...”
루카스 소령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
“직장이야 트레빌 사령관님께서 분전하시고 개박살났던 3년 전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나아지긴 했으니 일개 소령으로서 차마 심한 말은 못하겠습니다만. 지금처럼 영국군에게 지휘를 받는 건 꽤나··· 참담한 기분이군요.”
“이해합니다. 수병들은 어떻습니까?”
“수병 중 대부분이 적든 크든 이 프랑스 해군에 정을 붙이고 산 친구들이고 개중에는 미국독립전쟁에서 싸웠던 병사들도 있으니 저보다 심하면 심하지 결코 적지는 않을 겁니다.
심지어 바닷사람들이면 다들 거친 사람들 아닙니까. 많이들 속상해 할 테지요.”
“자존심이라면 둘째가면 서러운 우리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각하.”
나는 묵묵하게 루카스 소령의 말을 듣다가 말했다.
“수병들 사이에서 빌뇌브 함장에 대한 원망이 꽤나 크겠습니다.”
“어···, 음.”
프랑스 함대-라고 쓰고 함선이라고 읽어야 하는 비운의 군대에 속한 해군 소령은 또 다시 말 꼬리를 흐렸다.
“···각하께 차마 아니라고는 못 하겠군요. 함장이 돼서 전투를 두려워한다는 말이 종종 나돌고 있습니다. 물론 사관들이 단속을 하고는 있습니다만...”
“후우. 알겠습니다.”
“아가멤논에서 입전! 아가멤논에서 입전!”
마스트 위에 올라가 있던 수병이 우리가 있는 아래를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적 함대 조우! 적 함대 조우!! 단종진 유지!!!”
***
“···이상한데? 적은 프랑스군이라고 하지 않았나?”
“예! 그렇습니다, 우샤코프 제독님!”
“그런데 왜?”
우샤코프는 눈에 가져다 댄 망원경을 천천히 떼며 말했다.
“왜 적이 우리보다 북쪽 풍상을 잡고 있지?”
“다시 한 번 풍상을 잡을 수 있게 항로를 보다 북동쪽으로 조정할까요?”
“···일단 대기하면서 진을 횡대로 세우지. 모든 함은 포격을 적 선두함에 꽂아 넣을 준비하도록.”
“예, 제독!”
이제 와서 북동쪽으로 항로를 틀면 적의 공격에 측면을 노출시키는 꼴.
프랑스 해군이 공격권을 갖게 된 건 예기치 못한 일이지만. 적이 풍상을 잡았다고 해서 영 나쁜 것만도 아니다.
애초에 풍상을 잡고 내려온다는 건, 도리어 후퇴할 때 맞바람을 맞아야한다는 것.
적의 공격을 한 번 받아치고 틈을 노려 우샤코프가 역습한다면 우위를 가져갈 수 있다.
“전 포. 포구 마개를 열고 화승(火繩) 준비한다!!”
“좌현 포문 개방!”
러시아 제국해군 전열함의 포문이 일제히 열리기 시작했다.
지중해 분견함대 기함, HMS 아가멤논.
“적 돛대! 총 11개! 전열함 11척입니다!”
“우리가 한 척 유리하군.”
“예? 프랑스군까지 합하면 두 척 아닙니까?”
넬슨은 손을 내저었다.
“높으신 분이 타고 계시잖나. 함장도 영 믿음직하지 않고. 그냥 후열에 배치하게.”
“예, 함대장님.”
“HMS 트로우브리지와 컬로든에게 전파하도록. 단종진과 선두 유지하며 적의 횡대 3번과 4번 사이를 뚫고 나가라고.”
횡대로 쭉 서있는 적함들의 중심을 가르면 단번에 적의 진형을 반토막 낼 수 있다. 그러면 좌익과 우익을 전개해 적을 싸먹을 수 있게 된다. 물론 선두가 좀 얻어맞긴 하겠지만.
“트로우브리지에서 입전입니다.”
“뭐라고 하나?”
“얻어맞는 건 자신 있는데 함대장님이 훈장을 달아줄 거라는 자신은 없답니다.”
“하하하! 그런 건 말은 종이에 써서 다우닝가 10번지 수상관저에나 보내라고 해! 나무 두께도 가장 두꺼운 놈들이 엄살은.”
“옙!”
“제군들. 본 함은 2번에 대기하다가 선두함이 전투불능 되면 피해복구 동안 앞으로 나선다. 알겠나?”
“예! 넬슨 함대장님!”
***
“막아! 우리 진형을 좌우로 찢으려한다! 프랑스 놈들의 선두함 무조건 침묵시켜!!”
러시아 제국해군의 기함 상트 파울에서 깃발이 올라가자마자 횡대로 세운 러시아 전열함들이 일제히 포탄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콰쾅!! 쾅!!
“이런 씨발! 타타르 놈들 어마어마하게 쏟아붓는구만!”
“선두 트로우브리지 깃발 신호! 더 들어가겠답니다!”
“좋아, 우리도 이동한다! 좌현 우현 포문 모두 개방!”
바다라는 새침때기는 언제든 제 마음대로 바람을 바꾸는 법. 바람이 좋은 지금 적을 찢어놔야 한다.
마침내 넬슨의 기함 아가멤논이 움직이고 아홉 척의 거대한 전쟁함대가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적 선두함 200야드!! 계속 뚫고 들어옵니다!!”
“2, 3번 함 좌현으로 긴급 변침하고 적 단종진 중열에 사격하라고 해! 8번, 9번 함도 우현에 포문열고 좌현 변침 준비. 놈들 마음처럼 찢어져 줄 수는 없지!”
“우라!!”
프랑스군의 공격은 매서웠··· 아니. 애초에 저게 프랑스군일 리가 없다.
저 정도의 속력을 내며 물 흐르듯 기동전을 펼칠 수 있는 해군은 이 세상 단 한 군데 뿐.
‘엿 같은 영국 해적 놈들이.’
흑해함대 함대장. 우샤코프는 입술을 깨물었다.
“바람을 받으며 코르시카를 끼고 한 바퀴 돈다! 제노바로 다시 회군해야해! 수적으로도 적은데 기동력까지 내주면 이길 수 없다!”
“하, 하지만 적은 약해빠진 프랑스군입니다!”
“블럇! 아무것도 모르면 닥쳐!”
“죄송합니다, 제독!”
우샤코프의 일갈에 부관은 고개를 숙였다.
“제독님! 5번 함에서 깃발이 올라왔습니다! 깃발이 제일 먼저 올라오는 게 적 2번함이라고 합니다! 기함으로 추정됩니다!!”
“···기함이라고? 좋다! 이 해적 놈들 제독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배 째로 수장시켜주지. 2번, 3번 좌현 변침 끝났으면 상대 2번함에 모든 화력 쏟아 부으라고 전파해! 8번, 9번도 우현 포문 개방 끝났으면 똑같이 전달하도록!!”
“우라!!”
30전 30승의 불패 제독, 러시아 해군의 자랑.
표도르 우샤코프는 망원경을 들어 시시각각 다가오는 적의 기함을 렌즈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