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시카 (7)
탐색전.
다르게 말하면 조우전.
어떻게 표현하든 전날 있었던 교전이 본격적인 전투에 들어가기 전 워밍업에 해당하는 건 프랑스군, 러시아군 상관없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러시아군의 참모부 막사에서 소리가 두런두런 새나오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피해는?”
“사망자가 삼십에 사상자는 그 배 정도 됩니다.”
“얼치기 폴란드 민병대나 튀르크 케밥 놈들도 아니고 프랑스군을 상대로 백을 내어준 거면 꽤나 싸게 먹혔군.”
“그렇습니다. 수보로프.”
예순이 넘은 야전원수는 막사 한 가운데 지도를 올려놓은 탁자 주위를 뚜벅, 뚜벅 천천히 맴돌기 시작했다.
적장은, 스물 네 살의 적장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능선에 포대를 만들고 축선을 두들겨 패겠다는 건가?
아니면 포대는 그저 총공세를 보조하기 위한 보조전력에 불과한가?
애초에 공세를 하긴 하는가?
아니면 러시아군이 보급품 소모로 말라죽길 원하는 건가?
“쿠투조프. 탄약은 얼마나 남았나?”
“적과 세 번 크게 부딪힐 만큼은 있습니다.”
“포탄은?”
“마찬가지입니다.”
“나쁘지 않군.”
회전으로 겨뤄볼 기회가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라면 병참 상황은 아직 넉넉하다.
그렇다면.
“식량은?”
“오늘부터 ‘현지징발’을 시작하라고 명령을 내려놨습니다. 마침 추수시기니 앞으로 수개월은 추가 보급 없이 거뜬하게 버틸 수 있습니다.”
“흐음. 좋네.”
군대의 핏줄인 탄약도, 포탄도, 식량마저도 아직까지는 넉넉하다.
보나파르트 준장이라 했던가.
애송이 놈. 네 계획이 우릴 말려 죽이겠다는 건지 아니면 전면전을 하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수보로프는 사십 년을 이 총칼이 휘몰아치는 전쟁터에서 보냈다. 애송이 놈의 짧은 생각에 걸려줄쏘냐?
***
1793년 9월.
밀의 추수시기, 한 해 농사를 끝마친 농부들이 모두 그렇듯.
코르시카의 농부들 또한 금색 벌판에서 일 년 동안 정성들여 키운 곡식들을 걷어 모으기에 여념이 없었다.
“마, 로렌초! 올해 소출은 어떠냐? 괜찮나?”
“딱 저번 년이랑 비슷비슷한 게 그래도 적당히 먹고 살만은 한 거 같다.”
“아하! 너는 올해도 장가가기는 글렀다 이 말이제? 그냥 나는 올해도 노총각으로 살 예정이오~하면 될 걸 왜 굳이 말을 비비꼬아서 하냐?”
“너는 나 놀려먹으면 누가 빵이라도 공짜로 주나? 왜 지랄이 하루하루 살아갈수록 늘어나냐?”
개 같은 불알친구 놈과 한참 동안 낫으로 금색 알알을 쓸어 모으기에 정신이 팔려있을 무렵.
“엥? 저게 뭐꼬?”
“···? 왜 일하다 말고 먼 산을 봐?”
“야 로렌초. 점마들 러시아군 아이가? 저 양반들이 여기는 왜 왔대?”
“러시아군?”
“저어어기 오는 양반들.”
로렌초는 농삿일로 뻐근해진 허리를 들어 친구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자, 정말 친구의 말처럼 녹색 군복을 입은 군인 서넛이 이리로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이 가까워질 때마다 햇빛에 반사된 칼날이 위압적으로 번쩍거렸으니 로렌초와 그의 친구는 자기도 모르게 농기구를 쥔 손에 땀이 났다.
“반갑소. 러시아군 소위 페드로비치라고 하오.”
“아, 예...”
자신을 장교라고 소개한 군인은 농부들의 인사를 받는 듯 마는 듯 하다가 품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서 쭉 영문도 모를 러시아어를 읽어 내려갔다.
“그 소위님? 우리 같은 농부들은 가방끈이 짧아 러시아어를 모르는데, 성함 얘기해주실 때처럼 프랑스어로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간단하오. 우리 러시아군이 코르시카인들의 독립을 지켜주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몇 가지 물건을 공출하도록 하겠소.”
“공...출 말이십니까?”
로렌초와 그 친구는 누가 먼저 할 것 없이 서로의 얼굴을 잠시 쳐다봤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장교를 향해 입을 열었다.
“공출이라면 얼마 정도...?”
“흐음.”
러시아군 장교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로렌초와 그 친구가 하루 종일 추수한 밀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정도면 되겠소.”
“······지금 장난하는 거요?”
“이보쇼! 그렇게 다 가져가면 우리는 뭐 먹고 살라고!!”
로렌초가 자기도 모르게 검지손가락을 장교의 면상을 향해 치켜세우자, 장교의 뒤에 서있던 병사들이 쏜살 같이 달려와 총검을 로렌초를 향해 겨누었다.
“이,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요!?”
“Привет! Вы сейчас говорите о крепостном праве? (어이! 지금 농노 주제에 말대꾸 하는 거냐?)”
“이런 씨발! 뭐라는 거야! 프랑스어로 하라고!”
“Рядовой Иванов! остановка!(이바노프 이등병! 그만!)”
장교가 일갈하자, 병사는 로렌초의 턱 앞까지 겨눈 총검을 다시 거두었다.
“미안하군. 하지만 야전원수 각하의 명령은 명령이오.”
“그게 무슨···!”
로렌초와 친구는 더 뭐라고 말하려했지만, 이번에는 정말 저 번들거리는 총검이 배에 꽂히지 않을까하는 마음에 사릴 수밖에 없었다.
“Иванов! Владимир! Вытряхните все, что вы можете съесть оттуда сюда.(이바노프! 블라디미르! 저쪽부터 여기까지 먹을 수 있는 건 싹 다 털어.)”
““Да, лейтенант!(예, 소위님!)”“
생판 모르는 외국인들이 로렌초 일 년의 고생을, 아침잠 설치며 일 년 간 정성껏 기른 귀한 밀들을 하나 둘 옆구리에 끼고 일어났다.
“안, 안돼!! 그건 내년 농사지을 종자란 말이야!!”
“К черту это. О чем, черт возьми, говорит этот ублюдок?(이런 씨발. 이 새끼가 대체 뭐라고 떠드는 거야?)”
“으억!”
억세디 억센 군홧발에 아랫배를 차인 로렌초는 배를 부여잡고 땅을 굴렀다.
“켁, 케헥!”
“로렌초!!”
러시아군 병사들은 땅에 쓰러진 코르시카인에게는 눈길하나 주지 않고 황금빛 밀을 한가득 짊어지며 말했다.
“야 이 새끼야. 집도 으리으리한 새끼가 이깟 밀알 몇 톨이 그리 중하냐?”
“카악 퉤! 사치스런 프랑스 개구리 놈들 같으니. ···헤헤, 소위님! 다음에는 소대원들 다 모여서 털러가죠!”
“좋아. 제군들, 이제 귀환한다.”
아마 러시아군의 배는 한동안 곪을 일이 없을 듯 했다.
- 파올리 선생님! 러시아군이! 러시아군이!!
- 선생님! 로렌초는 종자까지 다 뺏겼습니다! 내년 농사는 대체 뭘로 지으라는 겁니까!
- 이딴 게 그 잘난 독립입니까?
“이게, 이게 지금 무슨 짓이오!!”
“아. 파올리 선생이시군. 무슨 일이라도 있소?”
“무슨 일? 무슨 일? 무슨 일!!!! 수보로프 원수! 우리 코르시카는 댁의 식민지가 아니오! 명백한 독립국이란 말이외다! 이건 식민지에 대한 수탈 수준 아니오!”
파올리가 쌍심지를 켜고 따져도, 수보로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파올리 선생께서는 군무에 어두우니 모르시겠지만, 원래 징발이란 건 군무에서 섭섭잖게 일어나는 일이오.”
“···뭐요?”
“우리 러시아군이 프랑스군을 쳐부숴주길 원하는 거 아니오? 자원병 하나 못 내주는 주제라면 입 닥치고 물자나 똑바로 대시오.”
“어, 어...”
코르시카의 위정자는, 더 이상 코르시카인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
“러시아군이 징발작전을 실시했습니다.”
“코르시카인들의 러시아군에 대한 분노가 상당합니다.”
“코르시카 독립파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파스콸레 파올리에 대한 비난도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좋은 소식이군. 자기들이 제 발로 구렁텅이에 처박혀 주겠다니.”
나폴레옹은 와인잔에 담긴 포도주를 목 뒤로 상큼하게 넘긴 뒤, 정찰병들의 말에 대꾸했다.
겨우 징발을 실시한지 이삼일 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토록 뜨거운 반응이라면, 얼마나 혹독하게 뜯어간단 말인가?
“우리가 가진 여유 보급품을 현지에 풀도록. 아작시오에도 헌병대를 낮밤 가릴 거 없이 풀어서 병사들을 제대로 단속하는 거 있지 말게. 이번 전쟁은 총칼로 하는 전쟁이 아니라 여론전이야.”
“···여론전 말씀이십니까?”
“그래. 여론전.”
가만히 있으면 저쪽이 똥볼을 오지게 차줄 테고, 러시아군의 혹독한 민사작전에 대해 질려버린 코르시카인들은 ‘아, 그래도 프랑스가 낫구나.’하는 생각으로 나폴레옹에게 협조해줄 거다.
온 평생을 이곳 코르시카에서 산 사람들이다. 현지 지리에 빠삭하다 못해 눈을 감고도 길을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을 자기의 편으로 끌어들인다면 굳이 정찰대를 풀지 않아도 모든 정보가 나폴레옹의 귀로 들어올 터.
“딱 한 달만 이렇게 죽치고 있자고.”
곧 나폴레옹의 집에 불을 질러 내쫓은 자들이, 자신의 앞에 달려와 무릎을 꿇고 제발 살려 달라 빌 거다.
나폴레옹은 다시 포도주를 한 잔 따라 흡족한 얼굴로 들이켰다.
아. 역시 기욤 그 녀석이 모은 포도주 컬렉션이다.
한 번도 실망시키질 않는구만. 나중에 파리에 가면 몇 개 더 스리슬쩍 해야겠다.
***
이탈리아 반도.
중립국, 제노바 공화국.
“초계함으로부터 급전입니다! 적 함대가 리구리아 해(코르시카 북쪽 100킬로미터 지점)로 나왔습니다!”
“규모는?”
“전열함 13척! 함 급은 1급 전열함 1척에, 3급 전열함 12척으로 추정됩니다!”
“······전열함이 13척? 사실인가?”
흑해함대 사령관, 표도르 우샤코프 중장은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부관에게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제독님. 우리 측 초계함이 전한 내용입니다.”
“흐음. 100문이 1척, 60문 이상이 12척이라니. 프랑스 해군에 아직도 그 정도의 힘이 남아있었나?”
프랑스 해군에서 러시아로 망명한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면 하나같이 다 ‘프랑스 해군이요? 좆 됐죠! 아마 한 반백년은 금치산자나 다름없을 걸요?’라고 하길래 정말 좆 된 줄 알았더니 이게 뭔가? 상태가 훨씬 더 나은 정도가 아니지 않나.
“하여간 프랑스 놈들 허풍은 알아줘야한다니까. 이놈들이 허풍만 좀 줄였어도 혁명인지 뭔지 하는 게 안 터지지 않았을까?”
“그러게 말입니다, 제독님.”
“아무튼 뭐가 됐던 간에, 이걸 박살내면 앞으로 지중해는 영국과 러시아 둘의 싸움터가 되겠군.”
우샤코프 중장은 그리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항 준비는 끝났나?”
“예! 기함인 상트 파울(St. Paul)의 준비도 끝났습니다.”
“좋아. 발진하지. 마침 바람도 순풍이군. 적이 있는 남쪽으로 빨리 내려갈 수 있겠어.”
“우라!!”
남풍을 타고 전열함 11척 규모의 흑해 함대가 제노바 항을 빠져나왔다.
“정찰선에서 보고입니다! 흑해 함대가 제노바에서 빠져나온 것 같습니다!”
호레이쇼 넬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관에게 말했다.
“좋아. 깃발을 올려서 신호하도록.”
“신호는 뭘로 주면 되겠습니까?”
“으음...”
넬슨은 잠시 턱을 매만지며 생각하다가, 마스트 위에 펄럭이는 프랑스 삼색기를 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프랑스는 귀관 전원이 각자의 의무를 다할 것을 기대한다.(France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