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2화 코르시카 (5) (182/341)

코르시카 (5)

“으헤헤헤! 각하를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 호레이쇼 넬슨의 이름을 걸고, 한 치의 불편함도 느낄 수 없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혹여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다음에 런던에 가실 때 해군경께 제 이름을 한 번만 언급해주시면···.”

함대장이란 새끼는 틈만 나면 손을 싹싹 비비며 내게 이죽거리질 않나.

“크흐어어!! 맛 좋다!!”

부관이라고 소개받은 앨리슨 중위(First Lieutenant, Allison)라는 작자는 벌써 오늘만 포도주를 세병 째 비우질 않나.

이딴 게 왕립해군? 아무리 해군의 ‘ㅎ’자도 모르는 내가 봐도 정상적인 해군이 아니라 밥버러지 새끼들로 보이는데.

지금이라도 저어기 앞에 가는 빌뇌브의 기함으로 올라가서 ‘거... 내가 생각해봤는데 함장 말이 맞는 것 같네요. 우리 바다에 수장 당하기 전에 빨리 튑시다.’라고 말해야 하나?

뭐랄까, 마치 낭떠러지에 홀로 외로이 매달려있는 느낌이다. 곧 시꺼먼 사자가 내게 다가와 롱 리브 더 기욤을 외치며 내 손을 떼어내 날 떨어뜨려 죽이고는 하이에나들과 함께 대프랑스-세렝게티 공화국을 건국하며···.

내가 한참 헛소리를 머릿속으로 주워섬길 무렵, 한 수병이 나와 넬슨에게 다가와 말했다.

“함대장님! 선두 HMS 트로우브리지에서 우리 쪽으로 보트를 보냈습니다!”

“트로우브리지? 컬로든 함장이 보낸 건가?”

“예, 그런 것 같습니다.”

“데려와 보게.”

얼마 후 몇 명의 장교가 밧줄을 잡고 아가멤논의 선체 위로 올라왔다.

“함대장님, 정찰선의 보고로는 적함의 다수가 중립국인 이탈리아 제노바 공화국에서 포착됐다고 합니다.”

“규모는?”

“전열함 20척 미만, 나머지 보조함은 보이지 않습니다.”

“주력을 항구에 안전하게 넣어놨다가 우리와 싸울 때만 꺼내겠다는 건가?”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좋아. 컬로든 함장에게 교전을 준비하라고 돌아가서 말해주게. 아. 혹시 초계를 도는 적함은 발견했나?”

“분명 이 바다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됩니다만 아직 조우하지는 못했습니다.”

“알겠네. 잠시 생각한 후 신호기로 신호를 보내지.”

“예. 알겠습니다.”

선두함에서 온 장교가 돌아간 뒤, 넬슨은 고민에 빠졌는지 턱을 몇 번 쓸어내렸다.

“각하.”

“왜 그러십니까, 넬슨.”

“이제 빌뇌브 함대장이 있는 기욤 텔로 옮겨 타시지요.”

“예?”

“전투가 크게 벌어지기 시작하면, 각하의 신변을 보호하며 싸울 수 없습니다. 기욤 텔로 가시지요.”

방금 전까지 으헤헤-거리며 굽실거렸던 넬슨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결연한 눈길로 날 쳐다보는 군인이 남아있었다.

나는 더 이상 뭐라 말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코르시카, 퐁트느보.

파스락-.

아작시오에서 출발한 툴롱지역사령부 국민방위대 소속 엽병들은 손에 라이플을 한 정씩 든 채 울창한 숲을 지나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언제든지 적이 나타난다면 조준사격을 가할 수 있게 초긴장 상태를 유지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간 끝에, 프랑스군 엽병들은 섬의 동쪽 평야가 보이는 능선에 다다를 수 있었다.

“선임하사. 망원경 챙겨왔나?”

“예, 대위님.”

“이리 줘보게.”

엽병 중대를 이끄는 중대장은 선임하사에게 건네받은 망원경을 들어 동쪽 평야를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규모는 약 2만에서 3만 사이.”

“2만에서 3만.”

“평야에 일자진.”

“평야, 일자진.”

“포병은 약 10문에서 15문 사이.”

“10문에서 15문.”

중대장이 한마디를 할 때마다, 선임하사는 지도에 펜으로 간단히 내용을 받아적었다.

그러나 한참동안 고지대의 이점을 활용해 러시아군의 말랑말랑한 배때지를 구경하던 프랑스군은 끝내 근방을 순찰하던 러시아군의 순찰대와 마주쳤다.

탕! 탕! 탕!

“Это французский!”

선공은 러시아가 먼저 잡았다. 그러나 운이 좋게도, 러시아 엽병들이 쏜 총알은 프랑스군의 몸이 아니라 근처에 있는 애꿎은 땅만 파고 튀어 올랐다.

“적이다!”

“엄폐물 뒤로! 순차사격하면서 뒤로 빠진다!”

“1소대부터 쏴!”

탕! 탕! 탕!

“악!”

“Блядь!”

“놈들을 잡는 게 목표가 아니다! 한 발씩만 쏘고 신속하게 빠져!”

엽병들은 침착하게 바위와 나무를 엄폐물 삼아 정조준사격을 가해 자신들을 쫓아오던 몇몇 녹색 군복들을 땅에 고이 눕혀주고는, 빠른 속도로 자신들이 온 서쪽을 향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러시아군이 동쪽 해안에 진을 폈다?”

“그렇습니다. 사령관님.”

사령부에서 지도를 들여다보던 나폴레옹은 턱을 쓸어내렸다.

왜 일까?

왜 러시아군이 퐁트느보처럼 소수로 다수를 막을 수 있는 곳을 내버려두고 평지에 진을 폈을까?

자신이 러시아군이었다면 산에 있는 길목마다 엽병들을 깔아 섣불리 적이 움직이지 못하게 했을 텐데.

“···지지부진하게 싸울 바에는 회전에서 우릴 무조건 박살내겠다는 자신감이 충만한 건가? 적장의 이름이 뭐라고 했지?”

“예, 러시아제국 야전원수 알렉상드르 수보로프라고 합니다.”

“수보로프라... 포니아토프스키 중령을 데려와주게.”

“예, 사령관님.”

잠시 후 부름을 받은 폴란드인이 사령부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사령관님.”

“중령, 혹시 수보로프라는 자를 압니까?”

폴란드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지요. 우리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를 불태운 작자인데.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그 작자가 지금 우리가 상대할 적장이라서.”

“!!!”

폴란드인은 나폴레옹에게 성큼 다가가 큰소리로 말했다.

“사령관님. 우리 폴란드 의용대를 선봉에 세워주십시오!”

“아니. 선봉을 설 필요 없습니다.”

“보나파르트 사령관님! 우리 폴란드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조국의 복수를 하게 해주십시오!”

“중령의 기병대는 내 조커입니다. 조커를 초장부터 상대 눈앞에 들이밀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반드시 출전시켜줄 테니 그리 열 받아 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제가 흥분했군요.”

포니아토프스키는 막사 안에 있는 빈 의자를 끌어와 앉더니 아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수보로프에 대해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그 자가 썼던 전술, 병력 배치, 그 외 모든 걸 말해주면 좋겠습니다.”

“···음.”

폴란드인은 손을 올려 턱을 괴더니 잠시 후 얘기했다.

“기동의 대가...라고 해야 할까요.”

“기동의 대가라?”

“과감한 공격정신과 더불어 빠른 속도로 몰아치는 게 수보로프 그 자의 전술입니다. 보병을 빠르게 접근시켜 사격보다는 총검돌격으로 적의 진형을 무너뜨리더군요. 과거 폴란드의 넓은 평야에서 우군을 유린할 때 그런 전술로 우리 폴란드를 박살냈던 기억이 납니다.”

“과감한 공격정신과 빠른 속도의 기동이라...”

나폴레옹은 지도가 놓인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과감한 공격정신... 총검돌격... 빠른 기동...

다른 말로는 병사들이 용감하고, 투쟁심이 있으며, 체력이 좋다.

······뭔가, 뭔가가 이상한데. 뭔가 잡힐 듯, 말 듯...

나폴레옹은 다시 한 번 엽병들이 올려준 지도와 포니아토프스키의 말을 곰곰이 곱씹어 보았다.

- 적군의 규모, 3만 내지 2만.

- 평원에서 길게 일자진을 펼침.

- 좌익에 호수가 있어 공세가 어려움.

- 포병 15문 내지 10문.

- 순찰 중이던 적 엽병과 교전. 적 엽병에게 타격을 주고 부상자 없이 퇴각 성공.

‘과감한 공격정신···’

‘보병들을 빠르게 접근시켜 사격보다는 총검돌격으로···’

‘평야에서 우군을 유린할 때···’

“페탱.”

“예, 사령관님.”

“오늘 작전에 나갔던 엽병 중대장을 불러오게.”

“옙!”

파릇파릇한 이등병은 잠시 막사를 나갔다가, 한 장교를 데리고 다시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귀관이 말하길 러시아 엽병들과 교전했다고?”

“그렇습니다.”

“···러시아 엽병들의 사격실력이 어떻던가?”

“예? 아. 아군의 피해가 없는 걸 보면 그리 좋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나폴레옹은 이어서 물었다.

“그렇다면 귀관과 병사들은 적에게 타격을 얼마나 줬나?”

“다 합쳐서 명중탄을 열 번 정도 내고 후퇴했습니다.”

“열 발을 맞출 때 한 발도 못 맞췄다라... 알겠네, 돌아가서 쉬게.”

“예, 사령관님.”

엽병들은 보병대의 눈이자 예리한 검이나 다름없는 존재들이다.

정예병인 척탄병들보다 더 많은 훈련탄을 지급받고 사격훈련에 나서며, 가장 많은 봉급을 타가는 이유가 바로 실력 좋은 엽병을 훈련시키는 게 힘들기 때문이니.

그런데··· 그런 엽병이, 단 한 발도 맞추지 못했다?

나폴레옹의 머릿속에 발칙한 상상이 지나갔다.

미국독립전쟁에서 영국군은 적이 미국 민병대던, 프랑스군이던, 아니면 인디언들이건 절대 먼저 총검돌격을 시전하지 않았다.

왜냐고? 자기들이 총을 존나 잘 쏘는데 어떤 병신이 확실하지 않은 백병전을 벌여 아군 사상자만 늘리겠는가. 멀리서 탕탕 쏘면 다 픽픽 쓰러지는데.

또한 러시아군은 자신들의 좌익을 호수로 가로막았다.

수비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적의 공격을 저절로 막아주는 매우 좋은 천연 장애물이지만, 역습 상황에서 러시아군이 공격자의 입장이 된다면 호수는 도리어 러시아군의 공격로를 막는 장애물이 되고 만다.

공격적이고 과감하다면서? 왜? 왜 자기들의 공격로를 자기들이 제한하는 거지?

양익에 척탄병들과 엽병들을 배치해 적을 넓게 타격하는 게 기본적인 전열보병들의 전술이다. 한쪽 날개를 꺾는다면 그만큼 반감되는 게 정예병들의 화력인데···.

포병 수도 적다. 포병을 중시하는 프랑스군의 교리이긴 하지만 2만을 엄호해주려면 적어도 20문은 가져와야 할 텐데 그 반절인 10문이라니.

어쩌면. 어쩌면.

러시아군은 총포를 더럽게, 더럽게 못 쏘는 거 아닐까?

그러면 설명이 된다.

공격적인 총검돌격과 과감한 기동을 가져가는 건 마주보고 사격을 주고받으면 개박살이 나기 때문이고.

양익에 있는 공격로를 우익 하나로 줄인 건 그나마 실력 있는 포수들과 정예병을 한쪽 날개에 몰아줘서 돌파력을 극대화시키려는 것이고.

포를 적게 가져온 건, 어차피 백병전을 시전하면 아군과 적이 뒤엉킬 텐데 오사(誤射)가 날까봐 쓰지도 못할 포를 배에 실을 바에는 병사 하나를 더 태웠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뇌내망상에 불과한 가설이고 한 번 가볍게 부딪혀보기까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자신의 추측이 맞는다면?

나폴레옹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벌떡 일어나며 큰소리로 말했다.

“페탱! 니 빨리 밖에 나가서 장교들 당장 사령부로 불러오라카이!”

“예? 아, 예!!”

“사, 사령관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갑자기 일어나서 이죽거리는 나폴레옹을 본 포니아토프스키 중령이 그렇게 말했지만, 이미 흥분한 나폴레옹의 귓가엔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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