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1화 코르시카 (4) (181/341)

코르시카 (4)

코르시카, 아작시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계신 차르께서는 파올리 선생의 거룩한 뜻을 높이 사셨으며, 코르시카의 독립에 관해···.”

눈앞에 있는 초록색 군복차림의 러시아인이 제 나라 말 억양 가득한 프랑스어를 입 밖으로 수백, 수천 단어 씩 꺼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코르시카의 독립운동가 파스콸레 파올리의 귀에는 단 한 글자도 들리지 않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 영국의 힘을 빌려 침략자 프랑스와 그를 돕는 친프랑스 코르시카인들을 몰아낸다.

- 대가로 영연방에 가입한다. 명목 상 영국 왕을 섬기고, 명목 상 영국인이 총독으로 부임한다.

- 단, 영연방에 가입하더라도 모든 것은 허례에 불과하고, 코르시카는 실질적인 자치권을 얻는다.

첫 번째 목표까지는 모든 동지들이 잘 따라와 주었다.

부오나파르테, 그 쓰레기 같은 배신자 일가를 모두 태워죽이지는 못한 건 아쉽지만, 대신에 그 놈들이 나고 자란 저택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으니 화풀이는 되었다.

심지어 코르시카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가문을 저리 박살내놨으니, 그보다 못한 코르시카 내에 있는 친불주의자들은 모두 지레 겁을 먹고 프랑스로 도망가기 일쑤.

결국 코르시카에는 비겁한 배신자들이 아니라 정말로 독립을 염원하는 자들만이 남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러나 파올리가 두 번째 목표를 제시한 순간.

파올리를 확신과 존경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던 동지들의 눈빛은 더 이상 확신과 존경이 아닌 의심과 경멸의 눈초리로 바뀌고 말았다.

- 선생님, 독립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 영국 왕을 섬기고 영국인 총독을 섬기라니! 이게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주인님만 바꾼 거 아닙니까!!

- 설마 나중에는 영어까지 따라 쓰라는 건 아니시겠죠? 하기야 프랑스도 말을 바꾸라고 하지는 않았는데 말입니다!

분노, 타박, 비아냥까지.

- 자, 들어보게. 영연방이든 뭐든 결국에는 ‘명목 상’이야. 실질적인 주권은 우리 코르시카인들에게 주어진다네. 국방, 재정, 사법 등등! 우리가 지금껏 갖지 못했던 걸 가질 수 있게 된단 말일세!

파올리가 직접 나서서 해명했지만, 일부 대가리가 깨진 자들을 제외하곤 파올리를 보는 시선이 전과 달라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 부오나파르테 사람들 보고 배신자다, 뭐다 하더니 진짜 배신자들 파올리 아닌가?! 부오나파르테는 우리 대신 총대 매고 프랑스에게 대들기라도 했지!

- 생각해보면 본토 프랑스인들도 내는 세금을 제외하면 우리가 프랑스에게 뜯긴 게 뭐가 있어?

- 파올리야말로 우리를 영국에 팔아넘기려 하는 게 틀림없다!!

곳곳에서 불순한 언행과 움직임이 준동하고, 파올리와 그를 따르는 동지들이 그것을 막기 위해 힘을 쓰는 동안.

[THE TIMES, 대영제국의 주인이신 국왕 폐하와 수상 각하의 초대를 받고 도착한 기욤 드 툴롱 재무총감!]

프랑스의 대가리라고 할 수 있는 자가 파올리의 가장 든든한 뒷배를 세치 혀로 꼬드기더니.

[THE TIMES, 윌리엄 피트 수상.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은 제 2의 명예혁명과 같다!]

둘이 어느 샌가 좋다고 짝짜꿍까지 하고 있었다.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쳤다는 자산은 영국을 새로운 주인님으로 모시겠다는 거냐는 비아냥에 사라졌고.

그 비아냥을 감수하고서도 우군으로 끌어들이려 했던 영국은 이제 자신을 본체만체 하고 있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Здравствуйте. 반갑소, 파올리 선생. 코르시카 파견군 사령관, 러시아 제국 야전원수 알렉상드르 수보로프라고 하오.”

“······만나서 반갑습니다. 장군.”

손에 쥐게 된 동앗줄이 썩었는지 아니면 멀쩡한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살고 봐야지.

***

“쿠투조프.”

둥글둥글한 몸매의 장성은 노장군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답했다.

“예, 수보로프.”

“병사들 중 상트페테르부르크나 모스크바 출신이 아니면 이 섬의 마을에 가까이 배치하지 말게.”

병사들이 동요하지 않게.

이어지는 수보로프 사령관의 말에 쿠투조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프랑스에서는 이 코르시카가 외지고 낙후된 곳일지라도, 러시아에서는 거의 삐까번쩍한 도시에 필적하는 수준이다.

평생 밀밭에서 땅만 파던 농노들에게 이렇게 발전된 풍경을 보여주고 싶은 러시아 지휘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르면 행복하니까. 사람이란 본디 자신의 처량한 처지를 알게 되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분노하는 동물이니까. 무식할수록 용감하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옆집 이반은 잠잘 곳조차 없어 영주에게 구걸해가며 사는데, 나는 집이라도 있으니 참 좋다며 흡족하게 살아가는 농노들이다.

어떻게 보면 평생을 힘들게 땅을 갈아 마련한 조촐한 통나무집이 전 재산인 농노들은 차라리 제 처지를 모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아무리 프랑스에서 못 사는 사람이라도 러시아 농노보다는 잘 사니까.

그러니 낙후된 러시아에서 유일하게 유럽 중심지에 견줄 수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출신 병사들로 하여금 마을을 지키고, 생판 야전에서는 시골출신 병사들을 주둔시킨다.

“우샤코프 제독은?”

“본대는 이탈리아에 주둔 중이고 일부 정찰대를 떼어내 인근 해역을 초계 중입니다..”

“좋아.”

수보로프는 지휘봉을 들고 지도를 탁탁 짚어 내려갔다.

“자네가 저쪽 지휘관이라면 어떻게 나오겠나, 쿠투조프.”

“엽병(獵兵)이 많으면 섬 가운데서, 엽병이 적으면 우리가 주둔하고 있는 이곳에서 맞붙겠지요.”

이 코르시카는 국토의 80퍼센트가 산지로 뒤덮여 있었다. 적이 산악전에 능한 엽병을 데리고 있다면 산에서, 엽병이 없다면 그나마 평지에 가까운 섬의 동쪽 해안가에서 전투를 벌일 터.

“우군에게는 어느 쪽이 유리하지?”

“글쎄요. 기후도 선선한 러시아와 달리 후덥지근해서 병사들이 적응하기 어려워하는데 산 속까지 들어간다면···.”

“힘들겠지. 알겠네.”

수보로프는 동쪽 해안가를 지휘봉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을 중심으로 축선을 만들고 방어를 준비하도록.”

“예, 장군.”

약 7킬로미터에서 8킬로미터 사이의 너비를 지닌 야트막한 평야지대는 좌익은 커다란 호수로 가로막혀 측면을 보호했으며, 중열에는 물이 흐르는 너울이 있어 도하하는 적을 맞이하기 적합했다.

침공군인 러시아군의 장점이라고 하면, 일단 내 땅이 아니라는 것. 이 지중해 섬을 다시 내주던 말던 러시아는 상관이 없었다.

그러니 이대로 버티고 앉아서 현지에서 약탈만 하더라도 이 땅을 방어해야하는 입장인 프랑스군은 몸이 달아 러시아제국군이 축조한 방어선에 꼬라박지 않고는 못 배길 터.

아, 약탈을 하면 파올리 그 자가 싫어하지 않겠느냐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계신 VIP께는 그런 작자의 신세를 봐주는 것보다 승리가 급했다.

***

1793년 8월 말.

코르시카 서안, 아작시오 항 근처.

고요한 새벽.

촤아아-. 촤아아-.

오직 파도소리만이 들려오는 가운데, 코르시카의 앞바다 지중해에서는 저 멀리서 무언가 아른거리며 섬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구름에 휩싸였던 하현달이 잠시 그 몸을 밖으로 꺼내노라면 바다 위에 그림자가 수십 개가 잠시 수면에 비쳐졌다가, 달이 다시 구름 속으로 들어가면 다시 어둠이 지중해를 머금기를 수어 번.

끼이익- 쿵.

제일 선두에 섰던 그림자가 섬에 다다르자, 혹여 빛이 반사될까봐 헝겊으로 총을 싸맨 수십 명의 인영이 몸을 낮추고 우르르 모래사장 위로 올라갔다.

그렇게 선발대가 야트막한 사구(砂丘) 위로 올라가 주변을 둘러 볼 동안, 한 척, 두 척, 나무보트들이 해안가에 제 몸을 뉘이기 시작했다.

총처럼 헝겊을 씌운 대포, 입에 재갈을 물린 말들, 그리고 병사들.

마지막 보트가 해안가에 닿고, 그 보트에 탔던 승객 중 하나는 깊은 숨을 내쉬며 모래를 밟았다.

“이게, 얼마만인지.”

2년? 3년?

기억으로는 그 때 계급이 중위나 대위였던 거 같은데. 이제는 별을 어깨에 짊어지고 이 땅에 오르게 되었다.

이 땅에 대고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지만, 나폴레옹은 그러는 대신 자신의 부관을 지긋이 불렀다.

“란.”

“예, 장군님.”

“아작시오 항을 떨어뜨리는 데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나?”

“2시간만 주십시오.”

“좋아. 한 개 대대를 주겠네. 민간인은 해치지 말고 무혈로 떨어뜨려야 하네.”

“물론입니다, 장군님.”

조용하고, 신속하게.

“뭐야, 거기 누구 있습니꺼?”

“쉬이잇. 조용.”

“프, 프랑스군! 읍읍읍!!”

“아침까지 조용히 하면 위해를 가하지는 않겠소이다. 당신도 검에 맞긴 싫잖소?”

나폴레옹 휘하, 장 란 대위가 이끄는 1개 보병대대는 헝겊을 감은 총검을 앞세워 1시간 반 만에 아작시오 항을 점령했다.

***

“다들 좋은 아ㅊ··· 으아악! 프랑스군이다!”

“이, 이, 이게 무슨.”

“대체 간밤에 무슨 일이···.”

오늘 하루도 활기찬 아침을 맞이하고자 문을 활짝 열어젖힌 코르시카인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코르시카에서 가장 번영한 곳인 아작시오의 광장에 즐비한 저 파란색과 흰색이 짬뽕된 군복, 그리고 항구에 삼색기를 꽂고 정박한 군함들을 보고 경악하지 않을 코르시카인은 없을 테니까.

대체 언제 왔을까? 얼마 전에 러시아인들이 온 것과 같은 이유일까? 우리 코르시카인들이 프랑스를 내쫓은 복수를 하러 온 건가?

모두가 마음을 졸이고 있을 그 때.

한 남자가 프랑스군의 한 가운데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계급이 꽤나 높은지, 남자의 옷은 휘황찬란한 훈장들과 금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남자는 주민들을 잠시 지켜보다가 큰소리로 외쳤다.

“Bonghjornu, Corsica!!”

원어민 수준의 코르시카 방언으로 ‘코르시카여, 안녕!’이라고 외친 남자는 이내 주민들을 향해 모자를 벗어 올렸다.

그리고 아작시오의 주민들은 그 얼굴을 몰라볼 수가 없었다.

“어, 어!! 어!!!”

“나, 나폴레오네 도련님이다!”

“부오나파르테가 왔다!!”

오랫동안 같이 부둥켜 살았지만 요 근래 통 볼 수 없던 고향 사람에 대한 반가움이 한 숟갈.

그리고.

- 나폴레오네! 기어코, 기어코 돌아 왔구나!

- 프랑스군에게 얼마나 바쳤길래, 저리 융숭한 대접이란 말인가.

- 어쩌지? 어쩌지? 제 가족을 홀라당 태워 죽이려고 한 우리를 살려둘까?

그 고향 사람의 집에 불을 질러 강제로 내쫓은 자신들의 과거에 대한 두려움이 한 숟갈.

그 두 가지가 얼마나 섞여있느냐-에 대한 비율의 차이가 사람마다 다르긴 했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코르시카인들의 마음속은 말 그대로 싱숭생숭했다.

“마, 다들 왜 그렇게 쫄아있능교? 하모 내가 댁들 해코지 할라고 이래 불렀겠습니까?”

“도련님. 그러면?”

“장군으로 출세했는데 고향 사람들한테 자랑은 해봐야지 않겠습니까.”

“···장군이요?”

나폴레옹은 얼어붙은 사람들을 보곤 피식 웃으면서 구수한 코르시카어로 말했다.

“우리 부오나파르테가 떠난 이후, 파올리 선생에 대해 말이 많다지예?”

“어, 어...”

“뭐, 상세한 얘기는 일단 제가 러시아군을 박살낸 다음 하지예.”

러시아군, 어디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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