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시카 (3)
1793년 8월.
나폴레옹의 연설 다음날.
월요일 아침의 툴롱 항은 이미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3중대 1소대 헤쳐모여!!”
“지금부터 소대장 앞으로 모두 모여서 군장을 깐다. ···혹시 가라로 싼 새끼가 있다면 지금부터 딱 더도 덜도 말고 10분 줄 테니 당장 완전군장으로 집합한다. 실시!”
“바다를 건널 때 발생하는 습기 때문에 약실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미리 헝겊을 총구 안에 넣어둬야 한다. 알겠나?”
머스킷을 손에 꼬나쥐고 배에 오를 준비에 한창인 보병들
“평사포는 이쪽으로, 곡사포는 저쪽 군함으로 옮겨!”
“하나, 둘, 셋. 으랴압!!”
“탄약고에서 남는 물자는 다 털어와!”
수백 킬로그램짜리 대포에 밧줄을 묶고 밀어라, 당겨라 하는 포병들.
“상사님! 말들은 어떻게 하죠?”
“말? 무슨 말? 우리 말은 다 태우지 않았나?”
“이 폴란드인들이 타고 다닐 말들 말입니다.”
“Proszę, dbaj o nasze słowa.”
“젠장, 대체 뭐라는 거야. 당신 프랑스어 할 줄 모르오?”
“Przepraszam?”
“···미치겠구만.”
서로 간의 의견 교류에 다소··· 불편함을 겪는 기병들까지.
2만이 넘는 사람이 이렇게 모이다니, 장관이라면 장관이다.
다만 저 사람들이 오늘부터 쓰는 모든 게 피 같은 국고에서 나갈 예정이라는 게 너무 가슴이 아프다. 내가 그 너덜너덜해진 창고를 기운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쏠 포탄과 총알은 기본이요, 포탄과 총알을 쏘기 위해 총구에 넣을 화약, 거기에 안 먹고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 먹을 밥까지. 으윽, 생각만 해도 머리, 가슴, 배가 너무 아파.
재무총감으로 지내던 근 4년간이 보통 시간이었나? 행정부들은 마치 어미 새를 보는 아기 새 마냥 돈 달라고 칭얼대질 않나. 입법부의 경제 바보들은 돈을 찍어내면 돈이 생기는 거 아니냐고 개소리를 씨부리지 않나.
그나마 입법부에서 유일하게 로베스피에르 의원의 머리가 경제 쪽으로 잘 돌아가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예전에 몇 달 동안 머릿속에 경제 지식을 쑤셔 박아주길 정말 잘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최고가격제’ 따위의 미친 정책이 의회를 통과했을 테고, 나는 이미 재무총감실에서 밧줄로 목을 매지 않았을까. 흑흑.
내가 이렇게 투덜투덜 대는 걸 본다면, 전쟁터에 나가 직접 총을 쥐고 싸우는 병사들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겠지만, 누구든지 저어어기 베르사유 재무총감실에 한 일주일 정도만 구금시켜놓고 숫자와 씨름하게 해주면 다들 내 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해줄 거다.
“날아가는 총알만큼 우리 병사들이 덜 죽는다. 알제?”
“그래서 입으로 신세한탄만 하잖아. 에휴, 담배가··· 쓰네.”
“담배는 원래 쓰다 아이가.”
“에이씨, 내가 서러워서 진짜.”
나는 반쯤 피다만 담배를 저 멀리 바다를 향해 던져버렸다.
나폴레옹 이 인간, 냉랭한 거 보소. 내가 일 좀 시켰다고 삐진 건가? 아니, 애초에 독전도 지휘관인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이잖나.
그리고 사람이 솔직히 힘들다고 말이야 좀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누가 들으면 내가 총알 값이 모자라니 반자이 어택을 때리라고, 아니면 길가의 풀을 뜯어먹으며 진격하라고 나폴레옹 이 인간한테 땡깡이라도 부리는 줄 알겠어.
···역시 돈, 돈이 존나게 필요하다. 돈이 존나게 많으면 총알이고 뭐고 펑펑 쏟아 부을 수 있겠지. 모두가 내 발 아래 무릎 꿇고 쩐이라는 이름의 은혜를 내려주십사 간청할 텐데.
아! 왜 내 2회차는 21세기의 치트 사용자인 천조국 미국이 아니라 그지 깽깽이 18세기 프랑스였던 것인가?! 흑흑.
이를 북북 갈며 내가 갇히게 된 무간금전지옥을 원망하고 있자, 방금 전까지 협곡의 얼음 닭, 애니비아 뺨치게 차갑던 나폴레옹 형은 눈을 이리저리 데굴데굴 굴리면서 내 어깨를 툭툭 건들었다.
자기도 염치는 있나보지.
“그··· 사실 돈이야 없다가도 있는 거고, 있다가도 없어지는 거 아이가. 너무 심려치 마라.”
“이야, 그런 말을 들으니 굉장히 기분이 이상한 걸.”
“니 설마 삐졌나?”
···삐져? 내가? 이 혼탁하기 그지 없는 18세기의 유일한 정상인이자 이성의 화신인 기욤 드 툴롱이 삐졌냐고?
아닌데? 나는 하나도 안 삐졌는데? 아뉜뒈??
“새애끼, 삐졌고만. 돈 나올 구석이 없는 게 그렇게나 마음에 걸리나?”
“허. 은퇴하기만 해봐, 바로 재무차관으로 임명해서 끌고 갈 테니.”
“응~ 해볼 테면 해봐라. 죽을 때까지 군복 안 벗으면 그만이야.”
세상에, 어깨에 영롱한 별을 달고 장군님 소리까지 듣는 사람이 어떻게 저리 유치할 수가 있는가. 이 양반은 정신머리가 아직도 나랑 처음 만난 1784년에 메여 있는 게 분명해.
다음 의회 소집 때는 꼭 군인에게 정년을 만들어 줄 것을 다짐하는 나에게, 나폴레옹 형은 구석에서 체스판을 가지고 와서 내밀었다.
“뭐야, 체스?”
“마, 니 기분도 풀 겸 오랜만에 체스나 한 판 하자.”
병주고 약주고, 아주 츤데레 김첨지가 따로 없어요.
“허, 옛날처럼 또 발리려고?”
“뭔 개소리고? 발린 건 내가 아니라 니지.”
“예, 예. 참으로 그러시겠지요.”
나는 나폴레옹 형을 샐쭉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도 그럴 게, 나폴레옹 이 인간. 체스고 카드고 게임 좆밥이거든.
학창 시절에 시험 끝나고 PC방에 4대4 스타하러 가면 꼭 4드론 저글링 러쉬라던가, 전진 게이트라던가, 치즈러쉬라던가 하는 날빌 하는 놈들이 꼭 끼어있지 않나?
‘10분 전에는 노러시라고 했잖아!’라고 아무리 말해도 귀를 막고 ‘응~ 나한테 진 좆밥 말 안 들어. 꼬우면 막던가? 낄낄낄!’을 시전 하며, 정작 제 날빌이 막히면 아무것도 못하는 날빌 원툴들 말이다.
나폴레옹 이 인간은 딱 그 짝이다.
하필 쓸 줄 아는 날빌도 하나뿐이라, 항상 체스를 두면 블랙은 놔두고 화이트 포지션만 잡는데 이 얼마나 졸렬한 짓인지. 그저··· 나하다, 추폴레옹!
“체크메이트.”
“어, 어. 왜, 왜 이렇게 됐제?”
“왜긴 왜야, 형이 존나 못하니까 그렇지.”
내 비숍이 나폴레옹의 킹을 쳐서 쓰러뜨리자, 나폴레옹 형의 얼굴이 와락-하고 일그러졌지만 그와 반대로 내 얼굴은 환하게 펴졌다.
사관학교 4년 동안 이 인간 날빌만 막았는데, 그래도 날빌에 지면 그게 사람인가? 짐승이지.
“에이, 좆망겜 같으니.”
“맨날 망겜, 망겜하면서 왜 붙들고 있담?”
“아유, 우리 기욤 선생님 말씀이 다 옳습니다요.”
아, 이 맛이지.
패배자가 구차하게 뺀질대는 이 광경을 보는 맛에 게임하는 거 아니겠나.
그러나 나폴레옹을 영혼까지 털어버리고 산뜻해진 기분은, 실시간으로 오링나고 있을 국고를 생각하자 다시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젠장, 안 하고 싶어도 이 자리에 앉으면 안 할 수가 없으니 원.
결국 나는 흐느적거리며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댄 뒤, 뭐 하나 걸려나 봐라 식으로 나폴레옹 형에게 말했다.
“형, 진짜 돈 나올 구멍이 없을까.”
“···생산성 없게 골머리 썩힐 바에는 게임이나 한 판 더 해라. 체스 싫으면 카드는 어떻나?”
“게임이라, 게임.”
나는 벌떡 일어나 나폴레옹 형을 보며 말했다.
“형이 만약 시민들이라면, 세금을 늘리는 순간 뭐라고 할 것 같아?”
“니 혹시 단두대 가고 싶나?”
“그렇지? 단두대 가겠지?”
“물론.”
“그런데 간접세면?”
“···그게 뭐고?”
“그러니까 세금을 직접 거두는 게 아니라, 특정 물건을 살 때 조금 떼어가는 거지. 물론 생필품처럼 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은 아니고.”
“흠.”
나폴레옹 형은 잠시 턱을 쓸어내렸다가 입을 열었다.
“반발이 그리 크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런데 이제 그 특정 물건도 나라가 만든다면?”
“세수가 두 번 걷히겠제.”
“사실 내가 영국에서 보드게임을 몇 가지 만들어봤거든? 그쪽 업계 사람이 말하길 큰돈을 벌만 하다더라고.”
“···오.”
세상에 빵이 없다고 굶어 죽는 사람은 있지만, 겜 좀 못한다고 굶어 죽는 사람은 없지 않나.
생활이 궁한 빈민들이야 보드게임은커녕 각자도생하기 바쁠 테고, 결국 간접세 세수는 먹고 살만하고 돈도 꽤나 있어 즐길 거리 좀 즐기겠다는 사람들에게 걷히게 될 거다.
남은 건 이제 중독성이 넘쳐 꾸준히 돈을 뽑아 먹을 수 있는 게임을 만드는 것뿐.
그리고 아주 다행스럽게도, 나는 꼬꼬마 초등학교 시절 우리 코흘리개들의 용돈을 갈취해가던 카드 게임과 대학교 MT에 갈 때 꼭 들고 가야 하는 보드게임들을 아직도 대강 기억하고 있었다.
***
내일 새벽 있을 출정과 상륙작전을 준비하기 위해 나폴레옹 형이 참모들을 만나러 가고, 도란도란했던 내 임시 사무실은 내 펜이 움직이는 소리 외엔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한참동안 우리 군이 한 달 간 쓸 군수계획을 점검하고, 계산하고, 마침내 종지부를 찍자, 어느새 인가 내 사무실 문을 열고 부동자세로 서있던 군인이 내게로 다가왔다.
“흠, 흠흠. 그··· 각하? 혹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빌뇌브 함장? 무슨 일입니까?”
피에르 빌뇌브 임시 해군 준장.
트레빌 해군방위대 사령관이 기어코 프랑스의 마지막 해군력을 짜내 마르세유에서 보낸 전열함 기욤 텔(Guillaume Tell)을 맡은 함장이었다.
듣기로는 우리 프랑스에서 트레빌 사령관을 제외하고 함을 맡아 전투에 참여했던 유일한 사람이라고 하더라.
기욤 텔이라.
왜 트레빌 사령관이 그렇게 많고 많은 군함들 중 이름이 하필 나랑 겹치는 군함을 보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나한테 예산 달라고 쇼라도 하는 건가.
‘각하의 이름과 같은 전열함이 싸우는 모습을 보십시오! 정말 웅장하지 않습니까? 예산을 막 쏟아 붓고 싶지 않으십니까?’
음. 미안하지만 제가 알기로 백년 후에는 진짜 철갑을 두르고 거대한 엔진으로 작동하는 전함들이 나오는 걸로 알거든요?
아마 근 이십에서 삼십 년 안에는 증기기관을 탑재한 군함이 나올 텐데, 굳이 구식이 될 전열함에 돈을 막 퍼붓고 싶진 않아서.
그러나 빌뇌브 함장의 입에서 나온 건 ‘우리 멋지게 싸우는 거 보여줄 테니, 예산 더 주세요!’같은 말이 아니었다.
“그··· 저희 프랑스 해군이 꼭 이번 해전에 참전해야할까요?”
“예?”
“보조함도 없이 전열함 한 척으로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전력을 온존하는 것이···.”
이 양반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지?
조금이지만 전투에 참여하는 것과 안하는 것의 차이점은 어마어마하다.
우리 병사들이 지금은 사기가 최고조라 영국 군함에 타던 말던 별 상관 안하지만, 나중에 뜨거웠던 혈기가 식으면 분명히 뭐라고뭐라고 불평이든 불만이든 내보일게 뻔하지 않나.
자존심 세기로는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프랑스인들이니 말이다.
“반려합니다. 돌아가서 출항까지 수병들 상태를 점검하십시오.”
“하지만···.”
“이보세요, 빌뇌브 준장.”
“예, 각하.”
나는 손에 쥔 펜을 큰 소리가 나도록 책상 위에 놓으면서 말했다.
“내가 하나만 묻겠습니다. 당신 정말 프랑스 군인 맞습니까?”
“······소관이 실언을 했습니다.”
빌뇌브는 고개를 땅을 향해 처박으며 말했다.
나는 더는 뭐라 하지 않고 손을 휘휘 저어 꺼지라는 신호를 주었다.
감사하게도, 빌뇌브는 잽싸게 문을 열고 튀어주었다.
이상하다. 분명 나는 육사생도일 때 임전무퇴를 배웠지, 염전의식을 배우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혹시 해군사관학교는 우리랑 장교 커리큘럼이 다른가?
아무리 생각해도 영국 해군 지휘관 넬슨이란 놈은 상관에게 잘 보여서 진급할 생각뿐인 정치군인이고, 우리 프랑스 해군을 대표한다는 놈은 ‘우리 좆밥인데 그냥 끼지 말죠?’라니.
육지는 나폴레옹이 맡았으니 지지는 않으련만, 이거··· 바다에선 러시아군을 이길 수 있을까?
한숨 밖에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