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시카 (2)
1793년 8월.
똑, 똑, 똑.
“장군님, 시간이 됐습니다.”
툴롱 지역방위대 보병 대대장, 장 란 대위는 어젯밤 사령관 나폴레옹이 부탁한 시간에 맞춰 사령관실의 문을 두드렸다.
“으음, 이보게 공관병. 혹시 장군님께서 아직도 주무시나?”
“아닙니다. 분명 아침 7시에 기상하셨지 말입니다.”
“···그래?”
“제, 제가 들어가서 다시 확인해보겠습니다!”
이제 갓 훈련병 딱지를 뗀 공관병은 데스크에서 서둘러 일어나 사령관실 문을 살포시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 장군님?”
“아, 페탱 이등병. 마침 잘 들어왔데이. 니는 이 옷 두 개 중에 뭐가 더 나을 것 같나?”
“예, 예?”
아무리 상급자고 장군님이라지만 밖에 그 무뚝뚝하고 무서운 장 란 대위를 세워놓고 옷이나 고르고 있다니.
사자 같은 장 란 대위 밑에서 몇 주간 구른 기억이 아직도 뼈마디 마디마다 생생한 공관병 페탱은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페탱? 내 말 못 들었나? 이 두 개 중에 뭐가 더 나을 것 같냐니까?”
“어, 어... 왼쪽 옷이 더 어울리십니다!”
“그래? 왜?”
어···. 음. 어.
“장식이 훨씬 화려한 게, 장군이라는 직책에 더 어울리는 듯 합니다!”
“그러면 이건 입으면 안 되겠고마. 고맙데이.”
“예?”
추천해 달래서 추천해줬는데, 오히려 별 장식도 없는 군복을 입고 나가겠다니. 무슨 청개구리인가?
페탱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어지는 나폴레옹의 말에 곧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갑자기 문은 왜 열고 들어왔나?”
“아! 장 란 대위님께서 밖에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간이 다 됐다고...”
“벌써? 음··· 윗옷만 걸치면 되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게.”
“예, 장군님.”
공관병 페탱이 나오고, 오 분여 후.
마침내 나폴레옹은 수수한 제복을 입고 사령관실에서 나왔다.
어깨에 별이 박혀있는 견장을 빼곤 여타 부사관이나 병사들의 제복과 비슷한 모습에, 장 란 대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군님, 그···.”
“왜 그러나?”
“장군이 입는 제복치고는 너무 소박한 것 아닌지요?”
장교들, 그러니까 소위 같은 초급 장교들이 병사들과 밥 먹는 것조차 금기시되는 시대에 장군이라는 작자가 부사관이나 병사들과 다름없는 옷을 입으니, 장 란의 질문은 멕이려거나 하는 게 아닌 궁금함에서 비롯된 질문이었다.
“왜? 자네도 불편한가?”
“저야 본래 평민 아닙니까. 전 별 잡생각이야 하지 않지만은 과연 다른 귀족 출신 장교들까지 그럴는지.”
“귀족은 무슨. 이미 출신이고 뭐고 다 사라진 세상에 아직도 그걸 따질 건덕지가 남아있는지는 몰랐고마.”
나폴레옹은 피식 웃더니 이어 말했다.
“적은 사람의 불편함으로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만큼 수지맞는 장사도 없제.”
“···예? 그게 무슨-”
옷 얘기를 하다말고 갑자기 개풀 뜯어먹는 듯 한 해괴한 소리에 장 란은 자기도 모르게 묻고 말았지만, 정작 그 해괴한 소리를 한 장본인은 답변조차 주지 않고 사령부를 나설 뿐이었다.
하여간 아미앵부터 여기까지 2년이나 같이 지냈건만, 아직도 장 란 대위는 저 꼬마 부사관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십 분지 일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
- 모두 분연히 일어나 침략자들에게 맞서 싸워주십시오.
- 다만 정부를 위해 싸우지 마십시오, 국가를 위해 싸우지 마십시오. 왕을 위해, 그 누군가를 위해 싸우지 말아주십시오.
-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닌,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싸워주십시오.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인권을 지키기 위해 싸워주십시오.
나폴레옹은 아직도 그 강렬한 문구를 처음 신문에서 본 기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겨우 명예와 진급 때문에 전선으로 가는 게 아니라, 정의를 수호한다는 그 달콤한 이유.
처음이었다. 처음
젊은 혈기가 끓고 당장 총을 쥐고 전선으로 달려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처럼 샘솟았다.
한 나라의 위정자라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명령’이 아닌 ‘협조’를 구하고, 불과 몇 년 전만해도 나라를 통째로 불태울 기세였던 사람들은 모두들 팔을 걷어붙이고 모병소에 모여들었다.
평생 말 한 마디 나누지도 못할 왕을 위해 싸우는 군대와 자신과 가족을 위해 싸우는 군대가.
돈을 위해 싸우는 군대와 자신이 믿는 가치를 위해 싸우는 군대가.
‘대가’를 바라고 싸우는 군대와 ‘자발’로 모여든 군대가.
2년 전, 1791년 6월 23일의 그 날 맞붙었다.
그리고 그 날, 나폴레옹은 깨달았다.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아는 병사들만큼 훌륭한 무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지휘관은 이제 자신의 병사들에게 싸우는 이유로 고귀한 이상과 삶의 터전, 가족을 제시해야 한다는 걸.
그런 훌륭한 무기를 만들어낸 게 적이 아니라 자신의 친구라서 다행이라는 걸 말이다.
“왜? 뭘 봐?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됐다.”
“뭐야, 싱겁게.”
물론, 그 가공할만한 무기를 만들어낸 천재는 자기가 뭘 했는지도 모르는 것 같지만.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건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기욤 저 녀석의 머리통을 열어서 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 ‘문구’이후로는 정말 의사에게 부탁해서 열어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성당에서 사제들이 그토록 부르짖는 전지전능한 신이 있다면 아마 기욤 저 녀석의 머리를 골백번은 열어보지 않았을까.
하지만 불행하게도 나폴레옹은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었고, 전공조차 의과가 아니라 포병인 바람에 기욤의 머리를 손수 열어볼 수가 없었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지 않나.
제일 어이가 없는 건, 그렇게 대가리가 잘 굴러가는 놈이 왜 세상 꼭대기에 앉을 생각은커녕 재무총감이라는 감투마저 내던지고 영국으로 도망을 갔느냐는 거다.
“마, 기욤아.”
“또 왜?”
“니는 출세 안하고 싶나?”
“출세? 이미 할 만큼 하지 않았나? 나는 지금도 나한테는 좀··· 과한 자리라고 생각하는데.”
“···됐다.”
그래. 학창시절을 생각해보면 이놈은 항상 그런 놈이었다.
‘엥? 그런 걸 귀찮게 왜 함?’이라면서 뺀질거리다가, 정작 머리에 감투를 씌워주고 그 자리에 강제로 앉혀놓으면 뭐가 들어있는지 모를 머리통을 짜내 별의별 이상한 짓을 다 한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그 이상한 짓들이 이러쿵저러쿵되더니 일이 제일 좋은 방향으로 흐르는 마중물이 되더라.
간편식사인가 뭐시기인가를 가지고 빈민들에게 나눠주던 게, 평등클럽 동기들의 목숨을 살릴 줄 그 당시에 누가 알았겠는가?
이런 놈은 강제로 종신 재무총감, 아니 그 영국에 있다던 수상을 시켜야 한다. 벗겨지지 않는 감투를 강제로 씌우고 사무실 의자에 묶어 놓으면 그 머리를 싸매고 온갖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쏟아내겠지.
그렇다. 평소에는 일하기 싫어 게으르게 빈둥빈둥 대는 이런 놈을 행정부 의자에 꽂아 넣지 않는다면 그건 2700만 국민들에게 실례되는 일 일거다.
나중에, 나중에 나폴레옹 본인이 국민방위대 총사령관까지 올라간다면. 반드시 저 녀석을 행정옥좌에 앉히고 말리라.
***
“전체, 차렷!”
각 중대 중대장들이 그렇게 외치자, 연병장에 모인 병사들은 허리를 곧게 펴고 총을 집어 올렸다.
“그만. 쉬어도 좋다.
제군들. 간밤에 잠은 다 잤나?”
단상에 오른 나폴레옹이 손을 올리며 말하자, 팽팽했던 병사들의 긴장도 어느새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모두 주말을 손꼽아 기다려왔을 텐데, 아침 댓바람부터 연병장에 모이게 해서 미안하다.”
몇몇 부사관들이 도열해 있는 병사들 사이를 지나며 검 손잡이로 병사들 허리를 지긋이 눌러주자, 곳곳에서 ‘아닙니다!’하는 소리가 크게 튀어나왔다.
“본관 또한 제군들의 소중한 시간을 뺏고 싶지 않기에, 질질 끌지 않고 말해주겠다.
지난 달, 우리 국민방위대 방첩대가 말하길. 러시아제국 해군이 보스포로스 해협을 지났다고 한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는 제군이 있나?”
그러나 하늘보다 높은 별이 하는 질문에 친히 대답하고 싶은 작대기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 이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 없나? 좋다, 그러면 내가 직접 물어보겠다. 페탱 이등병!”
“예, 예?!”
“왜 그러나? 혹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가?”
“아, 아닙니다! 장군님!”
대열 중앙에 있던 공관병, 페탱은 연병장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좋아. 그러면 어디 한 번 말해보게.”
“그··· 보스포로스 해협을 지났다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나 지중해로 러시아군이 나온 것 같습니다!”
“이야. 평소에 신문깨나 찾아 읽더니 머리가 굵어졌구나, 페탱 이등병.”
“감, 감사합니다!!”
병사들 사이에서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몇몇 장교들은 눈을 찌푸렸지만, 나폴레옹으로서는 원하던 바이기에 흡족한 마음으로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렇다. 우리 페탱 이등병의 말대로, 러시아군은 지중해로 나왔다. 그리고 지금 지해 어딘가에서 우리가 있는 바로 이곳. 남부 프랑스로 따듯한 지중해의 햇살을 받으며 순항 중이다.”
- 적군이 지중해에 왔다.
연병장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길 잠시, 나폴레옹은 다시 손을 들어 그 웅성거림을 잠재우고 말을 이었다.
“나와 제군들은 이제 그 러시아군을 물리치러 출정하게 될 것이다.”
“““······!”””
아까가 웅성거림이었다면, 이제는 시장을 방불케 하는 소리가 연병장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전, 전쟁이라는 건가?”
“······.”
말을 더듬는 사람이 한 무더기, 차게 얼어버린 사람이 한 무더기, 그리고 마른 침을 삼키는 사람이 한 무더기.
나폴레옹은 그 광경을 잠시 지켜보다가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 하늘을 향해 쐈다.
탕-!
난데없는 총성에 방금 전까지 도떼기시장 같던 연병장이 조용해졌다.
“제군들, 우리는 누구인가?”
“······.”
“제군들, 우리는 누구인가!”
“국, 국민방위대입니다!”
“그렇다. 국민방위대. 국민을 방위하는 것이 바로 우리 군인들의 사명이다. 무고한 자들을 지키는 것 말이다.”
나폴레옹은 단상을 가로로 천천히 거닐기 시작하며 말했다.
“러시아군이 이 땅에 오는 순간, 저들은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 누이, 형제와 살아가던 집을 파괴하고 황금빛 밀밭을 약탈할 것이며, 이제 막 숙성되는 포도주를 가져가 제 배에 채울 것이다.
제군들. 우리는 지금 역사의 중대한 기로에 서있다. 우리의 고귀한 가치, 자유와 평등과 박애와 저들의 타락한 가치, 복종과 착취와 탄압 중 누가 이길 것인가. 그런 중대한 역사적 기로 말이다.
그리고 그 둘이 맞붙는 최전선이 바로 우리가 지키는 이곳이다. 우리가 무너진다면, 우리는 타락한 왕들에게 우리의 삶을 다시 바칠 것이고, 우리가 이긴다면 우리는 비로소 자유롭게 되리라!”
모두가 한마디 한마디에 숨을 죽인다.
“제군들. 지금 우리 앞바다에는 지중해가 펼쳐져 있다. 과거 찬란한 로마제국의 스키피오와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맞붙던 지중해 말이다. 그 수천 년을 지켜본 역사의 산 증인이, 지금 우리의 군화가 어디로 향할지 지켜보고 있다.
러시아군이 주둔한 코르시카로 가서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갈 것인가! 아니면 구태한 역사에게 패배할 것인가!”
나폴레옹은 검집에서 검을 빼내 하늘 높이 쳐들고 크게 외쳤다.
“제군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나!!”
“““코르시카!”””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나!!”
“““코르시카!!”””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나!!”
“““코르시카!!!”””
“역사의 증인, 지중해에게 보여주자! 누가 새로운 역사의 주역인지!”
“““와아아!!!”””
연병장을 가득히 채운 병사들은 어느새 총을 하늘로 들고 세차게 흔들고 있었다.
“기욤이, 이제 됐나?”
“이야, 형 나중에 은퇴하면 우리 잡지사에서 일 하나 해볼래?”
“마, 치아라!”
아니, 좋아서 얼굴이 베시시해졌구만. 말로는 왜 화내는지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