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시카 (1)
“으음.”
“왜 그러십니까, 각하? 혹여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별 일 아닙니다. 어서 가시죠.”
나는 다 읽은 편지를 고이 접어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마부에게 그리 말했다.
파리에서 툴롱으로 가는 길, 내가 받은 나폴레옹의 편지는 약 5700자의 소설 뺨치는 분량에 상당히 악의적이고 공격적인··· 아니다. 딱 까놓고 말하자.
[내 눈에 띄면 널 죽여 버리겠다.]
불세출의 영웅,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살해협박을 받다니, 이것 참 성공한 인생이 아닐 수 없다. 그 와중에 글 좀 써본 작가지망생 아니랄까봐 욕도 참 다채롭기 그지 없다.
하여간에 내 인생 참 스펙타클해요.
좋다. 이 편지는 꼬옥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가 후에 내가 자서전이나 비스무리한 거 쓸 때 사료로 동봉해야겠다. 사람들은 원래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에 미치는 법이거든.
그래. 본판 한 번 팔아먹고, 새로 찍어내는 개정판에 추가한 뒤, 언론으로 입 좀 털어주면 사람들은 너무 궁금한 나머지 안사고는 못 배기지 않을까.
세상 사람들! 영웅 나폴레옹의 저질 입담을 지금 유료로 구경할 기회랍니다! 싸다 싸! 단 돈 10리브르에···.
“감사합니다, 각하.”
“예?”
한참 의식의 흐름 기법에 맞춰 괴상망측한 생각을 하던 나는, 갑작스러운 외부의 소리에 깜짝 놀란 나머지 몸을 움찔하고 말았다.
“소관과 제 장병들은 조국 폴란드와 가족의 복수를 할 기회를 주신 각하와 프랑스 정부에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 예에...”
“절대 이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각하.”
내 옆에서 불타는 눈과 함께 손을 불끈 쥐는 이 서른 초반의 남자.
이름이···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라고 했던가.
조국 폴란드가 프로이센, 신성로마제국, 러시아에 의해 폴 / 란 / 드 로 세 토막이 난 것도 모자라, 남의 전쟁에 동원까지 되다니. 이 사람 인생도 참 기구하다.
하지만 저 사람과 폴란드인들이 측은하다고 해서 내가 지금 뭘 해줄 있겠나.
땅을 뺏어다가 돌려줄 수도 없는 일, 나는 그저 이 사람들의 무운을 빌어줄 수밖에 없었다.
“귀관과 폴란드인들이··· 다치지 않고 무사했으면 좋겠군요.”
“각하의 말씀은 정말 감사합니다만, 저희 폴란드인들의 표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야··· 모르지요.”
“신과 명예, 조국입니다.”
폴란드 망명 장교는 결연한 표정으로 이어나갔다.
“저와 제 병사들은 신은 몰라도, 조국을 지키지 못했고, 조국을 지키지 못했으니 군인으로서의 불명예를 안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조국을 되찾고, 명예를 되찾을 때까지 우리는 결코 몸을 아낄 수 없습니다.”
총칼 앞에서도 굴하지 않던 교과서 속의 독립운동가들처럼 말하는 포니아토프스키에게, 나는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줄 뿐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한참 얘기를 끝마칠 무렵.
“각하, 목적지인 툴롱에 도착했습니다.”
마차가 멈춰섰다.
***
“어서 오십시오, 각하. 오오온종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하. 오랜만에 보니까 참 옛날 생각나고 좋네요, 보나파르트 준장.”
“하. 하. 하.”
“하하하!”
어이쿠, 왜 이를 그렇게 북북 갈고 계셔. 그러다가 나중에 틀니 한다? 저어기 뭐냐, 그 미국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 씨는 틀니 때문에 그렇게 고생한다던데.
안되겠다. 친구의 도리로서 우리 나폴레옹 형을 위해 파리에서 용한 치과 의사를 수소문해봐야겠어. 역시 동기 사랑이 곧 나라 사랑 아니겠나.
“하하하, 고따구로 말을 하는 거 보니까, 총감 각하는 되게 살만 한가봅니다? 누구는 저어엉말로 등골 빠지게 일하는데?”
“하하하, 정 원하면 보나파르트 준장이 재무부에서 일할 수 있게 자리를 주선해드릴까요?”
“이, 이익...!”
나폴레옹 형은 또 다시 이를 북북 갈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뭐냐. 제가 중앙에 요청 드렸던 건 가지고 오셨습니까?”
“당연하지요. 포니아토프스키 중령?”
“반갑습니다, 보나파르트 장군님.”
내가 자신의 이름을 호명하자, 내 뒤에 있던 포니아토프스키는 나폴레옹 형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폴란드 의용대를 이끌고 있는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 중령입니다.”
“···폴란드인?”
“예, 그렇습니다. 장군님.”
“···총감 각하, 잠시 이야기 가능하십니까?”
포니아토프스키와 악수한 나폴레옹 형은 나를 죽일 듯 노려보다가, 잠시 둘만의 시간을 가지자고 채근하기 시작했다.
음, 보아하니 저 얼굴은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쿠데타를 일으키겠다는 얼굴이로구나.
나폴레옹이 군대를 이끌고 파리로 쳐들어와 ‘기욤! 나 나폴레옹이 돌아왔소! 이번에는 그대를 파멸시키고야 말 것이오!’라고 부르짖는 미래는 보고 싶지 않다.
결국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나폴레옹 형은 나를 사령부의 구석진 방으로 데려갔다.
주위에 누가 없음을 확인하고, 문까지 닫자. 나폴레옹 형은 화딱지가 났는지 장군모를 바닥에 던져버리고 내게 눈을 부라리며 언성을 높였다.
“마, 니 미쳤나?! 지금 내랑 함 해보자는 기가?”
“기병대 달라고 해서 기병대 데려왔잖아.”
“뭐? 기병대? 저 놈들 러시아한테 떡 발린 패잔병 아이가!! 이미 러시아한테 깨진 놈들을 가지고 뭘 하란 건데!? 이번에는 지네 나라가 아니라 프랑스에서 러시아한테 대주려고?”
나폴레옹 형의 목에 핏대가 섰다.
“내가 뭐 큰 거 바랬냐? 적어도, 어?! 그루시 그 양반 밑에 있는 용기병들은 내려 보내줄 수 있는 거 아이가!”
음, 사실 나도 정예병을 주고 싶고 그걸로 무쌍 찍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보고 싶지만.
“나폴레옹 형. 그러면 시민들이 불안해 할 수 있어.”
“와아아. 베르사유에서 좀 노닐드만, 인마 이거 완전 정치인 다 됐네!?”
“아잇 씻팔 아마추어처럼 왜 그래?!”
“아마추어는 지랄이!!”
“형은 나폴레옹이잖아! 백전불패의 영웅!!”
SSSR급 황금 영웅 카드가 왜 이리 말이 많아. 까놓고 말해서 나폴레옹과 나란히 설만한 천재 군인이 이 인류 역사 상 알렉산더 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말고 더 있나?
그러나 내 말을 들은 나폴레옹 형은 무슨 헛소리냐며 얼굴을 구길 뿐이었다.
“여태 딱 한번 이겨봤는데, 백전불패의 영웅은 무슨 헛소리고!”
“아, 맞다.”
이 양반은 지금 자기가 역사책에 어떻게 적혀있는지 모르는구나.
“기욤이. 니, 니 혹시 어디 아프나?”
“뭔 소리야 그건.”
“머리라던가, 머리라던가. 머리가 좀 아픈 거 같은데...”
나폴레옹 형은 나를 이제 무슨 정신병자보는 듯 한 눈빛으로 보며 그렇게 말했다.
젠장, 여기서 ‘사실 나는 미래에서 왔고, 그 미래에서 나폴레옹 당신은 역사책에 나와용. 자기 위인전 한 번 읽어보쉴?’같은 소리를 지껄일 수도 없는 일.
나는 답답한 마음에 궐련을 물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내가 형을 어? 높이 평가한다는 거지. 막··· 정말 백전불태라던가 그게 아니고.”
“뭐, 그런 거라면 다행이다만... 아무튼 간에. 저 폴란드 패잔병 애들 데리고 쌩쌩한 러시아군을 상대하라는 게 기욤이 니 명령이라면, 내는 못하겠다.”
“형. 내가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 건데, 왜 그런지 알려줄 수 있나?”
“그건 쉽제.”
나폴레옹은 집어 던졌던 장군모를 다시 집어 들며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애들은 내가 기르고 조련시킨 피 같은 병사들이다. 그런 애들 측면을 저런 믿음도 안 가는 패잔병들에게 맡길 수는 없다.”
“음.”
“생각해봐라. 말도 안 통하는 애들이 대부분일텐데, 어떻게 전투를 유기적으로 가져갈 수 있겠나? 이건··· 저 폴란드 사람들에게도, 우리에게도 그리 좋은 판단은 아닐 거다.”
무엇보다도.
“저자들의 투쟁심이 내는 마음에 걸린다. 멀쩡한 군대도 사기가 박살나서 도망치는 일이 역사 상 한두 번 일어난 게 아니지 않나.
그런데 멀쩡하지도 않은 패잔병들이라면 불 보듯 뻔하지. 안 그렇나?”
“···부정할 수는 없네.”
더러운 정치적 목적 같은 게 아니라, 자신의 병사들을 살리고 전투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지휘관의 생각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대화를 엿듣던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보다.
“보나파르트 장군님.”
“포니아토프스키 중령?”
“죄송합니다. 총감 각하와 장군님 사이의 대화를 엿들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어디서부터 들으셨습니까?”
“···중간부터 들었습니다.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포니아토프스키 중령은 모자를 벗어 우리에게 허리를 숙인 뒤, 입을 열었다.
“두 분께 실례가 안 된다면, 잠시 소관이 말을 해도 될 런지요?”
이미 뒷담화를 하다 걸린 꼴인데 추하게 그것마저 막을 수도 없는 일.
나와 나폴레옹 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감사합니다. 소관 또한 군문에 든 지휘관으로서, 객관적으로 생각해본다면 보나파르트 장군님의 생각이 맞습니다. 우리 폴란드 의용대는 모두 수도 바르샤바를 적의 군홧발 아래 지켜내지 못한 패잔병들입니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소관이 아무리 변명거리를 늘어놓는다하여도 조국이 사라지는 걸 막지 못한 것이 사실이니 말입니다.”
포니아토프스키는 고개를 돌려 나폴레옹 형을 쳐다보며 말했다.
“보나파르트 장군님, 소관이 알기로 장군님께서는 몇 년 전 반역자들의 무리와 맞서 승리를 거머쥐었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맞습니다.”
“장군께서 손에 쥐셨던 건 고작 정규군 4천에 민병대 8천이었지만, 장군께서는 그 열악하기 그지없는 병사들로 반역자들의 정예군 1만을 격퇴하셨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병사들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포니아토프스키는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한 번 숙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조국이 사라졌을지언정, 저와 제 병사들은 아직도 조국을 떠나보내지 못했습니다.
러시아군은 우리 폴란드를 침략한 후, 온갖 곳에서 범죄를 일으켰습니다. 학살, 방화 등등.
적어도 제 휘하에는 바르샤바의 거리가 우리 폴란드 시민들의 피로 물든 모습을 보고서도 피눈물을 흘리지 않은 폴란드인이 없습니다.”
보나파르트 장군님,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알고 있습니다.
포니아토프스키는 그렇게 말하고, 우리에게 경례를 올린 후 방을 나갔다.
나폴레옹 형은 한참 동안 폴란드인이 나간 문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내는 모르겠다.”
“하겠다는 거야?”
“에라이 씨발. 그래! 한다! 하겠다고! 마, 이제 됐나?”
뒤이어 ‘내가 이 녀석을 친구로 둔 것 때문에- 어쩌고 저쩌고’하는 이상한 소리가 내 귀에 들린 듯 싶었지만.
글쎄다. 우리 나보 형님께서 그랬을 리가?
***
“지중해 분견함대 함대장, 호레이쇼 넬슨 대령입니다.”
“반갑습니다, 기욤 드 툴롱입니다. 귀관의 명성을 수상께서 그리도 많이 얘기해주시더군요.”
“수, 수상께서 말이십니까?!”
“존 저비스 제독께서도 말씀을 해주시더군요.”
“하, 하하!! 이것 참! 크흠!”
이 인간 보소. 얼굴 헤벌쭉해지는 거 봐라?
내 군생활을 돌이켜봤을 때, 높은 윗사람들 눈에 띄길 원하거나 진급에 목매다는 사람 중에 정상인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참 걱정입니다.”
“무, 무엇을 말이십니까?”
“잠시지만 프랑스의 깃발을 다는 것 때문에 귀관과 승조원들이 불편을 느끼지는 않을 까···.”
푸른 해군 정복을 입은 넬슨 대령은 실실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각하!! 이 넬슨이 책임지고,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작전을 수행하겠습니다!”
“···그래요. 믿겠습니다.”
이봐, 피트. 이 사람··· 정말 믿어도 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