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7화 잠자는 사자들 (7) (177/341)

잠자는 사자들 (7)

“총감, 어서. 내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게.”

“왜, 왜 이러십니까?”

붙잡힌 팔이··· 팔이 너무 아프다.

방금 전까지 혼수상태로 병상에 누워있던 사람 맞아? 무슨 힘이 이래?

당황한 나는 미라보에게 잡힌 팔을 빼내려 애썼지만 그럴수록 내 팔에 전해지는 미라보의 힘은 강해져만 갔다.

“어서 답을 달란 말이야!”

“아니 씨발 의사들 몰래 아편이라도 피셨습니까? 갑자기 무슨 해괴한 소리십니까! 이러는 이유라도 좀 알려주시던가!”

“내가 뒈져버리면 이 나라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한 치도 모르겠으니까!”

미라보 의장은 거의 악바리가 되서는 내게 외치기 시작했다.

“4년 전, 내가 자네를 순순히 재무총감으로 임명했던 이유는 자네가 유일하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꿰고 있는 사람이기에 그랬던 거야! 안 그런가?!”

“그게 무슨 소리···.”

“자네를 제외하면 모두 변호사, 판사, 사제!! 책과 서류에 파묻혀 사는 바람에 이상은 높지만 현실을 그 이상에 맞출 능력은 없는 자들이 대부분이지.

에마뉘엘 시에예스,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그래! 둘 다 좋은 사람이지! 하지만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 좋은 세상을 만들 능력이 있다는 뜻은 아니네.

한 평생 법원과 자기 변호사 사무실만 들락거린 책상물림들이 과연 자네 없이 이 나라를 지탱할 수 있을 것 같나?

아니! 천만의 말씀! 아무리 의견이 비슷한 사람들일지라도 세세한 것까지 모두 같을 수는 없네. 결국 조그마한 분란이 일어날 테고, 그 분란이 심은 씨앗은 우리가 애써 만든 모든 걸 파멸시키기 시작할 걸세.”

상처에 앉은 딱지에게도 아물 시간이 필요하듯, 체제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이 쌓여 안정이 되고, 안정이 쌓여 전통이 되면 비로소 그 체제 아래 있는 누구도 그 체제를 함부로 엎을 수 없게 된다. 절대왕정 아래의 프랑스가 꾸준히 똥볼을 찼음에도 20년 동안 민중들이 참은 이유가 바로 그 ‘전통’아닌가.

이제 갓 4년 차에 접어든 혁명 정부다.

누군가가 ‘그건 위헌이오!’라고 지적해도 지적당한 사람이 아직까지는 ‘겨우 10년도 안 된 법가지고 뻗대지 마시지?’라면서 상대방 배를 째버릴 만큼, 아직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게 바로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서, 아무런 대비 없이 무작정 성숙한 의회정치를 바라는 건 머리에 꽃밭이 든 사람이나 할 법한 생각.

정치적 모략과 중상, 테러, 사회적 혼란, 치안의 마비.

듣기만 해도 온 몸에 닭살이 돋는 무서운 이야기를 꺼낸 미라보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얘기했다.

"그리고 그런 무질서의 끝에 뭐가 있을지 알고 있나?"

“······.”

“온 세상이 불타오를 때, 대중은 자신들에게 안전과 보호를 제공할 수 있는 무력을 가진 사람을 따르게 되는 법이야.”

그렇게 말하는 미라보의 얼굴에서 땀 한 방울이 콧잔등을 타고 떨어졌다.

“그게 기존의 부르봉 왕가일지, 아니면 부르봉을 태워버리고 제 2의 클로비스가 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그렇게 될 걸세. 내가 들어갈 관짝에 대고 내기를 해도 좋아!”

······어, 그거 완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아니냐?

하지만 기운에 압도됐기 때문일까, 나는 차마 뭐라 입 밖으로 뭐라 말하지 못하고 계속 미라보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제 2의 클로비스는 자신의 전공과 명성으로 제 밑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고 규합할 걸세. 그런 자가 정권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한지 알고 있나?

오직 끊임없는 승리와 승전보. 그것만이 그 정권을 이어나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일세. 그 끝없는 승리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을지 상상도 안 되는군.”

미라보는 잠시 한숨을 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린 이미 많은 피를 흘렸네, 총감. 많은 피를. 바스티유에서도, 발미에서도, 아미앵에서도 너무 많은 프랑스인이 죽어나갔어.”

죄 없는 사람들의 피를 더 볼 수는 없다.

“···그렇게 미래가 걱정이 되신다면 민중들과 의원들에게 얘기하시죠. 왜 그렇게 혼자서 끙끙 앓고 계십니까.”

“총감. 죽은 자의 유훈만큼 공허한 건 없다네.”

미라보는 쓰게 웃었다.

“물론 내가 저 팡테온(프랑스의 국가유공자 묘지)에 묻히기 전까지는 모든 힘을 다해 모두에게 경고할 걸세.”

그러나.

“나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난세가 온다면, 바스티유에서 탄압과 압제를 이기고자 봉기한 민중은 결국 제 몸을 스스로 군사 독재자에게 의탁하고 말 걸세. 물론 내가 죽어 관짝에 들어간 이후겠지만 말이야.”

그리고.

미라보는 말을 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런 독재자와 가장 가까운 건 기욤 드 툴롱, 바로 자네야.”

“······제가요?”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라보 의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연하지. 자네도 그렇고 자네 친구들도 그렇고 다 군인 아닌가. 우리 정부에서 라파예트 사령관을 제외하면 자네만큼 군무에 해박한 사람이 없어.”

“어, 음.”

“엠마누엘 드 그루시, 용기병 연대장. 프랑수아 마티유, 수도방위연대 부연대장,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툴롱 지역사령관. 다 자네 친구들 아닌가. 거기에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자네 학창 시절 친구들까지.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에라도 병력을 동원해서 베르사유를 공격해, 의원들을 억류하고 제관을 빼앗은 뒤 툴롱 왕조를 개창할 수 있겠구만.”

맞는··· 말이긴 한데. 전 쿠데타고 구국의 결단이고 할 마음이 저어언혀 없는데요.

쿠데타라니, 그런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는 건 평생을 통틀어 두 번으로 족하다.

미라보는 아까와는 달리 내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런 위기가 왔을 때, 그걸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도 기욤 드 툴롱, 바로 자네일세. 그러니 약속해주게 총감. 부디 이 나라를, 사람들을, 혁명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분명히 방금 전까지 두 눈을 부릅뜨고 괴력으로 날 잡아끈 미라보였건만, 지금 내 눈 앞에 있다고 느껴지는 건 정력적인 미라보가 아니라 두려움에 휩싸여 손을 덜덜 떠는 노인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약속드립니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이제 이 늙은이가 갈 때도 한 시름 놓고 떠날 수 있겠구만.”

“아니, 아까부터 대체 왜 죽네 마네 무서운 소리만 하십니까? 아직 정정하신 거 같은데.”

아무리 이 프랑스에서 나이를 많이 먹었다 해도, 저 멀리 반도에서 말이 씨가 된다는 소리를 듣고 자란 사람 입장으로서 굉장히... 듣기가 불편하거든요?

“뭐, 늙은이의 주책이라고 생각하게.”

달관한 것처럼 구는 미라보에게, 나는 잠시 침묵했다가 천천히 입을 열어 물었다.

“······아까 죽은 자의 유훈은 공허하다고 하셨잖습니까. 제가 미라보 의장님과 이렇게 약속을 했다고 해도, 미라보 의장님이 돌아가시고 마음을 바꿔먹을 가능성도 있지 않나요?”

“총감.”

“예.”

미라보는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내 눈을 믿네. 자네는 좋은 사람이야.”

“아까 로베스피에르 의원과 시에예스 사제님도 좋은 사람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내 정정하지. 자네라면 국왕이나 독재자처럼 일만 더럽게 많이 하는 자리는 사절할 것 같아서 말일세.”

아, 그러면 인정이지.

적게 일하고 많이 버는 게 바로 인간세상의 이치, 알파이자 오메가 아니겠나.

“그럼. 이 늙은이를 보러 와줘서 고마웠네. 출장 잘 다녀오게나. 총감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내가 책임지고 조율해보겠네.”

“파리로 돌아올 때 저희 툴롱 산 와인 좀 많이 챙겨다 드릴 테니 몸조리 잘하세요.”

“그것 참 기대 되는구만!”

“아, 참. 누군가 그러던데.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오지 않은 미래가 아니라, 두려움 그 자체’라고 하더군요.”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다-라. ······누군지 모르겠지만 무척이나 지혜로운 사람이군.”

나는 그렇게 미라보 의장과 작별의 악수를 나누고, 병실을 나섰다.

파리에서 툴롱까지 가려면 갈 길이 멀었다.

***

[지원군이, 존나게, 많이 필요함. 특히 기병대. 기병대 안 주면 나는 작전 못함. 안 해. 꼬우면 기욤 금마한테 내 배 째라고 하던가.]

[- 국민방위대 툴롱 지역사령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준장 -]

“흠. 나폴레옹이 많이 힘든가 보군.”

“왜? 뭐라고 합니까?”

“지원군을 달라고 하네.”

“보병? 포병?”

“기병.”

“아니. 지금 전쟁난다고 온 프랑스에 광고하겠다는 거야?”

국민방위대 보병 중령, 프랑수아 마티유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말했다.

“······이보게 마티유, 내 밑에 있는 용기병 연대를 빼서 보내면...?”

“이야 눈에 띠게 흑색 수술까지 주렁주렁 매단 용기병을 보면 시민들이 참 좋아라 하겠습니다. 그렇죠, 그루시 대령님?”

“음...”

파리에 있는 기병대를 빼서 툴롱까지 보내면, 민간인들이 당연히 알아차릴 거고 저번처럼 두려움에 떨고 말 거다.

“그렇다고 안 보내 줄 수도 없지 않나.”

“그렇다고 수도에서 병력을 빼면 우리 의원들께서 가지신 불안감이 도질 텐데.”

“이것 참 골치로군.”

그루시는 턱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러시아군은 강군이 아니다.

그러나 만만하게만 볼 수 있는 상대도 아니다.

결국 실전을 경험해본 병력을 차출해야 하는데...

사령부에 있는 모두의 눈이 단 한 사람을 향해 돌아갔다.

그 눈들이 바라보는 주인공인 라파예트 사령관은 지도를 곰곰이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루시 대령.”

“예. 사령관 각하.”

“저번에 찾아온 폴란드인들 있지 않습니까?”

“그 망명자들 말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듣기로는 경기병대 출신이 다수라던데. 그 치들을 보내보는 건 어떨런지요?”

“···바로 접촉해 보겠습니다.”

“반갑습니다, 포니아토프스키. 프랑스 국민방위대에서 나왔습니다.”

“무슨 일이시지요?”

“귀하와 함께 넘어온 폴란드인들이 경기병 출신이라지요?”

“맞습니다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러시아 제국군이 현재 우리 프랑스를 넘보고 있습니다.”

망명 군인은 잠시 침묵했다.

“그 말을 꺼내는 건, 우리 폴란드인들의 도움이 필요하시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거절하시렵니까?”

“아니. 조국의 원수를 갚을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유제프 포니아토프스키 중령, 귀관과 부대원들을 지금부터 폴란드 독립의용대란 이름으로 프랑스 국민방위대에 정식으로 편입하는 바입니다.”

“제가 무엇을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툴롱 지역사령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준장에게 가십시오.”

망명한 군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부르봉 왕조 스페인 왕국, 수도 마드리드.

올해로 28살이 된 총리대신 마누엘 고도이는 샹젤리제를 잔에 가득 따라 단숨에 비워냈다. 술이라도 안 처마시면 당장 돌아버릴 것 같아서.

“씨발... 좆됐다...”

잘생긴 총리대신은 아무도 없는 방에서 그리 읊조렸다.

또 다시 샹젤리제를 가득 따라 비우길 두어 번.

“이제, 이제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그러나 시계는 그런 고도이의 마음과 달리 똑딱똑딱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결국 고도이는 내키지 않은 발걸음을 옮겨 궁궐로 향했다.

“헤, 헤헤. 우리 스페인의 자랑, 총리대신이 왔구료!! 내 그대의 고견을 듣고자 하오!”

“······국왕 폐하를 뵈옵니다.”

“준, 준비는 끝났는가?”

“···생도맹그 공격 준비가 거의 끝났다는 소식입니다.”

“그, 그것 참! 좋은 소식, 이구려! 준비가 끝나는 대로 저 주제넘은 깜둥이들을 응징하시오!”

정말, 정말 좆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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