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사자들 (5)
베르사유 국민방위대 사령부실.
“기존 러시아 제국군의 예상 침공 계획로입니다. 신성로마제국이 길을 빌려준다면 저번 프로이센과의 전쟁처럼 제 1 목표는 알자스-로렌. 제 2 목표는 뫼즈-아르곤. 제 3 목표는 베르됭-랭스가 될 겁니다.
적의 병력에 따라 다르지만 약 3만에서···.”
한 참모가 벽에 걸린 대형 지도를 나무 막대기로 탁-탁- 두들기는 모습을 이 자리에 참석한 모두가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평원파 의원들, 산악파 의원들. 그리고 나까지.
그러나 이 중 참모들 입에서 나오는 단어를 제대로 이해하고, 또 어지럽게 놓여 있는 지도상의 말판들이 무슨 의미인지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저기, 소령? 다시 한 번만 설명해주겠나?”
“예, 의원님. 일단 낭시 지역방위대가···.”
“그, 그렇구만.”
“자네는 저게 무슨 말인지 알겠나?”
“아니.”
왜 트리어 시절에 로베스피에르 의원이 그토록 정치위원인지 뭔지 하는 휴전선 너머 불법무장한 괴뢰도당 냄새나는 정책을 밀어붙이려 했는지 알 것 같다.
당장 로베스피에르, 시에예스 두 당수만 하더라도 군과 실무와는 거리가 먼 변호사와 사제 출신.
저 지도에 나오는 게 파리를 엎어버리고 싶은 반란군들인지, 아니면 정말 프랑스를 수호하려고 하는 수호신들인지 모르고, 병참이니 군수니 화력이니 포대니 하는 군사 시설이 뭘 위한 건지도 모르니 든든함보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절대왕정이라는 허물을 벗고 태어난 지 4년밖에 안 된 응애응애 나 아기 혁명정부로서는 매 시간 매 분 매 초가 모두 낯설기 그지없겠지.
이런 불안감을 해소해주려면 전직 군인이거나 군사 쪽에 해박한 사람들이 당에 들어가 있어야 할 텐데, 그렇게 다양한 직종 출신 사람들이 의원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상당히 걸릴 것이다.
“그게 지금 나보고 군복을 벗으란 말은 아니리라 믿습니다. 총감.”
“그냥 상황이 그렇다는 거죠. 라파예트 사령관님 말고 누가 지금 방위대를 군소리 없이 다독여줄 수 있겠습니까? 뒤무리에?”
“흠. 누가 예산을 짜게 주지만 않았어도 참 좋았을 텐데.”
“그러면 내년 방위대 제식 무장은 활과 화살이 됐겠지요. 제가 어디서 칭기즈칸 평전이라도 구해다 드릴까요? 내년에 총 대신 활, 창을 쓰려면 미리 위대한 정복군주를 벤치마킹해보는 것도···.”
“그만 그만. 그래요. 내가 졌습니다, 총감.”
브리핑이 끝나고 나와 만난 라파예트 사령관은, 두 손을 하늘 높이 들며 도저히 못 이기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왜 그래. 사령관님이 원하면 내가 저어어어기 몽골에 무역선이라도 보내서 구해온다니까. 이렇게 남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거 보니 역시 나는 착한 사람이다. 암 그렇고말고.
“수전노 재무총감과 정치력이 부족해 예산을 타내지 못한 비운의 군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고, 러시아 얘기나 해보지요. 영국인들이 함대를 빌려준다고요?”
“정확히는 툴롱에 있는 지중해 함대만.”
“···그렇군요.”
라파예트는 몸을 의자 깊숙이 넣고 잠시 뜸을 들였다.
“솔직히··· 짜증납니다.”
“뭐가요?”
“영국인들이 우리 프랑스 강역에서 제 마음대로 돌아다닌다는 거.”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니죠.”
“제기랄, 조국을 버리고 제 안위만 찾아 떠난 탈영 해군장교 놈들만 없었어도 이런 꼴을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라파예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내 옆의 누군가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말일세, 라파예트.”
“트레빌 제독. 우리 프랑스 해군이 그렇게나 사람이 없습니까? 러시아 함대 하나 못 막을 정도로?”
“혁명 이후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간 친구들이 이제 막 2학년을 달았네. 겨우 길러낸 미래의 싹을 죽게 만들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국민방위대 해군사령관, 루이 라투슈 트레빌 제독은 착잡한 얼굴과 함께 고개를 가로지었다.
사실··· 이만한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프랑스 지중해 함대장, 영불해협 함대장, 미국독립전쟁 파견함대 참모장 등 실전 경력이 있는 그마저 없었다면 이미 프랑스 해군은 저 멀리 스틱스 강 너머로 사라져 영영 보게 될 일이 없었을 테니까.
기존 사관의 8할이 행방불명, 장병들은 일단 먹고 살기 위해 제대하고 무역회사 배에 오른 지 오래, 거기에 해군사관학교의 교관들 다수는 왕당파.
학교의 커리큘럼부터 함대 재편성, 그 와중에 프랑스의 젖줄이자 핵심이권지대인 서인도 제도는 지켜야하니 어떻게 해서든 가용 함대를 쥐어짜내 무역선들에게 붙여주고.
결국 북해, 영불해협, 지중해 등 프랑스 연안에 출격해야 할 본토 함대는 군항에서 유지보수하는 것만 해도 허리가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해야 했다.
“지중해에서 전투가 일어난다면 우리 프랑스 해군은··· 딱 전열함 한 척, 배에 탄 인원을 줄이고 줄여 동원하면 거기에 프리깃 한 척 정도 동원할 수 있네.”
“그것 참 어질어질하군요.”
영국의 제안을 거절하면 상륙한 러시아군과 본토에서 싸워야 한다.
“아무리 우리가 조심한다 해도, 민간인 사상자가 안 나올 수가 없습니다.”
“애초에 자기들 영토로 삼은 폴란드에서도 사람들을 태워 죽인 야만적인 놈들일세. 자기들 땅으로 삼을 수도 없는 우리 프랑스에서 무슨 짓을 할지 상상도 안 가는 군. 민사(民事)작전은 무슨, 약탈, 방화, 겁간. 두렵구만.”
그렇다고 영국의 제안을 수락하면 제 땅을 지키는 것 조차 남의 손에 기대야 하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도움을 받는 꼴.
“장교들 대부분은 적개심을 품을 테지요. 그게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전국에서 병력을 모으는 것부터 유언비어가 상당할 걸세. 총감이 저번에 상담소를 열어서 다행이지, 그것조차 없었으면 아마 아비규환이 따로 없을 걸.”
전쟁이야 이기면 된다. 이기면.
비록 해군은 나약해졌지만 육군은 아직도 전 유럽에서 내로라하는 프랑스 아닌가.
그러나 승리의 뒤가 얼마나 힘든지 아는 두 방위대 사령관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시발. 이러다가는 싸워보기도 전에 우울증으로 줄초상이 나겠어.
짝! 짝! 짝!
나는 손바닥을 모아, 공기를 가득 넣고 큰 소리가 나게 손바닥을 부딪쳤다.
음, 공기 반 소리 반. 아주 듣기 좋아.
“다들 기 좀 펴시죠. 아직 러시아군이 프랑스까지 오려면 시간 더럽게 많이 남아있습니다.”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 겁니까, 총감?”
“우리 최악을 하나 씩 지워 나가봅시다.”
우선 민간인 죽는 거. 이건 절대 안 된다.
물론, 전자 같은 일이 생기면 러시아에 대한 반감으로 혁명정부에 대한 지지는 더 굳어질 거다.
하지만 같은 프랑스인으로서도, 21세기 현대인의 감성으로서도 그건 못 본다.
“우리 국민이 납탄에 맞아 죽는 것보다야 우리가 욕 좀 처먹는 게 훨씬 낫습니다.”
“어떻게 보면 불안한 정국이 조성되는 게 더 안 좋을 수도 있네.”
“순순히 욕 처먹겠다고는 안했습니다.”
“그러면?”
언론의 힘은 막강하다. 특히나 TV, 신문, 인터넷 등등 여러 언론매체가 있는 미래보다 종이라는 매체 한 가지 뿐인 지금이라면 그 언론의 힘을 가장 극대화할 수 있고.
미국독립도, 혁명도 모두 언론에서 ‘시민 여러분! 살기 좆같지 않습니까?!’라고 쓴 것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포브스> 1면에 따악 우리 정부의 외교력에 대한 성과니 뭐니 하면서 두둔 좀 해주면 반감이 꽤 낮아지지 않겠습니까?”
“···지금 국민들에게 사기를 치자고?”
“뭘 사깁니까?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인데.”
내가 영국에서 수상하고 쇼부를 봐서 생긴 결과 아닌가. 뭐, 중간이 조금 많이 생략되긴 했지만. 그러니까 사기는 아니다. 아니야.
“지금부터 그러자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라파예트 사령관님이 우려했던 그런 그림이 나온다면, 그렇게 하자는 거죠.”
“장병들의 사기는? 군중들이야 언론으로 구워삶을 수 있다치고, 장병들은 어떻게 할 텐가.”
“우리가 러시아군과 싸우면 전장이 어디가 될까요?”
“아마··· 코르시카 근처가 되겠군요.”
“지휘관은 누가 될까요?”
“툴롱 지역사령관이 보나파르트 준장이니, 그 친구가 지휘를 맡겠지요.”
“보세요. 걱정할 필요가 없죠?”
“그게 무슨···.”
언론플레이로 황제까지 해먹은 양반이 고작 장병들 못 휘어잡겠어? 짬 좀 때려도 상관없겠지.
***
프랑스 혁명왕국, 툴롱.
국민방위대 육군 지역사령부.
매일 아침, 정기 회의에 참석하기 앞서 거울을 들여다보며 외모를 가꾸는 젊은이는 오늘도 만족스럽게 면도된 자신의 하관을 보며 미소 지었다.
“음, 흠흠~. 흠흠~.”
정말 아름다운 날이다. 새들은 지저귀고 꽃들은 피어나고.
거기에 어깨에 달린 황금색 견장 또한 빛나니 이 어찌 아름답지 아니 하리오.
확실히 별을 달고 나서 인생이 달라졌다.
사관학교 때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탓에 여유는 뒷전이었고.
필기하랴, 노트에 정리하랴, 아침도 제대로 못 챙겨 먹고 잠도 못 자다시피 했고.
국민방위대 준장, 툴롱 지역사령관이 되고나니 장군으로서의 품위유지 때문인지 여유를 가지려 노력하게 되었다.
저번에 장병들이 잘 경계를 서고 있는지 순찰을 돌 때는 한 이등병이 졸고 있길래, 말없이 그 병사가 일어날 때까지 옆에서 경계를 같이 서주었다.
아마 기욤 같은 왈가닥이 나폴레옹, 자신의 입장이었다면 그 피곤한 병사를 바로 깨워서 윽박질렀겠지.
삼시세끼는커녕 옷 수선할 돈도 없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지역 사교모임 갈 때도 어깨를 당당히 펴고 큰 소리로 또박또박 말하고.
아무리 기분 좆같은 일이 생겨도 관사에서 미리 공관병이 덥혀놓은 욕조에서 푹 몸을 녹이고 씻으면서 혼자 나는 누구?
"국민방위대 준장,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으하하핫!!"
하면서 웃으니까 기분도 좋아지는 듯 했다. 이래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나온 것 같았다.
오늘도 한바탕 자기애의 시간을 보낸 나폴레옹은 여유롭고, 품위 넘치는 장군의 모습으로 관사 문을 열고 나섰다.
사령부로 가는 잠시 동안의 산책, 오와 열을 지어 행군하고 훈련하는 병사들을 보며 나폴레옹은 흐뭇하게 웃었다.
“장군님, 일어나셨습니까?”
“그래. 자네와 전우들은 잘 잤나?”
“헤헤. 그렇습니다!”
“좋아, 휴식도 전투와 훈련의 일환인 걸 잊지 말도록.”
지나치는 병사들에게 덕담도 한두 마디 건네고, 나폴레옹은 천천히 사령부 계단을 올라 회의실로 들어섰다.
“마, 간밤에 다들 잠 잘 잤나?”
“““예, 장군님!”””
장군님이라니. 크으으, 언제나 들어도 감격스러운 소리 아닌가.
이 맛이다. 이 맛으로 출세한다!
온 몸이 쾌감으로 부르르 떨렸지만 짐짓 젠체하며 사령관 석에 앉은 나폴레옹은, 여느 부대처럼 지난주에 있었던 일과를 하나씩 점검했다.
“···이걸로 일과 확인은 끝입니다, 장군님.”
“아, 그러고 보니 기욤 그 녀석, 아니. 재무총감께서 프랑스로 돌아왔다고?”
“예, 장군님. 오늘 아침 장군님 앞으로 편지도 한 통 왔습니다. 재무총감께서 보내신 듯 합니다.”
“역시 장군님이 재무총감 각하의 둘도 없는 친우가 맞으신가 봅니다!”
“큼, 큼. 얼굴 붉어지게 시리... 이리 줘 보게.”
기욤 이 녀석, 비록 얼굴은 2년 동안 못 봤지만 역시 동기사랑은 나라 사랑이구나.
나폴레옹은 부관이 건네준 편지의 봉인을 뜯고, 그 내용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음, 역시 안부인사부터 시작이군.
오호, 영국에서도 잘 팔리나보네. 나중에 파리에 가면 와인 좀 넉넉하게 훔쳐와도 되겠다.
···이게, 이게 뭐야.
이건, 이건 폭탄이잖아!!
“이, 이... 씨발럼이!!”
나폴레옹은 울부짖었다. 크와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