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3화 잠자는 사자들 (3) (173/341)

잠자는 사자들 (3)

놀 거리가 도박, 아니면 잡지(그것도 죄 재미없는 이야기만 들어있는) 사 읽는 것 뿐 인 이 18세기 말.

그런 18세기에 보드게임이라. 확실히 달달한 꿀 냄새가 내 코를 실시간으로 간질이는 게 느껴진다. 동시에 혹시 모를 실패의 향기도 내 코를 간질여서 문제지.

이 18세기가 어디 보통인가. 정경유착이야 예삿일이고, 장교들이 신분이 다르다며 병사와 밥조차 같이 먹지 않는 시대다.

현대인의 상식으로는 꽤나 괴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일이 마구마구 생겨난단 말이지.

며칠 전에도 보지 않았나, 현역 국회의원인 윌버포스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아편을 대놓고 빨아재끼는 걸 말이다.

- 아, 아편? 그런 걸 대체 왜 피우십니까?!

- 아니. 단순한 약일 뿐 인데... 왜 그러십니까?

이 시대에서 당연한 건, 내게 당연하지 않고.

내게서 당연한 건, 이 시대에게 당연하지 않았던 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두 번 일어난 게 아니다.

“재무총감 각하 같은 귀하신 분께서 저 같은 촌부(村夫)를 만나시고자 이 시골, 버밍엄까지 직접 오시다니, 감개가 무량할 따름입니다.”

“같은 동업자끼리 왜 그러십니까. 그것보다 감상은 어떠십니까?”

“으음. 한 번 손을 대봐야 알겠군요.”

일찍이 프랑스에 있을 적에 나와 협력 관계를 구축한 바 있던 볼턴 앤 와트 사의 사장, 매튜 볼턴(Matthew Boulton)은 영국 최대의 장난감 및 잡화 제조사인 소호 제작소의 사장이기도 했다.

한 평생 장난감과 잡화를 만지작거린 사람이라면 이 보드게임이 정말 히트를 칠지, 아니면 쓰레기통으로 들어갈지 잘 알 터.

볼턴은 한참 동안 내가 손수 깎아 만든 나무 조각과 룰이 적힌 책자를 만지작거리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걸··· 혼자 고안해내셨다구요?”

“예, 뭐... 그렇다고 할 수 있겠네요.”

정확하게 말하면 미래에 누군가가 머리를 한참 싸매고 만든 아이템이긴 하지.

“확실히 재미있습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이게 시장으로 나가는 순간 1만, 아니, 10만 파운드는 거뜬할 겁니다!”

“그렇습니까?”

“다만 이걸··· 해군 장교들에게 파신다고요?”

“예.”

볼턴은 고개를 몇 번 가로 지으며 말했다.

“그러면 이걸로는 안 될 겁니다.”

“왜지요?”

“저 같은 민간인들이야, 이렇게 주사위를 굴려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땅을 사고, 건물을 사고, 어쩌다 상대 지역에 들어가서 바가지를 맞는 걸 좋아할지 몰라도. 군인이란 치들은 본디 정복과 명예에 미친 족속들 아닙니까.”

음. 지금 시대에 한해서 맞는 말이긴 하지. 아, 21세기에도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인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 치들의 정복욕과 명예욕을 충족시켜만 준다면, 아주 그 게임에 미쳐서 살 겁니다.”

“고견 감사합니다.”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대박을 제게 나눠주신다는데 제가 더 감사할 따름이지요. 각하.”

***

볼턴의 제안을 듣고, 나는 군 쪽에 납품할 보드게임과 민간 쪽에 납품할 보드게임을 따로 개발하기로 했다.

민간인들은 <블루마블>이라던가, <몬호폴리>라던가 하는 주사위 굴려서 땅 사고, 주사위 굴려서 상대 땅 피하는 게임.

아니면 <홀리갈리> 같은 단순하기 그지없지만, 재미있는 게임.

군 쪽에 선보일 건, 과거 GOP때 소초 단위로 했던 워게임을 좀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게임으로.

며칠 간 혼자서 나무를 낑낑 깎아내고, 룰을 가다듬은 끝에 마침내 탄생한 기욤 드 툴롱의 워게임 1호는 비록 말들이 투박할지언정 게임 자체는 충분히 즐길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말이야 나중에 공장을 돌리기 시작하면 충분히 예쁘고 멋있게 뽑혀 나올 테니, 지금은 이게 우리의 고객님들에게 통할 지만 보면 되니까.

“총감님, 초대장 잘 받았습니다. 저와 제 전우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으시다구요?”

“예. 저번에 하디 대위님이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함상 생활이 지겨워 죽겠다고. 혹시 도움이 될까 해서 개인적으로 게임을 하나 만들어봤는데, 재미있는지 도통 감이 안와서 말입니다. 하디 대위님과 전우 분들이 한 번 시험해 주시지요.”

“하하, 이거 제가 무척이나 영광스러운 기회를 얻었군요!”

하디 대위와 그와 함께 온 장교들은 다들 하하호호 웃으며 내가 안내해준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딱 15분 후.

“적군, 전열함 3대 발진!”

“프리깃 5대로 호위 시작해! 무조건 저 놈들 요격해야 돼!”

“청군 전열함에 명중탄 9발! 침몰이다! 침몰!”

“이런 씻팔!! 명중탄이 9발인 게 말이 돼!? 거리가 800야드라고! 800야드!! 800야드에서 초탄에 9발 명중이 말이 되냐!!”

“꼬우면 주사위를 잘 굴렸어야지! 안 그러냐? 낄낄.”

“이런 개 같은 주사위 좆망겜 같으니!!”

“자자, 그러면 A지역은 우리 적군이 가져갑니다요.”

토마스 하디 대위와 그 친구들은 어느새 보드게임에 푹 빠져 서로 간에 악의적인 비방과 욕설을 서슴없이 날리고 있었다.

음. 아주 보기 좋아.

본디 과몰입이야말로 그 게임이 가진 잠재성과 재미를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는 좋은 표본이 아닌가.

그런 면에서 저 친구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테이블을 주먹으로 두들기는 건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 저 치들이 ‘한 판만 더, 한 턴만 더!’를 외치는 걸 관전하며 흐뭇하게 웃고 있던 내게, 플로리앙 씨가 다가와 말했다.

“사장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중요한 분인가요?”

“베르사유에서 왔답니다.”

베르사유? 베르사유에서 날 찾는 거라면 뭔가 예삿일은 아닐 텐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참 격전을 이어가는 하디 대위와 친구들을 내버려두고 아래 응접실로 내려갔다.

“누구십니까?”

“헉, 허억. 베르, 사유에서, 왔습니다, 각하. 허억.”

“그···, 일단 숨 좀 돌리고 천천히 말씀하시죠.”

베르사유에서 왔다는 자는 아마 뛰어왔는지 숨을 헐떡이다가, 겨우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각하, 미라보 국회의장께서 쓰러졌습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밤, 베르사유에서 비보가 날아들었다.

***

“젠장, 내가 그래서 평소에 술 좀 작작 처마시라고 했는데. 매일 고기에 술을 물 먹듯 마시니 당연히 탈이 나지.”

나는 나도 모르게 턱을 괴고 읊조렸다.

“총감님, 곧 도착입니다.”

“예.”

수상, 피트가 위로와 안부를 묻는다며 날 초대한 덕에 어느 샌가 내 마차는 수상 관저에 다다른 상태였다.

문을 열고 응접실로 들어가자 저번처럼 피트가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프랑스 국민의회 의장께서 쓰러지셨다지요. 대영영국 수상이자 같은 의회정치의 동반자로서 심심한 위로를 표합니다. 의장께서 하루라도 빨리 완쾌하시길.”

“감사합니다.”

음. 피트 당신이 날 불러놓고 고작 그런 수사 몇 개 주워섬기자고 할 사람은 아닐 텐데.

그런 내 생각에 답변이라도 하는 듯, 피트 수상은 가히 충격적인 내용을 입으로 읊기 시작했다.

“러시아 제국 해군이 보스포로스 해협을 통과했습니다.”

“보스포로스 해협?”

“이스탄불, 그러니까 콘스탄티노플 말입니다. 튀르크 인들의 수도.”

“······혹시 친우 분인 윌버포스 의원 따라 아편이라도 피우셨습니까?”

아이코. 말이 조오오금 심하게 나와 버렸네.

“총감은 혹시 아편에 무슨 원한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단순한 약 아닙니까.

뭐, 여하튼. 우리 해군성 첩보부와 외교부에서 동시에 교차검증 된 소식이니 러시아 제국 해군이 보스포로스 해협을 통과했다는 건 사실입니다.”

“방금 전까지 저와 어울리던 해군성 친구들은 별 말 없었습니다만.”

“방금 들어온 따끈따끈한 기밀 중에 기밀이니까요.”

“음.”

러시아가? 갑자기 왜? 선전포고를 하고 3년 동안 아무 일도 없었으면 이제 슬슬 서로 시효가 만료될 때 아닌가.

아무리 군주 마음에 따라 왔다갔다하는 왕정이라지만 이제껏 별 일 없다가 갑자기?

“우리 외교부와 저도 당혹스럽습니다만, 방금도 말했듯 사실입니다.

아, 참고로 이 대영제국에서 지금 그걸 알고 있는 건 해군경 후드 중장과 외교부 장관, 그리고 저 뿐이랍니다.”

“···그걸 제게 알려주셨다는 건, 또 제게 뭔가 바라는 게 있으신 거군요.”

“어째 같은 영국인인 웨스터민스터 의원들보다 프랑스인인 총감과 더 말이 잘 통하는지 원.”

피트는 피식 웃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러시아 제국이 감히 주제넘게 지중해를 넘보는데, 우리 대영제국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러시아가 괘씸하다고 해서 우리 해군이 선제타격을 가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엄연히 러시아 제국은 우리 영국의 동맹국이니 말입니다.”

선제타격, 동맹국. 음, 신용이라는 게 참 중요하지. 그래.

그런데 그 말을 내게 꺼냈다는 건 우리보고 선제타격을 하라는 말 아닌가.

“수상, 우리 프랑스는 가용할 해군이 없습니다.”

니들이 나가서 싸워. 우린 그딴 거 할 능력 없어. 배째.

“걱정하지 마십시오, 총감. 해군경이 제게 귀뜸하기를, 우리 대영제국 지중해 분견함대가 현재 프랑스 툴롱에 있다지요.

뭐, 전열함 6척이나 되는 함대가 왜 더 커다란 항구인 마르세유가 아니라, 하필 총감의 고향인 툴롱에 정박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흠흠.”

거 말이나 계속 하지, 갑자기 남의 뒷주머니는 왜 찌른담.

“그래서, 하고 싶으신 말이 뭡니까?”

“간단합니다. 미국독립전쟁 시절처럼 행동하자, 이거지요.”

“···영국과 프랑스 군함들이 서로 국기 대신 해적깃발 펄럭이던 시절 말입니까?”

“바로 그겁니다.”

피트 수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그러니까 한 10년 전 쯤.

전쟁을 하던 두 나라는 양측의 민간 무역선들이 자유로이 드나드는 꼴이 무척이나 보기 싫었지만 아직까지 전쟁은 ‘명예로워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한 이 시대의 한계 상, 어쩔 수 없이 그 무역선들을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누군지 모를 해군 장교가 기가 막힌 생각을 해냈으니, 그건 바로 적국의 무역선을 발견하면 슬그머니 해군기를 내리고 해적기를 올린 후 습격하는 방법이었다.

- 우리 민간 무역선이 실종됐는데, 너네 탓이지?

- 무슨 소리임? 소문을 들어보니까 해적이 습격한 거 같던데? 우린 아닌 듯?

누구나 듣는 순간 무릎을 탁! 칠만한 변명 아닌가.

결국 미국독립전쟁 기간 동안 대서양과 서인도 제도 근처를 지나는 모든 무역선들은 수상할 정도로 강한 해적들과 끊임없이 맞서야했다.

“그 말씀은 우리 프랑스의 이름을 빌려 경고장을 날리시겠다는 거군요.”

“프랑스는 당면한 위협을 극복할 수 있고, 우리 대영제국은 암암리에 러시아에 경고를 할 수 있고, 서로 나쁠 건 없지요.”

“뭐, 좋습니다. 피트 수상 말대로 HMS가 붙은 군함 위에 영국 국기를 내리고 우리 프랑스 국기를 건다고 치죠. 그런데 해당 함대장이 우리 프랑스 말을 듣겠습니까?”

“그건 제가 듣게 만들면 되는 일입니다.”

피트는 한 장의 서류를 내 앞으로 슥-하고 밀었다.

“이름은 호레이쇼 넬슨. 지중해 분견함대 함대장. 프랑스 깃발을 달고 말 안 듣는 불곰을 교육해줄 친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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