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2화 잠자는 사자들 (2) (172/341)

잠자는 사자들 (2)

45만 파운드.

현재 가치로 환산한다면 약 3,375억 원에 달하는 거액이며, 지금 가치로는 18세기의 항공모합 급 전략무기인 1급 전열함 두 척을 진수시킬 수 있는 돈.

그 돈을 프랜시스 베어링은 10년 간 전 세계에 아낌없이 풀었다.

전 세계 금융가들이 몰려드는 런던.

러시아 제국의 심장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스페인 왕국의 수도, 마드리드.

신성로마제국령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심지어는 미국 보스턴에 이르기까지.

맛있는 고기 냄새가 나는 밥그릇에는 배고픈 들개들이 몰려들었고, 유능한 프랜시스 베어링은 고기를 뜯어먹는 들개들의 목에 살포시 목줄을 걸어주었다.

“실로 오랜만에 뵙소. 아미고(amigo, 친구).”

“···저희가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던 거 같습니다만.”

“무슨 소리? 우린 같은 한 지붕 아래 사는 사이 아니오? 베어링이란 지붕 말이지.”

“···.”

“뭐, 우리 친애하는 아미고께서 좋던 싫던 현실은 변하지 않으니 참··· 안타깝구료? 허허. 실로 잔혹한 세상이야.”

“굳이 시덥잖은 말로 신경만 긁을 거라면, 그냥 갈길 가십시오.”

누가 놓았는지 모를 고기를 실컷 뜯어 먹은 후, 그제서야 자기들의 목에 낯선 줄이 걸려있다는 걸 깨달은 들개들은 낑낑거리며 저항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목줄이 걸린 줄은 더 조여만 올 뿐.

“어르신이 내리는 명령이오.”

“···저와 제 상단이 뭘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어르신께서 프랑스와의 전쟁을 원하시오.”

“프랑스와 전쟁이라니, 지금 미친 겁니까?!”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건지 모르겠군. 자네가 장사치라면 대포를 만드는 청동을 어디서 사서 어떤 창고에 쟁여놓을까 걱정할 일이지, 전혀 화낼 일이 아닌데 말이야.”

“애당초 우리 스페인이 프랑스를 어떻게 이깁니까!”

“쯧. 대전략은 어르신이 짜는 거요. 당신 같은 말단이 생각할 게 아니란 말이외다. 왜 주제넘은 짓을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군?”

결국 저항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들개들은 싫던 좋던 주인의 말을 아주 잘 듣는 사냥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근시일 내에 마누엘 고도이(Manuel Godoy y Álvarez de Faria, 스페인 왕국의 재상)와 만나 보겠습니다.”

“아주 좋소. 어르신께서도 기뻐하실 거요. ···아. 그러고 보니 하나 잊고 있었군.”

“···이건 뭡니까?”

“고도이 그 자가 금을 아주 좋아라 한다지? 꽤 넉넉하게 넣어놨으니 당신이 적당히 몇 개 빼먹고 고도이에게 주시오. 잘 부탁드린다는 말도 같이.”

그 주인은 실로 오랜만에 사냥개들을 향해 임무를 내려주었다.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궁전.

“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또 시작이다. 또. 이게 대체 몇 번째인가. 나이가 예순을 훨씬 넘으니, 노망이라도 생긴 건가?

오스터만 공작은 속으로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꿋꿋하게 입을 열었다.

“이제 막 병합한 폴란드에서 반란군이 아직도 곳곳에서 항전하고 있사옵니다. 전선을 두 개로 늘리는 것은 결코 이익이 되는 일이 아니···.”

“오스터만 공작.”

그러나 차르, 예카테리나는 듣기 싫다는 듯 젊은 신하의 말을 잘라버렸다.

“예, 차르 폐하.”

“저번에도 경은 전선이 두 개니 뭐니 하면서 짐의 말을 가로 막았지. 그래서 지금 결과가 어떻게 되었소? 빌겔름(Вильгельм, 기욤의 러시아 이름) 그 자가 세치 혀로 우리의 동맹 영국을 흔들고 있소!!”

예순 넷의 여제는 미간을 찌푸리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자기가 섬기는 국왕을 두 번이나 세치 혀로 끌어내린 놈이오. 다음에는 프로이센, 이탈리아, 신성로마제국을 제 편으로 돌려놓을지도 모르지!

그 때 가서는 우리가 폴란드를 정리했다고 해도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소! 지금이 그 놈의 싹을 밟을 마지막 기회나 다름없다는 말이오!”

“···허면 폐하께서는 어디를 공격 하실 생각이시옵니까?”

“우리 러시아 제국의 건재함을 영국이 알게 해야 하오.”

여제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천천히, 그러나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군주로서의 위엄을 떨치기 위한 오랜 습관이었다.

“보스포로스 해협을 통과하여 프랑스령 코르시카를 치겠소.”

“예?”

“경은 예전 발트 함대 사건을 기억하고 있겠지?”

“···그걸 어찌 잊겠나이까.”

이 미친년아.

오스터만 공작은 차마 마지막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도로 삼켰다.

예카테리나 여제가 과거 발트 함대를 영국의 급소인 북해를 거쳐 지중해로 보낸 그 천하의 미친 짓을 잊는다면 그 어찌 러시아의 관리라 하겠는가.

거창한 이유라도 있었다면 모르겠으나, 러시아가 그런 미친 짓을 한 건 그냥 여제의 땡깡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다.

잉잉, 날 좀 봐줘요. 내 말 안 들어주면 떼 쓸 거야!

그것 때문에 당시 주재 영국 러시아 대사가 수없이 사과하고 관리 모두가 ‘우린 그럴 의도가 없었어요, 제발 살려주세요.’라는 서신을 연일 런던으로 보내지 않았는가.

“그때와 같소. 우리 러시아가 건재하다는 걸 영국에게 보여주어 동맹관계를 다시 굳건하게 굳힌다면···.”

‘미친년, 아주 제대로 미친년.’

두 손을 불끈 쥐며 위풍당당하게 외치는 여제의 발 밑 아래에서, 오스터만 공작은 어서 빨리 시간이 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데굴데굴 굴릴 뿐이었다.

보통 자신이 이 정도 시간을 끌면 좌중에 있는 대신들이 나와 여제를 달래주는 게 이 궁전의 오랜 관습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무언가 이상했다.

‘왜, 재무부와 상법부 대신이 아무 말도 없단 말인가?’

오스터만은 슬쩍 고개를 돌려 두 부서 쪽을 쳐다보았다.

이상했다. 자신과 마주친 두 부서의 장이 왜 시선을 피하지?

아, 이제야 나서는구나. 다행이다.

아직 이 궁전에 머리가 제대로 달려 있는 사람이 자신만 있는 건 아니었다.

“저희 상법부에서 알아낸 것이온데, 최근 스페인의 국왕이 국무회의에서 보인 생각 또한 차르 폐하의 뜻과 같다는 첩보가 있었사옵니다.”

“뭐? 상법부 장관, 그게 무슨 소리···.”

“오오!! 역시 아직 유럽에는 머리가 제대로 달려 있는 군주가 있었도다! 실로 신께서 세상을 버리시지 않으셨구나!”

그게 무슨 소리야. 안돼. 안된다고.

“지금이야말로 성전(聖傳)을 개시할 때가 왔노라. 폴란드에 나가있는 총사령관 수보로프를 수도로 부르고 키예프와 노브고르드에서 정예병을 엄선하여 그의 손에 쥐어 주거라.

또한 크림 반도에서 언제든지 해군이 발진할 수 있게 표도르 우샤코프(Fyodor Fyodorovich Ushakov, 흑해 함대 사령관) 제독에게 연락을 취하라!”

오스터만은 그만 정신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

1793년 7월 14일.

바스티유로부터 딱 4년이 지난 오늘.

마침내 피트의 마수에서 벗어난 나는 정치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이제 나에게 남은 일은 사업이 조금 더 잘 이 땅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잡일 좀 하고, 이삭의 민족 영국 지사를 맡길 만 한 사람을 골라 임명한 후, 파리로 돌아가면 되었을 터였다.

그래. 그랬을 터였다.

“저희 포츠머스 조선소의 위용이 어떻습니까, 각하! 전열함을 무려 세 척씩이나 수리할 수 있는 거대한 군항입니다!”

“아아아아주우우 멋집니다. 하하하.”

“이건 우리 왕립 해군의 병기를 담당하는 조병창입니다. 원래는 아무나 보여드리는 게 아니지만, 총감께서는 특별하신 분이니까요. 하하하!”

“저어엉마아알 대애애단하군요오오...”

와아, 슷고이. 하라쇼. 원더풀. 싸랑해요. 욘애가중계.

젠장, 미치겠다. 이렇게 입 터는 것도 한두 번이지. 매일같이 입에 쥐가 나도록 극찬에 극찬을 해야 하다니. 이제는 더 이상 입에서 나올 미사여구도 없단 말이야.

해군과의 관계가 너무 깊어졌기 때문일까.

나는 피트의 마수에서 해방되기가 무섭게 ‘귀빈에게 왕립 해군의 위대함을 보여드려라.’는 저비스 제독의 명령으로 인하여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지고 말았다.

물론 몸은 힘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

초대장에 하트는 아니더라도 금박까지 씌워서 전해주는데 이걸 매몰차게 거절하면 이 사교의 시대에 내 평판과 사업에 해를 끼칠 수도 있지 않겠나.

이 자식들이 지금이야 나 같은 외국인에게 하하호호 웃으며 대접해줄지 몰라도, 어디선가 삐걱거리기 시작하면 도로 차가워질지 모르는 일이다.

이참에 호감도작을 해놔야, 나중에 혹시나 모를 일을 방지할 수 있을 터.

흑흑, 내 몸아 미안해. 주인님을 위해 조금만 더 버텨줘.

“아, 해군경께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번 주말에 혹시 같이 사냥을 나갈 생각 없으신지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사냥이라, 저야 좋지요.”

“예. 알겠습니다, 각하. 아. 그런데 말입니다...”

“음? 뭔가 더 물어보실 게 있습니까?”

“혹시 지금 주식 중에 살만한 거 있는지요?”

“이야, 마침 딱 이삭의 민족이라고 이제 막 상장하는 게 있는데···.”

뭐, 사실 나쁜 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무럭무럭 자라나, 나중에 영국 왕립 해군의 제독이 되실 수도 있는 예비 VIP들과 관계도 좀 트고, 이참에 내 사업에 발 푸우욱 담그게 해서 내가 탄 배에 태울 수도 있고.

모종의 일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 양국 관계가 험악해지면 이 친구들은 나랑 같이 빠져죽기 싫어서라도 그 관계를 개선해주지 않겠나.

“그러고 보니, 하디 대위님.”

“예. 각하.”

“저번에 제가 말씀드린 거 기억나십니까?”

“해군 장교들이 함상생활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거 없냐는 질문 말이십니까?”

“예. 그거요.”

“흐음.”

게다가 이렇게 공짜로 아이디어 뱅크로 쓸 수도 있고 말이야. 여러모로 좋은 점도 있었다.

“오래 함상에서 먹고 자고 하다 보면, 꽤나 생활이 지겹긴 하지요.”

“지겹다?”

“그렇습니다, 각하.”

하디 대위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 말했다.

“바다가 예쁘긴 하지만, 솔직한 얘기로 딱 일주일 배 위에서 지내면 그 감정도 다 사라져버리고 만답니다. 그 쯤 되면 바다가 아름답기는커녕 보면 답답할 뿐이지요.

그런데 우리 해군은 한 번 항구에서 출항하면 근 두 달에서 세 달을 망망대해에서 보내지 않습니까? 처음에야 포도주나 위스키 같은 비싼 술을 가지고 내기도박을 하며 시간을 때우지만, 그 짓도 한 이주 있으면 질려버립니다.”

음, 듣고 보니 그럴 법도 하다.

“항해 막바지 가서는 아무런 의식도 없고, 목적도 없이 공허해진 마음으로 카드나 칠뿐입니다. 무의식적으로 그런 거라도 안하면 사람이 아주 돌아버리거든요.”

“다른 놀 거리는 없습니까?”

“···체스?”

끔찍하군. 두 달 동안 카드 아니면 체스라니.

해군 장교들은··· 망망대해에서 지들끼리 가지고 놀게 필요해요···.

놀 거리라. 놀 거리.

컴퓨터야 언감생심이고, 라디오, 핸드폰은 말도 안 되고.

잠깐만, 이거 어디서 나도 경험해본 거 같은데.

GOP시절 황금마차가 안 오는 날에는 내가 뭘 하고 놀았더라?

···보드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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