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사자들 (1)
1793년 7월 3일.
런던.
“이야아! 부어라!! 마셔라!!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 거야!”
“아까 대법에서 나오는 동인도 회사 놈들 얼굴 보셨습니까? 욕심으로 뒤룩뒤룩 살찐 놈들 말입니다! 이번에 그 돼지 놈들 기세가 팍 꺾인 걸 보니, 아주 속이 시원합니다 그려!”
“국왕 폐하 만세! 토리당 만세!”
“““만세! 만세! 만세!”””
근 20년 간 티격태격한 끝에, 휘그당의 턱 밑에 제대로 어퍼컷을 돌려준 토리당은 축제 분위기가 한창이었다.
“기욤 총감, 오셨군요! 하하하!”
“거··· 부르셔서 오긴 왔지만. 피트 수상님, 굳이 절 이렇게 부를 이유가 있으십니까?”
이건 뭐랄까... 약간 티배깅? 조리돌림? 깐데 또 까는 그런 느낌인데.
“물론 우리 기욤 총감께서 우리 토리당와 휘그당 사이에서 확고한 중립을 지키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결혼식 같은 잔칫날 초대 받았다고 생각하십시오. 하하!”
“예에...”
“자, 그러지 말고 건배하시죠! 건배!”
음. 알겠다. 내가 이렇게까지 얘기했는데 저러는 걸 보면. 피트 당신, 진짜 쓰러진 휘그당 시체 위에서 조리돌림을 하고 싶었구나?
하여간 아주 심성이 글러먹은 어른이야.
아마 피트가 21세기에 태어났으면 명절 날 조카들이랑 게임할 때 한 판을 안 져주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그러면 전 이만.”
“아니, 벌써 가시렵니까? 연회는 이제 시작인데요!”
“정치와 담 쌓은 저는 그냥 아는 분들 눈도장만 찍고 가렵니다.”
“에이, 조금 더 있다가 가시지요!”
음. 이 고약한 사람을 어떻게 떼어낸다.
“거, 오랜만의 휴일이라고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마시죠. 어차피 내일 또 업무를 보셔야하지 않습니까. 업무 말입니다.”
“제기랄. 윌버포스 그 녀석에 이어서 기욤 총감까지 그 얘깁니까? 동업자를 골려먹는 법을 아주 자알 알고 계시군요.”
윌리엄 피트는 그 말을 하고 아차-하는 얼굴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총감, 혹시 시간 있습니까?”
“또 무슨 일을 시키시려고요? 전 이제 안할 겁니다, 안할 거라구요.”
“그러지 말고 사람 하나만 만나주시죠. 총감의 팬입니다. 팬.”
피트는 그러면서 내 귀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입을 열었다.
“10년짜리 그거 말입니다. 사실 성문(成文)은 아닌 거 아시지요?”
이런 개새끼 맙소사. 당신이 사람입니까? 휴먼?
“하하하!”
“하. 하. 하. 정말 재미있네요. 따아악 10분만 내드리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총감!”
윌리엄 피트는 나는 연회장 어디에 있는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 방 안에는 피트와 비슷한 나이대의 남성이 꽤 긴 담배 파이프를 입에 물고 피우고 있었다.
“피트, 벌써 다 마신 겐가?”
“윌버포스. 자네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그렇네.”
“반갑습니다. 프랑스 혁명왕국 전 재무총감 기욤 드 툴롱입니다.”
“기, 기욤 드 툴롱! 안녕하십니까! 전 토리당 의원 윌리엄 윌버포스입니다! 귀하의 활약을 얼마나 감명 깊게 보았는지!”
그, 그래요? 아주 광팬이시네.
그런데 무슨 냄새 안 나시나?
“실례지만 혹시 이상한 냄새 안 나십니까?”
“냄새라니요?”
이게 무슨 냄새지? 꽃 냄새도 아니고, 뭔가 달짝지근하면서... 처음 맡아보는 냄새인데?
"아! 아마 제가 두통 때문에 피우는 약 때문에 그럴 겁니다. 이거 좀 쑥스럽군요."
"약...이요?"
윌버포스는 되묻는 나를 향해, 자신이 피우던 긴 담뱃대를 보여주었다.
***
“아니야, 독점권 회수라니! 그럴 리 없어! 선선대 국왕이신 조지 1세 폐하께서 내려주신 성스러운 권리란 말이야!”
부정.
“게다가 회사 장부를 들여다보겠다고!? 그건 사유재산 침해요! 민간인 사찰이란 말이야!!”
분노.
“그, 그러지 말고 우리 타협합시다! 타협! 사실 제가 생각해도 500톤 세금 법을 어긴 건 중대한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500톤 넘는 배를 499톤이라고 속이고 세금을 피하지 않겠으니 다시 한 번만 협상 테이블에 앉아주면 안되겠습니까!? 제가 이렇게 빌겠습니다!! 제발!!”
협상.
“···총재님께는 어떻게 설명한다? 아니. 설명이고 자시고 간에 내 목숨을 부지할 수는 있는 걸까? 이러다가 한밤 중에 검은 보자기에 싸여서 템즈 강에 던져지는 거 아니야?”
우울.
“다 끝났어. 다 끝났다고. 우린 다 프랜시스 베어링 그 양반한테 뒈질 거야. 어디서 비명횡사하기 전에 유언장이나 써야겠군. 흐흐...”
수용.
갑작스러운 현실을 받아들이는 5단계를 충실히 거친 동인도 회사 대표단은 퀭해진 눈으로 웨스터민스터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총재, 프랜시스 베어링이 내려준 목표 수십 개 중 단 하나만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으니 대표단의 완벽한 패배였다.
그래 참패였다. 참패.
아니다. 이게 겨우 패배라고 퉁칠 수 있는 일인가?
그 막강했던 스페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마저도 뭉개버린 찬란한 동인도 회사 역사에 검은 줄을 자신들의 손으로 그어버렸으니, 아마도 오늘 웨스터민스터에 온 동인도 회사 대표단의 이름은 길이길이 동인도 회사원들에게 씹힐 것이다.
“···이제 어쩔 거요?”
“어쩌다니 뭘.”
“씹히는 건 씹히는 거고, 일단 살아야하지 않겠소?”
뭐, 사실 자기들이 귀족도 아니고 이름 좀 씹히면 어떤가? 일단 목숨 줄을 부지해야 하지 않나.
“우리가 딱 하나 지켜낸 게 있지 않소. 그거라도 머리로 존나게 굴리면 어떻게 해서든 살 방법이 나오지 않겠소?”
“···이 마차에 계산기 있습니까?”
“암. 없을 리가 없지.”
웨스터민스터에서 시티 오브 런던까지 이동하는 길.
마차에 탄 동인도 회사 대표단의 손이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
“송구합니다, 총재님!”
“음? 송구?”
“저희가 미흡하여 회사에 크나큰 손해를 끼치고 말았습니다!”
“아, 그 얘기였나? 뭐, 자네들이 실수를 하긴 했으나 그게 그렇다고 대세를 바꿀만한 잘못은 아니었네. 이건 상대가 누구였더라도 못 막아.”
왕립 베어링 은행의 총재이자 동인도 회사의 이사회 최고이사.
프랜시스 베어링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무릎을 꿇고 애걸하는 대표단에게 말했다.
그런 총재의 말에 대표단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총재께서 우리를 내치지는 않으시려는 건가?’
‘살았다. 적어도 템즈 강에 사는 장어 밥이 되지는 않겠구나!’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음으로 날아오는 총재의 싸늘한 말 한 마디에 모두는 다시 온몸의 털이 쭈뼛쭈뼛 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보다도, 그게 끝인가?”
“···예?”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히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 동인도 회사가 인도무역독점권을 잃었고 곧 재무부에서 회계감사까지 들어올 예정이란 게 자네들이 웨스터민스터까지 가서 겨우 얻어온 정보라는 건가?”
“아, 아닙니다. 총재님!”
“그러면?”
“총재님께서 언질을 주신 아편 무역독점권은 사수해냈습니다.”
“아편 무역독점권이라.”
프랜시스 베어링은 텅 빈 잔에 위스키를 쪼르르 따르며 읊조렸다.
“그건 낭보로군. 허면 나머지는?”
“그, 그것은...”
서슬 퍼런 총재의 앞에서, 대표단은 잠시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나머지를 지켜내지는 못했습니다만. 인도와 중국으로 향하는 아편 무역 규모를 최대로 확대하고 파트나(Patna)와 가지푸르(Ghazipur)에 있는 농토를 모두 아편 밭으로 개간하면 현재 수익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파트나, 가지푸르. 음.”
동인도 회사가 점유한 뱅골 근처의 거대한 평야지대. 파트나와 가지푸르.
총재 또한 그 두 지역의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아니, 그곳에 거대한 아편 밭을 만드는 것도 사실 기전에 이사회에서 나돌던 안건이었으니. 사실 이 패배자들의 입에서 나온 것도 썩 새로운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항상 그 안건은 이사회에서 부결되고 말았는데.
그 거대한 평야지대를 온통 아편 밭으로 만든다면 뱅골에 사는 주민들의 식량은 어떻게 댈 것인가. 그것이 바로 이사회에서 그 안건이 부결되던 주된 문제였다.
“자네들도 그걸 알고 있을 텐데, 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셈인가?”
“아일랜드에서 나오는 감자로 식량을 조달한다면 손해를 조금 볼지언정 해결자체는 가능합니다. 또한 지금 튀르크 인들이 스미르나(Smyrna)에서 아편을 싸게 팔고 있으니 그걸 떼어다가 중국에 납품하면 식량 문제도 덜 수 있습니다!”
“호, 상당히 구체적이군. 현실성도 있고.”
총재는 잠시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아편 건은 자네들에게 위임하겠으니, 이번 일을 양분 삼아 더 성심성의껏 일하게.”
“““감사합니다, 총재님! 감사합니다!!”””
방금 전 까지 쓰레기라도 주워 먹은 것 마냥 썩었던 대표단의 얼굴이, 살았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삽시간에 밝아졌다.
“아, 그런데 말이야.”
총재는 따라놓은 위스키를 입 가까이 가져갔다가, 가만히 읊조렸다.
“우리 뒤통수를 걷어찬 놈, 기욤 그 프랑스인 말이네.”
“기욤이라면, 그 프랑스 재무총감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 작자 말이, ···설마 자네들 아직도 우리 뒤통수를 누가 걷어찼는지 모르는 건가?”
쯧쯧.
총재는 혀를 끌끌 차며 말을 이었다.
“정확하게 그 자의 행적과 우리가 얻어맞은 루트가 겹친다네. 게다가 동기도 충분하지.”
“동기라니요?”
“조사해보니 우리 런던 사무소에 한 번 들린 적이 있었네. 사업 건으로. 바가지를 꽤 크게 썼더군.”
말을 끝낸 베어링은 잔에 담긴 위스키를 순식간에 목 뒤로 넘겼다.
“후우. 우리도 한 번 맞아줬으니, 한 번 때려줄 차례 아닌가.”
“···어디부터 시작하면 되겠습니까?”
“기욤 드 툴롱이 저번에 깜둥이들을 자기와 같은 프랑스 국민으로 받아들였다지?”
“그렇습니다.”
총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세계지도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는 잠시 세계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손가락으로 서인도제도에 해당하는 지역을 톡톡 두들겼다.
“여기가 어딘지 아나?”
“프랑스령 생도맹그입니다, 총재님.”
“그러면 이곳은?”
이번에는 손을 아주 조금 움직여, 생도맹그를 일자로 지나는 국경선을 넘은 한 섬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스페인 부왕령 생도맹그입니다.”
“내가 높으신 스페인 왕족이라면, 깜둥이들이 국경너머에서 자유니 뭐니 운운하는 걸 보노라면 상당히 불쾌할 것 같은데.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비록 스페인이 프랑스의 국력을 두려워하고는 있지만, 거대한 러시아가 자신과 함께 서준다면?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드리드. 우리 높으신 왕족들께서 콧김을 내뿜으실 정도로 부채질 해보게. 이럴 때 쓰라고 연락선을 만들어 놓은 거 아닌가.”
“예. 총재님.”
10년에 가까운 시간과 45만 파운드에 달하는 거액이 들어간, 전 유럽을 연결하는 베어링의 연락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