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다스의 손 (4)
예전에. 그러니까 내가 한강에 다이빙하기 전, 대한민국의 평범한 20대 초반 대학생으로 살아갈 적에.
이제 갓 군대를 전역한 친구들과 호프집에서 만나 치킨에 맥주를 곁들이면 항상 나오는 얘기들이 있었다.
“야, 우리 부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 대대장이 완전 진급에 눈 먼 놈이라 한 달에 훈련만 일곱 번씩 걸렸다 진짜.”
“아잇 씻팔, 하루에 네 번씩 산꼭대기 위로 20미리 발칸 탄약통 날라볼래?”
“참나. 니들 북한군 눈으로 직접 본 적 있냐? DMZ 본 적 있냐고. DMZ에서는 하늘 위에 거대 독수리 괴물이 날아다닌다니까?”
그렇게 모두가 끔찍했던 2년간의 강제징집 경험담을 늘어놓노라면, 항상 서글프게 고개를 젓던 친구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중에서는 네가 유일하게 해군 아니냐? 왜 아무 말도 없어?”
“왜긴. 기억하기도 싫으니까 그러지 임마. ···너희들 군함 무기고에 왜 소총 말고도 산탄총이 비치 되어있는지 아냐?”
“글쎄. 우리는 모르지?”
상상만 해도 진저리가 난다는 듯 안주도 없이 연신 보리 음료수만 들이키던 친구는 우리를 보고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수병들이 선상반란 일으킬까봐.”
쉴 새 없이 파도 때문에 출렁거리고 숨이 턱턱 막히는 40도짜리 기관실에서 삽질하는 경험.
영하 20도짜리 바닷물에 얼굴을 담그며 견시를 보는 경험.
그 와중에 몇몇 높으신 정치인들께서 부식비를 깎으려 든 경험.
매콤하다 못해 청양고추, 아니 캐롤라이나 리퍼를 넘어서는 참수리 함 기관실 운용병의 경험담에 우리는 모두 겸허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말았다.
그날의 경험을 돌이켜보고 내가 깨닫게 된 점이 두 가지 있었는데, 첫째는 아들을 낳으면 절대 해군에는 보내지 말아야겠다는 점이고.
둘째는 내가 장교라면 되도록 수병들의 편의를 봐줘야겠다는 점이었다.
“흠. 병사들과 같은 곳을 써야한다니, 혹시 장교용 가게를 따로 건설하실 계획은 없습니까, 총감님?”
“···어떻게 아직 목이 붙어 있는 거지?”
“죄송합니다, 총감님. 제가 아직 프랑스어가 미숙해서 그리 빠르게 말씀하시면 잘 알아듣기가 어렵습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영어로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안타깝게도 아직은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하기야 이런 건물을 또 지으려면 한 푼 두 푼 들어가는 게 아니시겠지요.”
내 말을 들은 토마스 하디 대위는 퍽 아쉽다는 듯 말했다.
이야... 만약 프랑스인이었으면 어딘가에서 뒤통수에 죽창 맞았을 그런 발언인 걸? 이렇게 귀족정신 투철한 위인은 또 오랜만에 봤네.
“···왜 그러십니까?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는지요?”
“아니요. 어서 갑시다.”
“예, 총감님.”
극장주인 윌리엄 피트가 기획한 연극에 참여하는 대가로 얻어낸 뽀찌는 달달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이제부터 하기 나름이지만 조건부로 10년 면세에, 생필품을 독점적으로 수병들에게 공급할 수 있다니.
수병들에게 첫인상만 확실히 준다면 적어도 10년 간, 아니. 영국 해군이 갑자기 메테오를 맞고 소멸하지 않는 이상은 내 지갑을 넉넉하게 채워줄 그런 사업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이곳이 총감님께서 말씀하신 PX입니다.”
“안내 감사합니다.”
하디 대위가 데려다준 PX는 사각형 모양의 목조 건물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나무를 쓰신 겁니까? 돌을 이용하면 더 웅장하고 아름답게 지으실 수 있을 텐데요.”
“고객들에게 맞춰야지요.”
“고객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는 하디 대위를 골똘히 생각하라고 내버려둔 채, 궐련을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대위님은 심성이 곧디 곧은 군인이라 잘 모르실 수도 있겠지만, 본디 사람은 자기와 비슷한 분위기를 좇는 경향이 있답니다.”
“···흐음. 그렇습니까?”
“물론이지요. 대위님도 방금 전 제게 수병용 가게와 장교용 가게를 따로 마련하는 건 어떻냐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아.”
“PX를 이용하는 절대 다수의 고객은 수병들입니다. 그런데 값비싼 대리석을 가지고 PX를 만든다? 대부분의 수병은 가게에 들어가길 꺼리지 않겠습니까.”
“한낱 수병들의 마음까지 꿰뚫으시다니, 역시 총감님의 금전감각이란 대단하십니다!”
“···하하.”
나는 조금 남은 궐련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구둣발로 밟아 꺼트렸다.
21세기 강철군함에 타던 수병들도 마음속에는 죽창을 하나씩 깎고 있었는데, 과연 18세기의 칙칙한 나무군함에 탄 수병들의 마음속에는 죽창이 몇 자루나 들어있을까.
“하디 대위님. 지금 시간이 몇 시죠?”
“이제 곧 오전 8시입니다.”
“곧 개장하겠군요. 볼일 볼게 있으시다면 먼저 가셔도 좋습니다. 전 개장하고 조금 더 있다 가겠습니다.”
“예, 총감님.”
나는 저 멀리 사라지는 하디 대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궐련 한 개비를 더 입에 물었다.
“쓰읍. 후우.”
역시 귀족 친구들하고 어울리는 건 쉽지 않아.
***
오전 9시.
이제 막 문을 연 PX는 과장 좀 보태서 파리가 날리고 있었다.
뭐, PX라는 개념자체를 처음 선 보이는 건데 첫술부터 배부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1시간 동안 두 명 왔다간 건 조금 심했지.”
어느새 안을 다 비워버린 답배갑을 바지 주머니에 구겨 넣은 후, 나는 PX라고 쓰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PX안은 우리가 흔히 군대에서 보던 그 ‘충성클럽’과 비스무리하게 생긴 형태였다.
뭐, 라면 대신 건어물이라던가, 수건대신 아마천이라던가. 몇 가지 품목이 달라지긴 했지만 대게 엇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충성클럽과 다른 게 있다면 매대에 있는 사람이 알바자리를 찾는 대학생이나 군관병이 아니라 꼬마들이라는 거.
“어? 플로렌스 아저씨 위에 있는 아저씨다!”
“이 멍청아, 사장님이라고 불러야지!”
“얘들아, 사장님 오셨어!”
제기랄. 아직 창창한 20대 초반인 나보고 아저씨라니, 플로리앙 씨가 직원교육을 아주 개판으로 시켜놨구만.
“직원 여러분. 지금 오픈한 지 얼마나 됐죠?”
“저요! 9시 10분이니까, 1시간 10분 됐어요!”
“좋아요. 그러면 그 동안 손님이 몇 명이나 왔다갔죠?”
“““두 명이요!”””
“아니. 그걸 아는 녀석들이 여기서 이러고 있니?”
“하지만 손님들이 안 오는 걸요?”
젠장.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할까.
런던 증권거래소에 디도스를 날리는 겸해서 알바를 시킨 꼬맹이들은 ‘이 애들을 다시 그 위험한 공장으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라고 내게 말한 플로리앙 씨와 그 뜻에 공감한 나로 인해 우리 신생 PX의 직원으로 취업하게 되었다.
목숨을 걸고 칼날이 돌아가는 방적기 밑에서 일하던 아이들은 단순히 물건 값만 받으면 되는 일이니 좋고, 나는 직원 채용에 대한 부담을 덜고.
이야, 정말 잘된 일이에요. 그렇죠? 기왕 잘되는 김에 저까지 잘되면 더 좋을 텐데 말이지요?
“하아. 얘들아, 너희 혹시 역할분담은 했니?”
“어, 정하긴 했는데...”
“했는데?”
“공장은 몰라도 가게에서 일해 본 애들이 없어서요...”
미치겠네.
“···에이씨. 안 되면 플로리앙 씨 월급에서 좀 까지 뭐. 자, 얘들아? 혹시 구두닦이나 신문 팔아 본 사람?”
“저요!”
“저도 있어요!”
“좋아, 너희 둘이 호객을 맡는다. 알겠지?”
나는 벽에 걸린 달력을 잡아 찢은 후 확성기마냥 말아 두 아이에게 건네주었다.
“나머지는 매대를 정리하자. 씹을 거리와 음료수는 계산대 앞으로, 사람들이 많이 사가는 옷감이나 생필품은 코너마다. 알겠지?”
“““네!!!”””
참 다행스러운 건, 그래도 애들이 차디 찬 런던 길바닥에서 생활한 게 있다 보니 말은 따박따박 잘 알아듣는다는 거다.
“아까 시계 볼 줄 안다는 녀석이 누구였지?”
“저요!”
“네가 계산대를 맡아라. 지폐를 바꿔주는 일이니 느려도 정확하게, 하나씩 하나씩 해야 된다?”
소문이 쏜살같이 퍼지는 군대 특성상, 딱 한 번.
딱 한 번만 제대로 마케팅하면 된다.
***
“자, 싸다 싸!! 프랑스 앙주에서 온 아마천이 단돈 10실링!!”
“프랑스 포도 특산지, 툴롱에서 온 와인 한 병이 단돈 5실링!! 도수가 높은 걸 좋아하신다면 코냑도 있어요!!”
“담배도 있어요! 파이프, 궐련, 막담배까지!”
“···병영에 웬 꼬맹이들이지?”
한참 총을 손질하던 HMS 빅토리의 수병, 에드워드는 난데없이 들려오는 호객소리에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아, 저번에 PX인가 뭔가 하는 이상한 건물을 올리던데 그건가 봐.”
“···PX? 그게 뭔데?”
“병영 내 매점이라던가. 여러 생필품을 판다던데.”
“생필품?”
에드워드가 되묻자, 동료 수병은 고개를 끄덕였다.
“꼬맹이들이 말하지 않나. 아마천, 포도주. 뭐 그런 거 파는가 보지.”
“···그래?”
“왜? 가보려고?”
“아니 좀 궁금하잖나.”
“궁금은 무슨, 프랑스 포도주 맛이 궁금한 거겠지.”
킬킬거리며 웃는 동료의 말에 정곡을 찔린 에드워드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올 때 내 것도 한 병!”
“지랄.”
에드워드는 입에서 걸쭉하게 욕을 뽑아내고 손가락 두 개를 브이로 만들어 동료에게 흔들어 주었다.
분명 처음 입대했을 때는 이렇게 입이 거칠지 않았던 거 같은데. 나날이 늘어가는 욕 실력에 에드워드는 그저 제 처지가 안타까울 뿐이었다.
덜커덕.
“내의에 쓸 천을 사러왔는데. 혹시 팔고 있···.”
뭐지.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어서옵쇼! 뭘 도와드릴까요, 손님?”
“···어른은 없니?”
“어... 아직 없어요. 그래도 물건은 살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 그렇구나.”
에드워드는 열 살 남짓한 꼬마의 당찬 말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포도주 두 병만 주겠니?”
“포도주 두 병이요! 네, 알겠습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제 팔뚝길이 만한 포도주를 꺼내 매대에 올린 꼬마는 에드워드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이건 뭐니?”
“그 뭐냐, 우리 사장님이 주신 건데. 거기에 도장을 스무 개 모으면 한 품목을 반값에 사게 해준데요!”
“뭐?”
“포도주 두 병이니까 도장 두 개 찍어드릴게요!”
“···어, 어. 그래...”
수병, 에드워드는 계산대에 선 꼬마가 도장을 두 번 찍는 걸 그저 넋 나간 표정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
2주 뒤.
“아마천 두 덩이!! 빨리 결제해줘!”
“난 포도주 세 병!! 도장 다 모았으니 한 병은 반값으로 하는 거 알지?”
“예, 예. 알겠습니다!”
계산대를 맡은 10살짜리 직원, 존은 오늘도 앙증맞은 손을 열심히 놀리고 있었다.
그런 존만큼 다른 친구들도 매대가 비기가 무섭게, 서둘러 창고에 있는 물건을 끌차로 옮겨 매대에 다시 채워 넣고 있었다.
땀을 방울방울 흘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미소를 잃지 않았다.
공장에서 자기 위에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칼날을 보며 일하다가 이렇게 안전하게 일하다니. 그 누가 미소를 잃겠는가.
물건들 중에서 존과 친구들이 들기에 너무 무거운 건, 아침마다 우디노인지 하는 떡대 아저씨들이 와서 대신 매대에 올려주니 존과 친구들에게 남은 건 고객들에게서 제대로 돈을 받아내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 오늘도 런던 첼시 항의 PX에는 활력만이 감돌고 있었다.
***
1793년 7월 중순.
“···따라서 본 대법은, 윌리엄 피트 수상과 프라이스 세무회계법인이 송사한 동인도 회사 인도무역독점권 박탈 안에 관해 5 대 2로 가결하는 바이다. 또한 동인도 회사가 가진 회사권을 잠시 정지하고 재무부 부정감시과에 한하여 감사를 허가한다.”
땅, 땅, 땅.
“이럴 리가 없어! 이럴 리가!!”
동인도 회사의 머리에 드디어 정의의 철퇴가 내리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