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다스의 손 (1)
“···혹시라도 계획대로 안 되면 손실이 너무 크지 않습니까, 각하?”
“그렇다고 선금을 받고서 일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으음.”
“왜요. 걱정되십니까?”
뵈머 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 창문 너머에서 쏟아지는 햇빛 때문에 그런 뵈머 씨의 얼굴에 음영이 져서, 더욱 그런 뵈머 씨가 초조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걱정하지마세요. 계획대로 다 잘 될 겁니다. 아, 짐으로 챙겨온 ‘선물’ 상태는 어떻습니까?”
“아까 출발할 적에 한 번씩 다 점검을 해봤는데 모두 문제없습니다. 받는 분들께서 아주 좋아하실 겁니다.”
뵈머 씨는 그것만은 확실하다는 것처럼 담담하게 말했다.
“각하, 곧 해군성에 도착합니다.”
“알겠습니다, 마부.”
나는 창문을 살짝 내리고, 저 멀리서 점차 다가오기 시작하는 황색 4층 건물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저기가 바로 오늘 내가 갈 도박장이었다.
***
“식사는 마음에 드십니까, 각하? 저희 해군성 요리사들이 각하를 모시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습니다.”
“아, 훌륭합니다. 식전주(食前酒)부터 메인 메뉴부터 만족스럽기 그지없군요.”
입가를 냅킨으로 닦으며 그렇게 말해주자, 내 옆에 앉은 존 저비스 제독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각하께서 빈말이더라도 이렇게 좋아해주시다니, 저도 마음이 참 좋습니다.”
“빈말이라니요. 저는 진담입니다.”
나는 저비스 제독을 향해 의아하다는 듯이 표정을 짓은 후, 거기에 한 문장을 더 이어 말했다.
“지금 식사가 며칠 전 참석했던 재무부 연회보다 훨씬 낫은 거 같군요.”
“으하하하!! 그렇습니까! 이것 참, 오늘 각하를 초대하지 않았더라면 큰일 날 뻔 했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저비스 제독님 덕에 오늘 호강을 해보는군요.”
나쁘지 않은 반응이다. 아니, 오히려 호의적이라고 보는 게 낫겠어.
해군성 정문에 도착했을 때, 완전무장한 수병들이 쭉 줄지어 서있는 걸 보고 좀 쫄았는데,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보니 내 애간장이 다시 펄떡펄떡 살아나는 듯 했다.
이 시대의 해군은 망치로 내려쳐야 부서지는 쉽 비스킷, 그리고 한 입 먹으면 당장에 고혈압과 뇌졸중이 걸리지 않을까 의심되는 염장고기로 끼니를 때우며 살아가는 마초 중의 상마초들이었다.
그런 해군들의 집합소인 해군성이 보낸 별의별 문자를 내가 근 두 달 동안 철저하다 못해 이 악물고 싸그리 씹어버렸는데 당연히 쫄리지. 안 쫄리면 사람이겠나. 최소한 넌지시 쌍욕 한 마디 먹을 각오는 하고 온 거다.
그렇게 쫄면서 왜 해군성 말을 씹었냐고? 간단하다.
단순하게 해군성에게 초청받아 내가 가는 것보다는, 해군성이 아득바득 이를 갈며 날 불러줘야 외부에서 보기에 그림이 좋지 않나.
‘아, 저 녀석은 딱히 해군 쪽에 관심이 없구나!’ 라고. 덩달아 의심도 덜 살 수 있고 말이야.
그런데 생각해보자. 꼴마초 해군들이 겨우 자기들이 몇 번 무시당했다고 날 쒸익쒸익 대며 불러 주지는 않을 것 아닌가.
본디 뇌에 근육질뿐인 친구들을 골려먹으려면 그 친구의 원초적인 본능을 살살 긁어줘야 하는 법. 나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해군의 코털을 잡아 뽑기 시작했다.
피트 수상에게 퀘스트를 받은 몇 달 간 사교모임에 활발히 참석한 것, 그것도 영국 재무부가 주최한 사교모임은 싸그리 다 참석한 것 모두 이 그림을 위해서 노력하는 과정이었다.
내가 자기들과 앙숙인 재무부가 초청한 건 냅다 달려가서 참석했으니, 결과적으로 내게 완전히 무시당한 해군은 화가 끓어오르다 못해 주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뭐랄까, 회사에서 자기만 빼고 명절선물을 받은 기분이랄까.
결국 내 앞으로 지중해 함대장이자 차기 해군경으로 손꼽히는 저비스 제독이 해군을 대표해 친필 초청장을 쓰게 만들었으니 ‘해군성이 이를 아득바득 갈며 날 초대한다‘는 나의 초기 목표는 달성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이제 범의 아가리 안으로 들어왔으니, 지금부터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 머릿속에 해군만 들어있는 천상군인을 구워삶아야 한다.
나는 디저트를 한 입 베어 문 후, 저비스 제독에게 세치 혀를 나불대기 시작했다.
“아까의 사열식, 정말 멋지더군요. 이 그레이트브리튼에서 이런 식으로 귀빈을 성대하게 환영할 수 있는 곳은 몇 없을 겁니다.”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뭐, 사실 우리 수병들이 한 제식 하기는 하지요!”
“역시 전 세계 바다를 호령하는 로열 네이비(Royal Navy)답습니다.”
열심히 날 위해 준비했을 노력도 좀 칭찬해주고.
“저번에 제가 잠시 타고 왔던 배 이름이···, 빅토리였나요? 그 거대하고 웅장한 전열함 말입니다.”
“음! 우리 해군의 자랑, HMS 빅토리의 매력을 알아주시니 이것 참! 각하께서 보는 눈이 좀 있으시군요. 하하!”
소소하게 물개, 아니 해군의 자존심도 좀 세워주고.
“저비스 제독께서는 어쩌다 해군에 입대하신 겁니까?”
“뭐, 조국과 국왕폐하를 수호하려면 해군이 제격이더군요. 허허. 아, 그러고 보니 각하께서도 군인 출신 아니십니까?”
“육군 소위 출신이죠.”
“이거 어떻게 보면 같은 군인 출신이군요! 어쩐지 책상물림 샌님들과는 다르다 싶었습니다!”
“훌륭한 제독님께서 절 같은 군인으로 봐주시니 기분이 좋군요.”
“아니.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부끄럽습니다! 허허!”
감언이설과 함께 은근슬쩍 같은 군인 출신이라고 어필도 좀 하고.
마침내 저비스 제독의 긴장이나 경계가 다 풀렸을 무렵, 나는 방금 전까지 얘기를 나누던 저비스 제독의 얼굴을 멍하니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왜 갑자기 그리 본관을 보시는지요?”
“아, 잠시 생각을 좀 했습니다. 별 건 아니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시ㄱ···.”
“혹시 궁금하십니까?”
“별로 궁금하지는 않ㅇ···.”
“아니요. 제독님께서 궁금하신 거 같은데, 조금만 얘기해드리겠습니다. 큼큼.”
“···아, 예.”
의아하게 날 바라보는 저 눈동자를 보라.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너무나도 궁금한 표정 아닌가.
나는 혹여 다른 사람들이 들을까봐, 기침을 막듯이 손을 동그랗게 말고 입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밖에서 나도는 소문과 달리 해군도 사람 사는 곳이었군요.”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재무부에서 알게 된 몇몇 인사가 그러더군요. 야만적이다니 뭐다니.”
방금 전까지 환하기 그지없었던 저비스 제독의 얼굴이 불쾌감으로 조금씩 일그러졌다.
“설마 그런 잡스런 놈들이 내뱉는 낭설을 믿으시는 건 아니겠지요, 각하.”
“당연히 아니지요. 그 증거로 제가 이렇게 직접 오지 않았습니까.”
“으음.”
“저도 군인 출신이다 보니 제독님의 마음, 잘 이해합니다. 예산 받기가 얼마나 힘드십니까.”
“···힘들기야 하지요. 국가를 위한 충신의 마음을 몰라주고 그저 돈만 밝히는 녀석들이 바로 재무부 아닙니까.”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나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원래 나는야 퉁퉁이과에 해당하는 이런 친구들은 금새 화났다가도, 매점에서 까까 하나 사주고 등을 토닥여주면서 몇 마디 해주면 금새 화를 풀기 마련이다.
펄펄 화가 끓어오르던 참에 내가 이렇게 간지러운 곳을 살살 긁어주면 좋아 죽겠지.
“총감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본관도 참 가슴이 아리는군요.”
“이해합니다, 하고말고요.”
“···정말이십니까?”
“당연합니다, 제독님.”
구라지.
재무부에서 근무한 사람이 예산 먹을 생각뿐인 군인에게 줄 수 있는 건, 따듯한 동정이 아니라 차가운 불허가 도장뿐이다.
“사실 본관과 해군 장병들은 각하께서 혹여···. 물론 그렇지는 않겠지만. 우리 해군을 괄시하는 건 아닌가 싶었습니다.”
“괄시라니요. 시간이 여의치 않았을 뿐입니다. 하하.”
“역시 마땅한 이유가 있으셨군요!”
상남자, 마초의 극에 달하는 사람이라도 본디 사람인 이상 칭찬과 인정을 마다할 사람은 없는 법.
이 푸른 색 제복을 입은 해군 중장의 입가가 씰룩거리기 시작했으니 계획의 삼분지 일까지는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제독님. 제가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엇인지요?”
“비록 제가 해군성을 이리 늦게 방문했으나,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받고 그저 제독님 얼굴만을 보고 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많은 장교 분들이 저를 위해 이리 준비를 하셨을 텐데, 그 분들께 감사인사라도 나누고 싶군요.”
“아! 그런 거야 당연히 이 저비스 중장이 두 팔 거두고 도와드리겠습니다! 근 시일 내에 해군성 이름으로 사교 모임을 가질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드리지요!”
“감사합니다, 제독님!”
내가 저비스 제독을 향해 손을 내밀자, 저비스 제독 또한 내 손을 맞잡고 흔쾌히 흔들어주었다.
“아,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악수가 끝나자, 나는 양해를 구하고 테이블에 있는 종을 울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각하?”
“제 마차 뒷좌석에 있는 상자를 가지고 와주실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시중을 들기 위해 온 사환은 잠시 후 상자 하나를 내 마차에서 가지고 올라왔다.
“이건 저비스 제독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이게 무엇이지요?”
“우리 이삭의 민족 명품관에서 특별히 제작된 옷입니다.”
“명품관이라면, 샬럿 공주 전하가 끼고 다니신다는 패물을 만든 곳 아닙니까.”
나는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물 삼아 사모님께 드리시면 좋아하실 겁니다. 아, 생각해보니 다음 사교모임 때 입고 오실 수도 있겠군요.”
***
저비스 제독을 만나고 며칠 뒤.
해군성에서 나에게 보낸 초청장을 받고 도착한 연회장은 말 그대로 성대하기 그지없었다. 생각해보니 이게 다 예산 아닌가.
세상에 이렇게 예산을 펑펑 쓰니까 재무부한테 쿠사리를 먹지. 전직 재무총감으로서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각하, 오셨습니까!”
“아. 저비스 제독님.”
우리 두 사람은 서로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우리 안사람이 각하께서 주신 선물을 정말 좋아하더군요! 구하기는커녕 보기도 힘든 걸 어떻게 구했는지 궁금하다고 본관에게 꼬치꼬치 캐묻는 걸 유야무야 넘기느라 힘들었습니다. 허허.”
“사모님께서 마음에 들어다니 다행입니다. 하하.”
“···그런데 손은 왜 그리 떠시는 지요?”
“방금 전까지 밖에 있다 오니 조금 쌀쌀해서 말입니다.”
“···지금은 4월인데요?”
“콜록콜록! 아이 추워라. 어으 춥다!”
“아, 프랑스 분이시라 영국 날씨가 춥게 느껴지시는 것 같군요. 땔감을 조금 더 넣으라고 사환들에게 말해 놓겠습니다. 그러면 잠시.”
푸른 색 제복을 칼각으로 잡아 입은 저비스 제독은 내게 고개를 숙인 후, 저 멀리 있는 사환을 향해 잠시 몸을 움직여 사라졌다.
나는 그런 저비스 제독의 뒤를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연회장 안에 즐비한 사람들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이제 퀘스트의 마지막, 보스전을 시작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