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6화 왕관의 보석 (10) (166/341)

왕관의 보석 (10)

“뵈머 씨. 제 앞으로 날아온 사교모임 초청장 있습니까?”

그레이트브리튼을 두고 싸우는 정적을 갈아버리고자 독기를 품은 프로메테우스, 윌리엄 피트 수상에게서 희대의 혜자 퀘스트 보상을 선불로 받은 나는,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내 비서역할을 담당하는 뵈머 씨를 향해 말했다.

“어···, 물론입니다. 각하.”

뵈머 씨는 갑작스러운 내 물음에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순순히 내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좋습니다. 그거 싹 다 저한테 가져다주십시오.”

“예, 각하.”

“···음?”

“왜 그러십니까, 각하?”

“원래 뵈머 씨라면 이쯤에서 한 번 쯤 딴지를 걸어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여태까지 그냥 다 무시하셨으면서 갑자기 웬 초청장 말이십니까?’라던가.”

나는 의자에 편히 앉아 갑갑한 넥타이를 풀며 말했다. 그러자 뵈머 씨는 잠시 허허 웃은 뒤에 날 향해 입을 열었다.

“이미 제 머리로는 따라가지 못할 각하의 신통함을 이 뵈머의 눈으로 몇 번이나 봐왔는데, 굳이 제가 초를 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련히 깊은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에이, 저야 그냥 평범합니다.”

“허허.”

뵈머 씨는 그저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린 후, 내 사무실로 온 초청장과 편지가 보관된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뵈머 씨가 내게 전달해 준 초청장의 수는 어마어마했다.

“···이게 다 제 앞으로 온 초청장입니까?”

“그렇습니다, 각하.”

내가 업무를 보는 책상이 그래도 꽤 넓은 편인데도 그 책상을 거의 뒤덮은 초청장을 본 나는, 베르사유 재무총감실의 PTSD를 겨우 억누르고 그 중 가장 위에 있는 초청장 한 장을 집어들었다.

꽤나 돈을 쓴 듯, 화려하게 치장된 초청장에는 이 그레이트브리튼 어딘가에 살고 있을 어느 귀족 나리의 이름이 초청장보다 더 화려하게 새겨져 있었다. 역시 남들과는 다르게 색다르게 살고 싶은 귀족 나리들답다.

“···귀빈께서 꼭 참석하셔서 이 자리를 빛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쩌고저쩌고 남작.”

확실히 다 초청장이군. 좋아.

나는 고개를 돌려 뵈머 씨를 향해 입을 열었다.

“뵈머 씨. 여기 있는 초청장 중에 국가 기관에서 보낸 초청장도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각하. 재무부, 외무부, 귀족원, 서민원, 런던 시의회 등등. 많습니다.”

예전부터 말했지만, 이 18세기 말은 사교의 시대나 다름없다. 각종 정부고관부터 시작해서 좀 잘 산다하는 일개 정부부처 공무원들까지 주말이면 홀 하나 대관해서 케이크를 썰어대는 게 바로 이 18세기 말이다.

나름 프랑스 최고위직 출신인 나에게 초청장 하나 보내지 않을 눈치 없는 정부 부처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혹시 그 중에 해군성도 있습니까?”

“예, 각하.”

뵈머 씨는 고개를 끄덕인 후, 미리 따로 빼놨었는지. 한 푸른색 편지봉투를 품에서 꺼내 내게 내밀었다.

“이게 해군성에서 보낸 겁니까?”

“예, 각하와 저도 한 번 만나봤던 존 저비스 제독이 보낸 겁니다.”

“존 저비스라면... 아!”

도버 해협을 건너 날 태워다 준 그 지중해 함대장말이구나. 그러고 보니 일이 바빠서 아직 그 분이 추천해준 식당도 못 갔는데. 쩝. 아쉽구만.

“기억이 나십니까, 각하?”

“아, 나다마다요.”

나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 말했다.

“그러면 이제 해군성 이름으로 온 건 싹 다 제 책상에서 치워주십쇼.”

“···예?”

“재무부나 외무부 같은 다른 정부 부처에서 온 초청장은 그대로 책상에 남겨 주시구요.”

뵈머 씨는 내 말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저 눈만을 꿈뻑꿈뻑일 뿐이었다.

“아. 그리고 혹시 내일 잡혀있는 연회가 있습니까?”

“···예? 아, 예! 재무부 차관이 주최하는 모임이 내일 런던 화이트홀에서 열립니다.”

“좋군요. 제가 참석한다고 파발을 보내주십쇼.”

“예에··· 각하.”

“왜요, 제가 이러는 이유 궁금하십니까?”

뵈머 씨는 내 말에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나는 잠시 검지를 까닥여 뵈머 씨를 가까이 부른 뒤, 귀에 대고 작게 말했다.

“단순한 질투작전이라고 생각하십쇼.”

“질투... 작전말이십니까...?”

***

1793년 2월 중순.

영국 재무부 이름으로 대관된 런던의 한 연회장은 오늘따라 수많은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오늘 기욤 드 툴롱 총감이 온다지? 정말 흔치 않은 기회로군!”

“왜? 말이라도 섞어보려고?”

“당연하지! 혹시 아나? 돈벼락을 맞을 기회가 올지!”

혹여라도 전직 재무총감, 현직 사업가의 입에서 뭔가 노다지라던가, 아니면 금동앗줄이 내려오지는 않을까 부푼 기대를 품고 들어오는 자들.

“기욤 드 툴롱! 살아있는 계몽 정신과 대화를 나눌 기회라니! 이거야 말로 신께서 내려주신 기회가 아닌가!”

“음! 기욤 총감이 런던에 온 이후로, 사상범이라고 잡혀 들어간 우리를 정부에서 풀어줬으니 당연한 말이외다!”

“민중을 구원하자! 민중을 계몽시키자!”

바다 건너 이웃나라에서 전 유럽을 진동시킨 희대의 혁명가와 말 한 마디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들어오는 자들.

“오빠! 어떻게 이런 기회를 얻었어!”

“우리 여동생을 위해서 힘 좀 썼지! 마음에 드니, 제인?”

“물론이지! 나 지금 긴장해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아, 벌써부터 오늘 일기에 뭐라고 써야할지 걱정돼!”

여태까지 정부 고위직들만 만날 수 있었던 기욤 드 툴롱을 만날 수 있다는 소위 팬심 때문에 들어오는 자들까지.

“아, 사업이요? 글쎄요···. 미약한 제 식견이지만, 동인도 회사가 조금··· 문제가 많지 않습니까? 만약 동인도 회사가 프랑스 거였으면 제가 재무총감 시절에 박살을 냈을 겁니다. 아마 영국 재무부 직원들께서도 비슷한 생각 아닐까 하는데... 아, 뭐 그냥 제 식견일 뿐입니다. 식견.”

“고맙소! 고맙소 동무들! 내일도 이곳에서 연회를 열 것이니, 동지들을 많이들 데리고 오시오!”

“성함이··· 잔느 오스탱? 아, 영국이니 제인 오스틴이시군요. 반나서 반갑습니다, 레이디.”

젊은 혁명가이자 사업가를 만나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연회장의 불은 한동안 꺼지지 않았다.

***

1793년 4월.

항상 그랬듯, 황색 벽돌로 지어진 4층 높이의 런던 해군성(Admiralty House) 건물은 소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만약 이 시대에 층간소음방지법이 있었다면 근처 화이트홀(White Hall)에서 근무를 보는 공무원들이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어 해군성 군무원들과 장교들을 고소했겠지만.

안타깝게도 학교에 갈 나이인 여덟 살짜리 코흘리개 꼬마를 방적기 밑에서 중노동을 시키는 18세기 말 영국에 그런 친인권적인 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기에, 해군성 근무자들은 마음 놓고 소리를 꽥꽥 질러댈 수 있었다.

다만 오늘은 평소와 달리 소리를 지르는 이유가 업무 때문이 아니라, 이곳을 방문하는 한 높으디 높으신 분을 모시기 위한 준비 때문이었다.

“근무자 복장은?”

“말단 장교부터 군무원들까지 모두 군수창고에 쟁여놓은 A급 제복을 뽑아 입혀놨습니다.”

“대접해드릴 차는?”

“걱정하지 마시지요. 싱가포르산 최고급 홍차로 준비해놨습니다.”

“식사준비는?”

“런던 최고로 뽑히는 레스토랑의 주방장을 미리 빼왔습니다.”

“나쁘지 않군.”

현직 지중해 함대장이자 차기 제 1해군경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입장인 존 저비스 해군 중장은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부관을 향해, 만족스럽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하는 소리와 함께 입을 열었다.

“······혹시 모르니 지금 런던 항에서 휴식을 취하는 수병들도 완벽하게 세팅해서 대기시켜놓게. 우리 대영제국 해군의 완벽한 모습 외에는 절대 귀빈께 보여드릴 수 없네.”

“예, 제독님!”

자신의 명령을 받고 서둘러 뛰쳐나가는 부관의 모습을 보고, 존 저비스 제독은 그제서야 마음의 짐을 조금 덜 수 있었다.

그도 그럴게, 지금 마차를 타고 해군성으로 찾아오는 귀빈이 보통 귀빈이 아니지 않나.

현 영국 사교계를 들었다 놨다하는 기욤 드 툴롱이 해군성의 대접에 불쾌함을 느낀다면 존 저비스 제독의 평판은 물론, 타 정부부서에게 야만적인 놈들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해군성의 평판 또한 그리 좋은 꼴은 못 볼 게 뻔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재무부 놈들이 설치는 건 절대 못 보지.”

존 저비스 제독은 그렇게 읊조리며 길게 심호흡을 했다.

- 하아, 또 건함 계획이라니! 대체 해군은 여기서 뭘 더 원하는 겁니까?!

- 우리 대영제국의 영향력을 바다에서 견고히 유지하기 위해서 새로운 함선 건조는 필수적이란 걸 모르시오?

- 아니. 해군성에 그만한 자금을 할당한다면 우리 육군은 대체 뭘 들고 싸웁니까? 활과 화살? 투석기? 혹시 제독께서는 지금이 18세기가 아니라 14세기인줄 아시는 겁니까?

- 어허, 본디 우리 대영제국의 국력은 육군이 아니라 해군에서 나오는 것이오!

항상 레퍼토리는 똑같았다.

군비에서 해군이 차지하는 비중을 올리고픈 해군성과, 어떻게 해서든 지출을 깎으려는 재무부.

- 하, 국력 좋아하시네! 당신들은 뇌가 딱딱한 군바리라 모르나 본데, 우리 대영제국이 지고 있는 부채가 얼만지 아쇼? 자그마치 1억 7천만 파운드요! 1억 7천만!! 우리 1년 세입이 2400만 파운드인데 부채가 1억 7천만이라고!!

- 그건 니들 재무부가 방탕하게 돈을 관리해서 생긴 문제지!! 그게 왜 우리 해군 때문이냐?

서로 간에 고성이 오고가는 건 이미 당연지사.

- 하, 길거리에서 사람 잡아다가 수병으로 강제 입대를 시키는 놈들한테 방탕하다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군요. 저번에는 지나가던 시의원을 잡아다가 칙칙한 군함에 처박았었지, 아마?

- 뭐, 뭐? 하! 우발적인 실수를 가지고 공격하다니!! 그렇게 따지면 도버 해협 건너 프랑스 재무부는 35억 리브르 짜리 차입을 잘 갚아나가던데, 우리 대영제국 재무부는 그만한 능력이 없나보오? 우리 해군은 이미 바다에서 프랑스를 능가 했는데 말이야!

- 뭐, 이 새끼야?! 프랑스! 야! 계급장 떼! 한 번 붙어!!

- 누가 못할 줄 알고?! 부관! 내 검을 가져오게!

끝내는 서로 신사의 탈을 벗어 던지고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들기까지.

이미 재무부와 해군성 둘은 대영제국이라는 한 지붕 아래 같이 사는 철천지원수나 다름없었다.

존 저비스 제독은 자기도 모르게 이를 북북 갈았다.

멍청한 재무부 놈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재무부 놈들.

왕관의 보석인 뱅골에 있는 영국의 거점을 지키기 위해선 더 많은 해군과 더 많은 함선, 더 많은 수병이 있어야 한다는 간단한 것도 알지 못하는 건가.

그런 재무부 놈들의 콧대를 눌러주기 위해서라도 오늘의 이 만남은 중요한 만남이었다.

비록 잠시 도버 해협을 건널 때 만난 인연이지만, 존 저비스 제독이 만난 기욤 드 툴롱은 반듯한 인사였다. 결코 해군에 악감정 따위는 찾아 볼 수 었었단 말이다.

그런데 그런 인사가 해군성의 초대에 여태껏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는가.

기욤 드 툴롱이 사교계의 초대에 처음 응했던 게 바로 재무부 놈들이 주관한 연회였으니, 아마 그곳에서 재무부 놈들이 세치 혀를 놀려 귀빈을 현혹시킨 게 분명했다.

“제독님, 귀빈께서 곧 도착하십니다!”

“좋아, 의장대 사열을 준비하게.”

“예! 제독님!”

존 저비스 제독은 다시 한 번 옷매무새를 만진 뒤, 자신의 사무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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